물리부안지(안녕하세요)! 저는 작년 한 해 따뜻한 심장의 나라, 말라위로 해외 봉사를 다녀왔습니다.그곳에서 제가 발견한 사랑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한번은 저희가 작은 마을로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동네는 샤워장이 따로 없어 풀숲에서 얼른 씻어야 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벌레가 몸에 기어오르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저녁 시간이 다 되었을 때, 저희는 마을의 한 아주머니의 초대를 받아 그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집은 아이만 아홉 명이 있는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아마이
카이스트 대학교에 입학한 후 첫 학기를 마치며 처음으로 ‘노력하면 무조건 된다.’라는 말이 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보다 뛰어난 친구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학교 선배는 제게 일반고 출신이면 학점 3.3도 못 받는다고 하더군요. 고교 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막상 대학교에 오고 나니 뚜렷한 목표도 사라졌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보며 허무와 공허를 느끼며 지쳐갔습니다.잠시라도 쉬고 싶었던 저는 1학년을 마치고 곧바로 아프리카 에스와티니로 해외 봉사를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정말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요
해외 봉사를 떠나기 전, 제 삶은 마치 이곳저곳이 고장난 불량품 같았습니다. 체중이 120kg가 넘었고, 허리 압박골절과 높은 간 수치를 걱정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전 정상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어요.어린 시절, 저희 부모님은 매일 술에 취해 계셨어요. 그러다 두 분이 크게 다투실 때면 저를 때리며 다 같이 죽자고 하셨죠. 그 모습은 제게 무척 고통스러운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하지만 제 마음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죠. 어떻게든 잘살아
저는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났어요. 그리고 1분 먼저 나왔다는 이유로 언니가 되었죠. 동생과 저는 태어난 건 1분 차이지만, 일상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었어요. 동생은 얼굴도 예쁘고 재능도 많아서 어릴 때부터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제 속엔 항상 동생을 향한 열등감과 부모님을 향한 서운함이 있었어요.한번은 아프리카로 해외 봉사를 다녀온 사람들을 보았어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색칠 공부를 가르치고, 페인트로 벽화를 그려주며 행복해하는 봉사단원을 보면서 ‘나도 저런 일을 해보고 싶다!’ 생각했어요. 부족한 게 많은 저도 미술
10년 전, 아이티에서 대지진으로 거의 30만 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아이티에 해외 봉사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고 취업 준비를 하느라 잊고 지내다가, 부모님의 사업이 기울면서 제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필요해 해외 봉사를 결심했습니다.처음에는 어려움의 연속이었어요. 미국을 경유해 아이티로 갔는데, 경유 과정에서 가방이 어느 미국 분과 바뀌었습니다. 아이티에 도착해 그 사실을 알고 바로 주인에게 가방을 보냈는데,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모든 비행기가 취소돼 제 가방은 결국 받질 못했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다저는 어려서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놀기 좋아하고, 학교도 잘 안 가서 부모님이 많이 속상해하셨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삶을 대충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가 제게 넌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I have a lot of shortcomings, but I’m a new person.”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지금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라고요.1년 전 하루하루를 의미 없게 보내던 어느 날, 스리랑카로 해외 봉사를 떠났던 누나가 돌아왔어요. 제게 스리랑
나의 첫 대학 생활은 정신없이 바빴다. ‘예쁘고 밝은 친구’로서의 모습을 지키며 친구들과 잘 지내야 했고, 학과 공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여겼다. 누군가 내게 점수를 매긴다면 평균점은 나온다고 생각했다.나는 성격이 쾌활해 늘 친구들과 잘 지내왔고, 어릴 적부터 ‘예쁘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으며, 공부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외 봉사를 가기 전, 내가 꿈꿨던 모습들이 있다. 스페인어를 빨리 배워서 현지 사람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해주고, 주변 나라들에도 자유롭게 왕래하며 많은 경험을 하는 것. 이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란 부푼 기대를 안고, 나는 남아메리카에 있는 콜롬비아로 떠났다.불청객 코로나바이러스콜롬비아에 도착하자마자 같이 온 봉사단원들과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최대한 다양하고 알차게 하고 싶어서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등 언어는 물론 태권도, 미
2020년 한 해, 온라인으로 해외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제1기 온라인 해외봉사단원’. 2020년 3월만 해도 이들은 여느 봉사단원들처럼 1년간 해외에서 지낼 채비를 차곡차곡 마치고 비행기 뜰 날만 기다리던 대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출국 하루 전날 하늘길이 막혔고, ‘왜 우린 못 가는 거야?’라는 실망감과 억울함에 힘이 쭉 빠졌다.그때 이들은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포기할 것이냐, 맞서 싸울 것이냐’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남들이 미련하다고 하든지 말든지 하늘길이 열릴 때까지, 아니, 열리든 말든 한국에서 어떻게
나는 학창시절부터 성격이 무척 소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가장 아쉬웠던 점이 선생님, 반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며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특히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국제적인 무대에서 영어로 연설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입학 후 다양한 대외활동에 참여했다.1학년을 마친 후, 아프리카 가나로 해외봉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워크숍에 참석하며 바쁘게 지냈다. 내틀에서 벗어나 나는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10초만 참으셔글 이지민레소토는 사계절이 있는 나라다. 레소토의 겨울은 한국과는 반대로 6월부터 8월까지인데, 평균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꽤나 춥다. 올해 7월에는 레소토에 5년 만에 눈이 내렸다. 아프리카에서 눈을 보는 아주 진귀한 경험을 했다. 그때 나는 롱패딩을 입고 눈을 맞았는데, 내가 있는 곳이 아프리카인지 남극인지 헷갈릴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졌다.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그랬다. 난방이 잘된 따뜻한 집에 누워서 귤을 까먹고 있노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겨울은, 우선 난방시설이 없
해외봉사를 떠나올 때 나는 ‘최대한 많은 걸 경험해야지!’ ‘행복하게 즐겁게 지내야지’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짐바브웨에서 생활을 시작하자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마주해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간관계였다. 한국에서 가장 골치 아파했던 문제가 짐바브웨에서도 여전히 날 괴롭혔다. 짐바브웨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해외봉사자도 와서 같이 지냈는데,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리’라는 중국인 언니와 계속 부딪혔다.언니는 나와 성격이 전혀 달랐다. 언니는 자신이 하고 싶
대학생이 된 후 나는 우크라이나로 해외봉사활동을 왔다. 이 나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너무 멋있는 건물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수도 키예프에 있는 ‘졸로티보로타’ 지하철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곳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황홀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좋은 것을 꼽으라면 ‘산책하는 문화’다. 이곳 사람들은 하루에 최소 1시간에서 최대 4시간까지 걸으며 산책한다. 그래서 곳곳에 산책하기에 좋은 다양한 공원이 많고, 산책하며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를 구석구석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내가 산책 시간을 기다리는 이유가
짐바브웨의 한 시골 마을에 가서 한국어 수업을 열었습니다.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이 제게 다가왔고, 저에게 짐바브웨 현지어인 ‘쇼나어’를 가르쳐 줬어요.“내 이름은 홍성현입니다.”“디무지 홍성현(?)”“디문지 홍성현(!)”혀가 짧아 발음을 잘 못하는 저를 보고 아이들이 한바탕 웃었고,저도 아이들과 함께 웃었습니다.짐바브웨에서 지내다 보면,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즐겁고 웃음이 나옵니다.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들과 진심으로 함께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볼 때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나도 이렇게
우간다에서 받은 값없는 사랑은 내 마음에 단단하게 박혀있던 이기적 유전자를 빼내었다. 이제 그곳에는 행복이 가득하다.“민서야, 왜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않아?” 봉사단원 중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가 울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우리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청소년 캠프를 위해 댄스팀을 만들어 연습하고 있었다. 외국인과 현지인을 포함해 총 12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나는 댄스를 좀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로 팀장이 되었다. 다들 댄스에 서툴렀지만 모든 팀원은 열심히 연습했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필리핀으로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다녀온 학생들은 필리핀을 ‘기회의 땅’이라고 부른다.한국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2,000여 명이 참석하는 규모의 행사를 기획하고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봉사단원들과 함께 했기에 ‘끝까지’ 도전할 수 있었다.그들은 1년간 필리핀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필리핀의 진짜 매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싶다. 남을 위해 사는 삶이 가장 값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굿뉴스코는 나를 순도 100%의 보석으로 만든, 최고의 용광로이다. “아, 그냥 집에 가련다.”아프리카 에스와티니로 봉사 온 지 6개월이 됐을 때, 내 입에서 나온 소리다. 굿뉴스코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에스와티니 정부는 청소년 선도를 위한 목적으로 10만 평의 땅을 기증했고, 우리 봉사단원들은 굿뉴스코 청소년센터를 짓는 건축 봉사를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건축이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키리바시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써야 하고, 빗물을 받아쓰며 손빨래를 해야할 만큼 환경이 열악하지만, 내가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다희야, 동생들 밥 좀 챙겨줘.”내가 집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나는 장녀로 태어나 아래로 세 명의 동생이 있다. 부모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다희야, 이번 달도 집이 많이 어렵다. 네가 장녀니까 많이 도와줘야 해.” 하며 나에게 동생들을 맡기고 일터로 가셨다.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며, 동생들도 잘 돌보고 나중에 커서 꼭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다.알지만 안 되는 것들고등학생 때 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