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대학 생활은 정신없이 바빴다. ‘예쁘고 밝은 친구’로서의 모습을 지키며 친구들과 잘 지내야 했고, 학과 공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여겼다. 누군가 내게 점수를 매긴다면 평균점은 나온다고 생각했다.

나는 성격이 쾌활해 늘 친구들과 잘 지내왔고, 어릴 적부터 ‘예쁘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으며, 공부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아프리카의 ‘에스와티니’라는 나라에서 해외 봉사활동을 하며 발견한 나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내가 ‘트러블 메이커’라니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한 에스와티니는 ‘아프리카의 스위스’라고 불릴 만큼 평화롭고 아름다운 자연으로 알려진 나라이다. 특히 석양이 지는 숲길 풍경, 눈으로 떨어질 듯 반짝이는 별들이 펼쳐진 밤하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곳에 처음 도착하던 날, 나는 아름다운 숲을 보며 생각했다. ‘현지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열심히 봉사도 하고, 인생 사진도 많이 찍어야지!’ 하지만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국경이 봉쇄되었고, 지부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에는 불평, 원망, 짜증이 가득해졌다. ‘내 인생에 한 번뿐인 시간인데 망했어!’

그 시기, 지부장님은 단원들에게 코로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온라인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갑갑하기만 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현지인들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내가 생활했던 봉사 센터에는 몇 명의 현지인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 청소나 설거지 등 집안일을 당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했는데, 하루는 현지 친구들이 약속한 시각에 설거지를 하러 오지 않았다. 한두 번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무척 화가 났고, 그들을 찾아가 쏘아붙였다. “너희는 도대체 약속을 왜 안 지키는 거야?!”

그렇게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한참 싸운 후에야 에스와티니 사람들은 일을 서로 나눠서 하는 것이 익숙해 당번이 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함께 해외 봉사를 떠났던 한국 단원들이 나에게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은주야, 너 사람들한테 너무 심하게 말하는 것 같아.”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에스와티니에서는 작은 일로도 사람들과 다투고, 문제를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였다. 다른 단원들은 현지인들과도 잘 지내고 지부장님의 말씀에도 잘 따르는데,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후 지부장님 사모님이 나를 잠시 불러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셨다. 갑갑한 심정을 이야기하자 사모님은, 내가 이곳에서 누구보다 즐겁게 지낼 수 있는데 내 마음에 있는 한 가지 생각이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고 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지 못해.”

생각해보니 나는 에스와티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늘 내가 옳다고 여겨왔었다. 하지만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지부장님의 이야기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그때부터 정말 새로운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한 공영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코로나19로 인해 아이들이 집안에서만 지내고 있으니,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영상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는 매주 어린이들이 따라 하기 쉬운 댄스나 노래, 간단한 손 유희나 연극 및 레크리에이션 등을 기획했고 이를 영상으로 만들었다. 몇 달 뒤엔 코로나가 조금씩 잠잠해졌고, 그때부턴 내게 9살 난 에스와티니 공주님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칠 기회도 주어졌다. 일주일에 두 번씩 왕궁을 찾아갔는데, 바이올린 레슨뿐 아니라 같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다. 꿈만 같았다. 아무것도 못 할 줄로 알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더 기쁘고 즐거웠다.

해외 봉사단원의 가장 큰 실패는? 하지만 활동이 하나둘 늘어가자, 나는 다시 불평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방송국에 보낼 프로그램으로 어린이 댄스를 기획했다. 에스와티니 어린이들과 함께 댄스 영상을 찍어야 했는데,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보니 속이 탔다. 그럴 때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마음이 조급해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지고 날카롭게 말을 했다. 함께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즈음 지부장님이 한국 봉사단원들을 모두 불러 몇 개월간 우리를 지켜보며 느끼셨던 점을 이야기하셨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많은 사람과 만날 수는 없지만, 우리 센터 안에도 현지인들이 있는데 다 각자 자기 일만 하려고 하지 아무도 그들과 마음을 나누려 하지 않고 있어. 이렇게 지낸다면 너희들의 해외 봉사는 실패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머리가 ‘띵’ 했다. 나는 내가 맡은 일만 잘하려 했다. 그러면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들의 마음은 어떤지, 어떻게 대화하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와 함께하며 불편했을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는 그날 복잡한 생각 때문에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하지만 지부장님은 그때부터 마음을 바꾸면 된다고 하며 괜찮다고 하셨다. 그후로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귀국을 두 달 앞두고 크리스마스 행사를 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는데 그 중 ‘세페토’라는 친구가 있었다. 하루는 행사를 준비하다 의견이 맞지 않아 세페토와 다투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그 친구가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기보단 일을 진행하기에 바빴을 텐데, 그땐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하는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그 친구에게 다가가 사과했고, 내가 어떻게 자랐고 아프리카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등 나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신기한 건 그 친구와 종종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행사를 마치고 나는 세페토와 무척 친한 사이가 되었다. 너무 기뻤다. 그제야 지부장님이 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라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국에 돌아오기 며칠 전, 현지 친구들은 나에게 “은주야 너 참 많이 바뀌었어. 네 마음에 이제야 우리가 들어간 것 같은데 한국으로 돌아가니 너무 아쉽다.”라고 말했다. 그 말 속에 아픈 말을 툭툭 내뱉는 나를 참아주고 기다려준 현지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불평만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곳에서 지부장님과 현지인들 그리고 동료 단원들과 함께 지내며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한국에서 나는 늘 잘하고 싶었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에스와티니에서 발견한 ‘나’는 부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드러날 때 나는 새로운 세계를 배울 수 있었다. 일 년 전에는 학년이 더할수록 어려워질 학과 공부가 가장 부담스러웠다. 아니, 공부를 잘 못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실패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이젠 부족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두렵지 않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실패를 통해 더 새롭고 깊은 세계를 배울 수 있으니까.

글=박은주(에스와티니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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