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사실이 있다. 홀로 아픔을 겪을 때 괴롭다는 것, 배고플 때 한 끼 밥에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 마음이 맞는 사람과 대화할 때 즐겁다는 것 등등. 최근 안동 깊은 산골 과수원에서 휠체어를 탄 남편과 아내가 잘 익은 사과 향기보다 더 진한 행복을 느끼며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가 사이 좋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산이 좋았던 우리가을 냄새가 짙게 풍기는 11월 초, 반정현 안순영 부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빨강, 노랑 등 가을 색이
한국에 대한 기억이 많진 않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추억이 하나 있다. 그때 나는 아빠와 함께 동대문시장에 놀러갔다가 아빠 손을 놓치는 바람에 한참을 혼자 울고 있었다. 어렵게 다시 만난 아빠는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달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주셨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 많은 아이스크림을 홀랑 다 먹고 배탈이 났고, 겨우 멈춘 울음이 다시 터졌다. 이게 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국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6살 때, 어머니의 나라 몽골에 왔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어야만 성공한 인생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우정을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첫번째는 ‘자기 이익을 위한 우정’, 두 번째는 ‘단순한 즐거움을 위한 우정’ 세 번째는 ‘완벽한 우정’이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완벽한 우정이란 즐거울 때든 슬플 때든 삶을 함께 공유할 수 있으며,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근거한 ‘완벽한 우정’을 가진 두 사람, 세븐디그리 건축사무소 권혁천 대표와 오충환 과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 세계에 코로나19의 여파는 멈출 줄 모르고 있다. 그 폐해는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에 더 매섭게 몰아친다. 일해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자리까지 잃는 이때에, 미얀마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 싶다는 한국인 강사가 등장했다. 현지인 수준으로 미얀마어를 구사하는 이은정 씨는 지난 5월부터 페이스북에 마인드강연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다. 처음에는 조회 수가 1, 2만을 오락가락하더니 얼마 전에 올린 영상은 조회 수가 순식간에 70만을 넘겼다. 그는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미얀마에 거주하는 그와 영상채팅으로 인터뷰를 진
‘친구란 무엇일까? 인생에 친구는 꼭 필요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며 답을 찾았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힘은 강력하다. 때론 이끌어주고, 변화를 만들고, 각자의 삶을 탐험하며, 따뜻한 요람도 된다. ‘친구’라는 단어가 살아 있다면, 이 둘이 아닐까? 같은 사고를 당하며 ‘소울메이트’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문혜진 씨와 이선미 씨를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서로의 첫인상이 기억나시나요?혜진: 가나로 해외봉사를 간 50명의 단원 중 저와 동갑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에티오피아 카페 안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한국 돈으로 500원을 카페에 내고 카페 안 작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자기 팀을 열렬히 응원한다. 거리에 빈 깡통만 있어도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축구를 시작한다는 에티오피아. 그곳에서 축구를 가르치기 위해 1년 간 교육봉사를 다녀온 박성민 씨를 만났다. 현재는 한국으로 돌아와 보안 전문 회사에 다니며 대기업 임직원들의 의전을 담당하고 있다는 박성민 씨. 축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를 만나본다. Q. YTN 뉴스에 에티오피아
‘굿뉴스월드’ 사무실에서 홍석영 씨를 만났다. 서울시 양재동에 위치한 사무실은 정답고 아담했다. 평범한 회사원을 꿈꿨던 그가 필리핀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택한 직장은 ‘국제 개발 협력 NGO’였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자신도 행복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실제로는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신입사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분투했던 그녀의 4년 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NGO(비정부기구) 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에
학창시절, 나는 피아노가 좋았다. 한때 나는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피아노를 전공하기 위해선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고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런 내 열심에 하늘이 감동했을까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운이 좋아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정말 쉴 틈 없이 살며 대학을 졸업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원을 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그 다음엔 뭘 해야 하지?’ 쉽게 답이 떠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에 클래식 음악 축제가 열렸다. 거기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임현정도 함께했다. 베토벤을 좋아하는 그는 스무네 살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EMI클래식에서 데뷔 음반으로 발표했으며, 그 음반이 빌보드 차트 클래식 부문과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보통 몇 년 걸린다는 전곡 녹음을 그는 단 29일만에 해내 ‘천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코로나19로 줄곧 한국에서 머물고 있는 그녀가 아주 오랜만에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다. 처음에는 만나기로 했지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없고,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 없이 살고 싶어하지만, 고통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저는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 버려졌고, 생후 6주 만에 입양되었습니다.제가 4살 때 부모님은 제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슈바크만 다이아몬드 증후군’(Shwachman.Diamond syndrome 골수 기능 이상에 따른 혈구 감소가 나타나는 매우 드문 유전질환) 제가 걸린 병명을 아는 데에만 4년 반이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밤 병원 간이침대에서
지난해 필리핀에서 1년 간 해외봉사를 하고 돌아온 김은빈 씨.그는 필리핀에서 4개월간 '마인드 강사'로 50회 강연을 했고, 5천여 명이 그의 강연을 경청했다. 그는 해외봉사를 떠난 것이 인생에서 '신의 한 수'라고 말한다. 29살 평범한 회사원이 뒤늦게 해외봉사를 떠난 이유가 있나요?저는 대학 졸업 후 1년간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라는 고민만 깊어졌어요.
축구는 제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축구선수로 활동하며 돈을 벌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그 시간들이 ‘인생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유익한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긴 여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났지만, 6살 때 축구선수였던 삼촌을 따라 프랑스에 가서 성장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기회이며, 성공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피
피지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하는 가운데, 그는 한국의 좋은 장점들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잊고 살 만큼, 그가 한국에서 만족하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주한 피지 대사로 임명을 받아 2018년 9월에 한국 땅을 밟았다. 외교관으로서 첫 부임지였다. 오세아니아에 호주와 뉴질랜드를 제외한 14개의 섬나라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에 외교 공관을 두고 있는 나라는 피지와 파푸아뉴기니 두 나라뿐이다. 절대적인 크기로 봤을 때는 작은 나라이지만 피지는
막내아들로 부러울 게 없이 살던 그가 어쩌다 아버지가 되었다.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환경미화원 시험에 도전하는데 자기가 쓰는 감동의 자기 이야기나는 딸만 넷인 집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니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도 남았다. 어머니는 나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셨고, 어떤 잘못도 감싸 주셨다. 나는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며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정말 편하게 살아온 것이다.꼭 그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나의 습관 속에 공부도 포함되어 나
현대 사회는 가족 구성원이 단출해지고 있다. 1인 가족도 늘고 있다. ‘유재하·신미라’ 부부도 1년 전엔 도시에 사는 전형적인 핵가족이었다. 그런데 남편 유재하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 지금은 충주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처음 귀농 소식을 주변에 알렸을 때 사람들이 유재하 씨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어떻게 아내를 설득했어?”였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신미라 씨 또한 처음부터 귀농이 반갑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귀농을 택했고, 지금은 남편이 무척 고맙다고 말한다. 그들의 시골 생활은 어떨까? 신미라 씨의 시점으로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즐겨 푸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의 고향 진주에서는 다들 그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거라고 확신했지만, 정작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취업의 길로 눈을 돌리려던 그때, 국세청에서 ‘국립세무대학’을 설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들에게 4년 학비 전액과 생활비까지 지급하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당시 세무대학의 경쟁률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지만,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어렵지 않게 입학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재정학, 세법, 회계학 등 남들은 이해하
사회적 규제, 도덕교육으로 청소년들의 자살, 범죄, 중독 등의 문제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증가추세로 지속되자 그 대안으로 마인드교육이 세계적으로 급부상하였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미국,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에서 마인드교육이 곧 시행될 예정이다. 그 나라의 교육관계자 및 교사들이 자국에서 마인드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연수를 받으러 한국을 찾았다. 마인드교육의 학습 과정과 시행 효과를 알고자 먼저 학습자의 위치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이다. 마인드교육은 학습자의 실질적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기에 연수를 받는 사람들에게 상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글과 사진 중심의 정보를 전달하는 블로거들이 한창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일상을 영상에 담아 공유하는 유튜버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유튜버 스타 크리에이터들은 10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어서 그들이 제작한 영상의 파급력이 상당하다. 그런 그들과 함께 영상을 제작하며 ‘누구나’ 자신의 영상을 찍을 수 있다고 알리는 영상 감독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하고 싶다는 신보석 영상 감독을 만났다.31살에 그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며, 아내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 3명 중 1명 꼴로 한부모 가구 자녀라고 한다. 한부모 가족 비중이 커졌지만, 이들을 위한 정서적 교육이나 상담은 부족한 상황이다. 그 중 유년시절 부모의 불화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거나 상대적으로 낮은 자신감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이 상처는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 아물 수 있다. 이번 칼럼의 주인공은 8년차 주부 이은아 씨다. 그녀가 어떻게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기억에서 벗어나 가족을 꾸리며 따뜻하게 살고 있는지 1인칭 시점으로 소개한다.
로날드 일등서기관은 원래 사업가였다. 볼리비아의 자연수엔 석회질이 많아 그냥 마실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을 사 먹는데, 그는 이런 점에 착안하여 24살부터 산타크루스에서 ‘OK Water’라는 브랜드로 생수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꽤 대중화되어 잘 많이 팔리는 상품이지만, 처음은 그렇지 않았다. 초기에 그는 무거운 물통을 들고 유명한 가게부터 소박한 가정까지 모든 대문을 두드리며 물을 소개했는데, 이렇게 방문판매를 하는 것이 매우 창피했다고 한다. “가끔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어요. 만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