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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오아람 | 승인 2020.09.11 15:50

학창시절, 나는 피아노가 좋았다. 한때 나는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피아노를 전공하기 위해선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고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런 내 열심에 하늘이 감동했을까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운이 좋아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정말 쉴 틈 없이 살며 대학을 졸업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원을 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그 다음엔 뭘 해야 하지?’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한 교수님의 소개로 동남아시아에서 음악교육 봉사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물론 ‘얼론 돈을 벌어야 하는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시간에 쫓기며 사는 삶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도 모르게 가겠다는 답을 했고 3개월 뒤에 곧바로 동남아로 떠났다. 물론, 봉사하는 삶은 내가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많은 어려움도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좀 고생을 했지만 나만을 위해 살 때보다 행복했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살아도 행복하겠다’라고 느낄 즈음, 몸에 이상이 왔다. 두통이 오는가 싶더니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했고, 손이 굳어졌다. 나중에는 팔다리를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통증이 심해졌다. 아팠지만 한국에 곧바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약을 챙겨 먹어가며 아픈 몸을 이끌고 버텨보려 했으나 불가능이었다.

나는 봉사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병원에서는 내가 위험한 풍토병에 걸렸다고 했다. 너무 아팠고, 억울했다. 옥상에 올라가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을 주는 거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소리를 지르며 펑펑 울기도 했다.

그즈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엄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라고 했다. 그분은 나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에게 나는 그럴 시간이 없다며 모진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몇 차례 더 전화가 왔지만 나는 상대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다시 마주한 우리 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현실을 마주한 나는 어떻게든 살아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종이가방을 들고 오셨다. 그 목사님이 약값에 보태라고 주셨다며 나에게 건네셨다. ‘조그마한 교회의 목사님이 무슨 돈이 났을까’ ‘내가 뭐라고 이런 걸 챙겨주는 걸까’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내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나는 꾸준히 치료를 받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다.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만하며 살 수 없었고, 취업을 준비해야했다. 하지만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분야는 많지 않았다. 경력이라고 해보았자 봉사활동으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던 것이 다였다. 또한 당시 대한민국의 취업은 ‘빙하기’에 가까웠다. 나는 사립학교에서 피아노 선생님을 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세상에는 피아노를 잘치는 사람도, 영어를 잘하는 사람도 너무 많았다. 난 교육학을 전공한 적도 없었고, 이런 내가 뽑힐 수 있도록 도와줄 이 세계의 지인도 없었다. 계산을 하면 할수록 머리만 복잡했다.

“그래. 나 같은 사람이 합격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야…”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미 지쳤고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사는 것도 버거운, 이미 실패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절망뿐이었다.

그즈음 목사님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엄마에게 내 안부를 묻곤 했기에 최근 내 상황에 대해 알고 오신 모양이었다. 그날 나는 넋두리할 사람을 찾은 듯, 취업에 턱없이 부족했던 나의 자격 조건들에 대해 한참을 설명했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의 답변은 의외였다.

“사람은 참 지혜로운데, 위기의 순간을 만나면 아이큐가 현저히 떨어진다고 해.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거지. 네가 지금 그런 상황인 것 같은데?”

“네?”

“사람들은 모든 경험, 조건을 완벽하게 구축해 놓고 완벽한 존재가 되었을 때 도전하려고 해. 그리고 그 조건을 쌓다가 지쳐 결국 포기해 버리고 말지. 그런데 생각해봐. 어쩌면 그런 조건을 다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더 많을지 몰라. 그러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사람들은 별 볼 일 없는 쓸모 없는 사람일까? 조건이 없어서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믿는다면, 무슨 일을 해도 별 볼 일 없는 사원이 되고 결혼을 해도 별 볼 일 없는 엄마로 살아가게 돼.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내가 지금 어떤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기보다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꿈꾸고 말하며 살아가.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나는 네가 조건과 상관없이 앞으로 무엇을 변화시키며 살고 싶은지 또 어떤 마인드로 살아갈 것인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내가 변화시키고 싶은 것?”

한 번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나는 무엇을 변화시키며 살고 싶은 것인지’ 매일 생각했다. 취업도 취업이지만, 평생 형편없는, 혹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완성된 답변은 내 인생을 바꿔주었다.

어느 외국계 고등학교 음악 선생님을 뽑는다는 공지를 본 나는 그곳에 지원했고, 면접을 보러 갔다.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 분, 젊은 남자 분, 나이가 지긋하신 영국 신사 분, 교장 선생님까지 총 네 분이 앉아 계셨다. 내 서류에는 별 볼일 없는 이력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석사도 박사도 아니고 학사졸업에 교육과 관련된 경험은 전혀 없는 사람. 그런데 나는 전혀 기죽지 않았다. ‘이곳에서 떨어지든 합격하든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야. 이곳이 아니더라도 나를 만나는 학생들은 놀랍게 변할 수 있다’는 심정으로 면접에 임했다. 나의 서류에 적힌 내용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그리고 면접 말미에 교장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혹시 저희에게 궁금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네, 혹시 교장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나요?”

교장 선생님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의 답은 대략 아이들이 이곳에서 반듯하게 자라 사회에서 성공해 이웃에게 환원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답변이 이어졌다.

“저는 저를 만나는 학생들이 행운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뛰어난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동남아시아에서 피아노 교육봉사를 한 적이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피아노는 신기한 악기였지만, 내일의 소망을 줄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아이들에게 위대한 위인들의 삶과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며 꿈을 꾸는 삶, 도전하는 삶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꿈을 갖고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과학자 아이작 뉴턴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거인이 되라고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더 지식을 쌓으라고, 더 나를 가꾸고 다듬어야한다는 가르침 대신 거인의 어깨 위에 서는 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나는 늘 마음을 졸이며 ‘여기선 합격할 수 있을까?’ ‘또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고민만 했는데, 이번에는 내 마음의 꿈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것이 행복했다. 합격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며칠 뒤 다음 달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대신 아이들을 가르치며 교원자격증을 따는 조건이었다. 나는 몇 번이고 합격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외쳤다.

가슴이 먹먹했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런 나를 찾아와준 목사님이 고마웠고, 처음으로 가진 내 꿈을 믿어준 교장 선생님이 고마웠다.

첫 수업에 들어가던 날, 나는 무척 떨렸고 행복했다.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제자들의 연주 발표회를 준비하고 있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갔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피아노도 가르쳤지만 훌륭한 리더들의 마인드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 덕분에 최고의 교사상도 받았다. 나는 아이들이 과거의 나처럼 오랜 기간 방황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 세상을 바꾼 훌륭한 리더의 눈으로 세상과 삶을 대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오아람  info@dailytw.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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