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코 해외봉사단_우간다 홍민서

우간다에서 받은 값없는 사랑은 내 마음에 단단하게 박혀있던 이기적 유전자를 빼내었다. 이제 그곳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민서야, 왜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않아?” 봉사단원 중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가 울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우리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청소년 캠프를 위해 댄스팀을 만들어 연습하고 있었다. 외국인과 현지인을 포함해 총 12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나는 댄스를 좀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로 팀장이 되었다. 다들 댄스에 서툴렀지만 모든 팀원은 열심히 연습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캠프 진행팀과 조율하는 과정에서 댄스곡을 급히 바꿔야 했고, 음악이 교체되면서 댄스도 달라져 팀원 중 한 명이 아예 빠져야 했다. 하지만 자신의 역할이 사라진 줄도 모르는 팀원은 열심히 댄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언니는 이제 댄스 연습을 안 해도 돼요.”

나는 왜 연습할 필요가 없어졌는지 언니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사무적인 말투로 결과만 통보하는 나의 태도 때문에 언니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고, 지부장님에게 나에 대한 불만을 모두 털어놓았다. 지부장님은 우리에게 연습을 잠깐 멈추고 다 같이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자고 하셨다.

“민서야, 네가 팀장으로서 댄스를 잘 가르치는 건 좋아. 하지만 네가 나중에 리더가 되고 싶다면 한 가지 꼭 배워야 하는 것이 있어. 그건 바로 사람의 마음까지 돌봐주고 이끌어주는 거야. 댄스만 잘하려고 하지 말고 팀원들과 먼저 마음을 나눠.”

‘내 성격 자체가 누군가와 소통하는 것이 서툰데, 다른 사람의 마음마저 이끌어야 한다고?’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너밖에 몰라!” 어릴 때 친구들에게 자주 듣던 말들이다. 나는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내 마음을 잘 전달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해서 친구들이 내게 불평불만이 많았다. 그때마다 내 마음도 편한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이 나를 싫어할까 두려워서, 내 성격과 행동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들어주려고 했고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나눠주었다. 그런다고 해서 친구들과의 사이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마음을 나누는 것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홍민서’ 개인이 아닌 팀장이기에 안된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지부장님께 들은 말을 되새기며 팀원들과 모여 속마음을 꺼내놓았다. 각자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어려움들을 이야기하며 조금씩 이해하고 공감의 폭도 넓히려 했다. 이후에도 문제는 여전히 많았다. 서로 싸우거나, 한계를 만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댄스 연습을 잠시 멈추고 모두 모여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에게 지금 문제가 뭐야? 왜들 그러지?’ 이런 주제로 대화를 해가면 신기하게도 갈라진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댄스에서 빠진 언니는 우리가 연습할 때 무대 아래에서 바라보며 정확하게 동작 하나하나를 체크해주었다. 우리는 이제 한마음이 되어 댄스 연습을 할 수 있었다. 끝까지 서로의 마음을 이끌어주며 마침내 공연을 마쳤을 때, 우리는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체험 여행의 첫날 저녁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4월로 기억한다. 그때 우리는 모코노Mukono라는 지역으로 2주 간 체험 여행을 떠났다. 처음 떠나는 여행에 설레었던 것도 잠시, 첫날 저녁부터 배가 살살 아파왔다. 2시간 동안 화장실을 20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구토, 설사, 현기증 등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찾아왔다. 여행지 숙소의 주인인 시실리아 할머니가 약을 주셔서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배는 점점 더 아파왔고 걸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지인들은 내가 힘들어할 때 항상 와서 물었다. “민서! 무슨 일 있어? 왜그래?” 그 현지인들 중에는 내가 못된 말을 퍼부었던 친구도 있었고, 상처 주었던 친구도 있었다.
현지인들은 내가 힘들어할 때 항상 와서 물었다. “민서! 무슨 일 있어? 왜그래?” 그 현지인들 중에는 내가 못된 말을 퍼부었던 친구도 있었고, 상처 주었던 친구도 있었다.

‘왜 이렇게 몸이 점점 차가워지지?’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고, 귀도 먹먹해졌다. 새벽 1시쯤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하더니 결국 바닥에 쓰러졌다. 깜짝 놀란 시실리아 할머니가 나를 부축해서 급히 병원에 갔다. 하지만 병원 문이 닫혀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철퍼덕 쓰러져 버렸다.

“세상에! 민서! 일어나 봐….” “도와주세요! 여기 아픈 사람이 있어요!”

시실리아 할머니는 병원 문을 세게 두드렸다. 그러자 건물 안에 불이 탁 켜지더니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내 상태가 심각한 걸 본 그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깨웠다. 그렇게 나는 기적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링거를 5팩이나 맞았다.

“민서, 이제 괜찮아. 금방 나을 거야. 내가 네 옆에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시실리아 할머니는 내 옆에서 밤새 간호를 해주셨다. 혹여 내가 추울까 이불도 덮어주고, 수액이 다 떨어질 때마다 꼼꼼히 갈아주셨다. 그렇게 밤새 할머니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다음날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한번은 학생캠프를 하러 한 학교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교실 바닥 곳곳에 더러운 물들이 고여있었고 상한 바나나 껍질, 벌레 등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했다. 우간다에 지내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하나하나가 감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번은 학생캠프를 하러 한 학교를 방문했다가 깜짝 놀랐다. 교실 바닥 곳곳에 더러운 물들이 고여있었고 상한 바나나 껍질, 벌레 등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했다. 우간다에 지내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하나하나가 감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 제가 지금 돈이 없는데 병원비는 어떡하죠?”

“괜찮아. 내가 다 냈어. 네 몸이 나아서 다행이다.”

‘우간다는 의료보험도 없으니 병원비가 비쌀 텐데….’ 어려운 형편에도 내 병원비를 내주신 할머니 마음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할머니의 손녀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나를 걱정해주고 간호를 해주지?’ 나는 이득이 있어야만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쏟는데, 할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과 배려를 맛보면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나에게 이런 사랑을 준 사람은 시실리아 할머니 한 분이 아니었다. 한번은 ‘어린이캠프’를 하기 위해 시골마을에 간 적이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이런 곳까지 와서 고마워요.” 라고 말하면서 망고 3개를 주셨다. 감사 인사를 제대로 하기도 전에 갑자기 사람들이 내게 줄줄이 파인애플, 토마토, 패션프루트 등을 주었다. 깜짝 놀랐다. 우간다는 끼니도 잘 챙겨먹지 못하고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은 자신이 팔아야 할 과일을 우리에게 준 것이었다. 또 마지막 날에는 한 친구가 자기 일을 접어두고 마을을 구경시켜준다며 안내를 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어설픈 영어로 어린이 캠프를 했고, 마을 주민들은 우리가 가난에 지친 삶에 희망을 주었다며 행복해했다. 나도 너무 행복했다. 나의 가시 돋은 성격 때문에 항상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만 주었는데, 그런 내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다. 그들은 늘 내가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내게 주었다.

지금까지 내 마음에는 ‘이기적’ 유전자가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 그 유전자가 나만 생각하게 했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우간다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는 법을 배우고, 값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나는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게 당장의 득이 없어도 내 곁의 사람들을 귀하게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가 빠져 나간 내 마음에 지금은 행복이 가득하다.


글쓴이 홍민서
우간다에서 보낸 ‘1년’이 생애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다고 말하는 홍민서 씨. 초콜릿 한 조각에도 행복을 느끼고, 붉은 흙과 먼지로 가득한 길거리를 걷던 순간들 그리고 마음의 이야기를 하면서 펑펑 울던 날들이 그립다고. 언젠가 우간다에 꼭 돌아가고 싶다는 그녀는 한국과 우간다를 잇는 대사관에서 일 할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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