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에 클래식 음악 축제가 열렸다. 거기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임현정도 함께했다. 베토벤을 좋아하는 그는 스무네 살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EMI클래식에서 데뷔 음반으로 발표했으며, 그 음반이 빌보드 차트 클래식 부문과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보통 몇 년 걸린다는 전곡 녹음을 그는 단 29일만에 해내 ‘천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코로나19로 줄곧 한국에서 머물고 있는 그녀가 아주 오랜만에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다. 처음에는 만나기로 했지만 코로나19 감염이 확산되면서 전화로 대신했다. 마음을 예리하게 헤집고 들어오는 열정적인 연주와 달리,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발랄하고 호탕했다.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Q.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 23번(열정), 32번 세 곡을 연주하셨어요. 곡 선정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베토벤의 3대 피아노 소나타 곡으로 보통 8번(비창), 14번(월광), 23번(열정) 세곡을 꼽아요. 저는 14번(월광) 대신 32번을 골랐어요. 피아노 소나타 8번은 베토벤이 20대 후반에 쓴 곡이고, 23번(열정)은 30대 중반에, 32번은 40대 중반에 작곡했어요. 저는 이 세 곡을 통해 제가 느꼈던 베토벤의 생애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소나타 8번이 작곡될 당시 베토벤은 여러 귀족들에게 초대를 받는 등, 명석한 두뇌와 절대음감을 지닌 권위 있는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었어요. 외적으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시절이었음에도 슬픔이 느껴지는 ‘비창’과 같은 곡을 썼어요. 그의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요. 이후 그는 귓병이 심해져 청력을 아예 잃게 되는데요, 소나타 23번(열정)의 경우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고뇌에 빠져 지내다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운명과 치열하게 싸웠던, 그 흔적이 담겨 있는 곡이에요. 소나타 32번은 베토벤의 마지막 소나타예요. 그는 운명과의 싸움 끝에 고통을 받아들이기 로 하고, 마침내 운명과 화해를 하죠. 그러니까 이 세 곡은 베토벤의 생애가 함축적으로 담긴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초등학생 시절부터 베토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고 알고 있어요.

대부분 연주자들은 ‘베토벤’ 하면 어렸을 때 참가한 콩쿠르나 입시 시험에 빠지지 않고 나왔던 몇몇 지정곡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어요. 저 또한 어린 시절에 베토벤의 곡을 연주할 때면 엄격하게 연주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몸이 움츠러들곤 했어요. 베토벤은 다른 음악가들보다 유독 더 강력하고 전설적인 음악가였죠.

그런데 제가 16살 때 그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때 저희 아버지가 큰 수술을 받으셨어요. 돌아가실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어요. 평소 아버지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일을 겪으며 처음으로 아버지가 한 인간으로 보였죠. ‘아빠도 슬픔이 있고 아픔과 상처가 있는 한 인간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문득 베토벤의 모습이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 보였어요.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던 그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베토벤의 삶에 성공도 있었지만 실패도 있었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지 못한 슬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그 외에 다른 아픔들이 있었어요. 그가 살면서 겪었던 모든 희로애락이 그의 음악에 담겨 있어요. 저는 베토벤의 음악은 단순히 위대하고 숭고한 음악이 아니라 베토벤의 인생 이야기가 담긴 일기장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을 하면서부터 베토벤이 굉장히 궁금해졌고, 베토벤에 관한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지요.

Q. 그 시대 역사 자료, 연애편지, 일기장, 유서뿐 아니라 당시 소설까지 읽었다고요.

네, 그래서 ‘베토벤 스토커’라는 별칭이 붙었죠(하하).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연주할 때 베토벤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제게 베토벤은 그 이상이었어요. 그의 삶 자체가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주었거든요.

어렸을 때 저는 무척 어두운 아이였어요. 늘 누군가 내 옆에 있어 주길 간절히 바랐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았고, 학교에선 ‘문제아’로 불렸죠.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고, 싸우고…. 그런 제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피아노였어요. 제 기억에 피아노를 썩 잘 치는 건 아니었는데, 그걸 핑계로 유학을 가겠다고 했어요. 새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었거든요. 부모님도 처음에는 반대하셨지만 제가 계속 고집을 피우니 결국 열두 살 딸아이의 유학을 승낙해주셨어요. 그렇게 프랑스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죠. 한국에서는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제가 프랑스에서는 자는 시간 4시간을 제외하곤 프랑스어 공부와 피아노 연습만 했어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었죠. 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열심히 살았어요.

1999년 당시, 제가 지냈던 프랑스 ‘콩피에뉴’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었어요. 백인들이 신기하다는 듯 저를 바라보았고, 무시도 많이 당했어요. 특히 체류증을 갱신할 때마다 겪어야 했던 인종 차별로 마음고생을 했죠.

그런데 그때 베토벤의 한 일화를 읽었어요. 당시에 음악가는 왕족의 후원을 받아야 했는데, 리히노프스키라는 공작이 베토벤을 후원해주고 있었어요. 당시 베토벤은 음악을 ‘사람들을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위대한 도구’로 여겼는데, 이 공작은 그렇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왔으니 피아노를 쳐보라”며 베토벤을 불러냈어요. 하루는 베토벤이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왔다고 해요. 그리고 다음날 리히노프스키의 책상 위에 편지를 두었는데,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해요. “당신같은 귀족은 옛날에도 많았고 앞으로도 많을 것입니다. 당신은 태어난 걸로 그 신분을 얻었지만 저는 피나는 노력으로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귀족은 많지만, 베토벤은 세상에 나 하나뿐입니다.” 그걸 읽고 무릎을 탁 쳤죠. ‘그래, 피부색이 뭐가 중요해? 세상에 임현정은 나 하나밖에 없는데.’ 저에게는 획기적인 순간이었어요. 그때부터 베토벤을 존경하기 시작했어요.

임현정 씨의 연주 의상은 항상 단순한 실루엣의 검정색 드레스다. 이는 연주자 자신보다 작곡가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Park Sang Yun
임현정 씨의 연주 의상은 항상 단순한 실루엣의 검정색 드레스다. 이는 연주자 자신보다 작곡가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Park Sang Yun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친구 한 명 없던 프랑스에서 그를 일어서게 해준 존재는 베토벤이었다. 베토벤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아래 자랐다. 결국 17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30대엔 청력마저 잃는다. 좋은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삶이었다. 그런데 그는 음악 하나로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설적인 음악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임현정 씨는 베토벤의 삶 자체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힘과 위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위대한 음악가라는 것보다 수많은 어려움을 뛰어넘은 베토벤의 인생, 그의 삶 자체가 존경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삶의 고비를 만날 때면 ‘베토벤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생각해본다.

Q. 만약 삶이 순탄했다면 지금처럼 베토벤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네요.

그랬다면 지금 제가 말하는 베토벤을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죠.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싫고 두려운 것이지만, ‘고난이 없는 인생이 정말 좋은 걸까?’라는 질문에 제 답은 “No”예요. 제가 아프고 슬펐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거든요. 고난을 겪음으로써 영적 세계나 공감 능력, 이해심이 커지는 것 같아요.

‘새옹지마’라는 말이 있듯, 지금 당장은 어떤 일이 불행인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어쩌면 그것이 저에게 상상할 수 없는 길을 열 수도 있잖아요. 결국 고난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전 항상 제 머리 위에 저를 따라다니는 별이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우주는 나에 대해 상상할 수 없는 숭고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제 길을 걸어갔어요. 제가 ‘긍정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옳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제 경험에 의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마음을 편하게 하고 머리도 맑아지게 하는 것 같아요.

Q. 30대 초반의 음악가가 벌써 <침묵의 소리>,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 두 권의 책을 출간한 것도 ‘새옹지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게요. 제가 책을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집이 발표된 후 제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프랑스의 알방 미셸Albin Miche이라는 출판사로부터 에세이집을 출간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저는 20대에 책을 내는 것이 좀 경솔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런데 어머니가 다니는 절에 갔다가 한 스님이 제 이야기를 듣더니 ‘책을 써서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자만하게 보일까봐 책을 쓰지 않는 게 더 이기적인 게 아니냐’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생각이 바뀌었어요.

제가 10대에 특히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아프고 정말 힘들었지만 그 시간을 지나며 배운것들이 많았어요. 그런 제 이야기를 첫 번째 책 <침묵의 소리>에 담았어요. 혹시 힘겨운 10대를 보내고 있는 청소년이나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작은 힘이라도 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제가 베토벤만큼 멋있지는 않지만, 베토벤이 제게 큰 위안과 힘이 되어 주었듯이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올해 출간한 <당신에게 베토벤을 선물합니다>에서는 제 이야기보다 베토벤의 음악과 그의 인생을 연주자의 시선으로 새롭게 조명한 내용을 다뤘어요. 베토벤의 곡들을 연주하며 깨달은 사실들, 베토벤이 저에게 준 선물을 공유하고 싶었거든요.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고 딱 10년이 흐른 후에 출간한 책이라 이 또한 제게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피아니스트 임현정씨가 출간한 책이다. 2016년 프랑스에서 첫 에세이집을 발표했고, 그 해 한국 번역본이 나왔다. 그리고 올해 베토벤 이야기로 두 번째 책을출간했다. 자신의 피아노 연주 속도 만큼치열하게 살아가는그이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씨가 출간한 책이다. 2016년 프랑스에서 첫 에세이집을 발표했고, 그 해 한국 번역본이 나왔다. 그리고 올해 베토벤 이야기로 두 번째 책을출간했다. 자신의 피아노 연주 속도 만큼치열하게 살아가는그이다.

Q.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하는 것을 들어보니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과 열정, 힘이 느껴져요. 무대 위에서 연주할 때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무대 위에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요. 생각하는 순간 방해가 되거든요. 무대 위에서는 느낌만이 남아 있죠. 대신 피아노를 연습할 때 곡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좀 더 면밀하게 말하자면, 피아노에 앉아서 연습하는 시간보다 혼자서 곡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요.

저는 프랑스에서 베토벤의 작품을 수없이 연주했어요. 유럽 사람들은 베토벤 음악을 ‘우리 음악’이라고 하는데요, 그 음악을 한 동양인 여자가 연주하면서 “나도 베토벤을 이해해. 나도 그가 느낀 아픔과 열정과 평안을 느끼는 같은 인간이야.”라는 메시지를 계속 전한거죠. 피아노를 치면 그 곡에 담긴 희망이나 슬픔 같은 메시지들이 관객들에게 전해져요. 여기서 중요한 건, 베토벤의 곡을 200년 후에 어느 한국 여자가 연주해도 그 메시지는 전달되고, 청중이 독일 사람이든 한국 사람이든 러시아 사람이든 누구든 상관없이 이 메시지를 느낄 수 있다는 거예요.

200년이라는 시간을 초월하고, 국적을 초월하는 그런 신기한 언어가 ‘음악’이에요. 음악을 통해 보면, 결국 국적과 시간과 상관없이 모두가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심장을 가진 똑같은 사람인 거죠. 이런 사실 하나만 정확히 알아도 인종 차별이나 전쟁이 없을지도 몰라요. 언어가 필요 없는 음악이야말로 정말 평화를 만들수 있지 않을까요. 30대의 임현정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또 나이가 들면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네요.

Q. 투머로우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우선 제가 좋아하는 곡을 하나 소개할게요. 라흐마니노프의 ‘랩소디 18번’인데요, 코로나로 힘든 요즘 희망을 주는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피아노는 무척 외로운 악기예요. 연습할 때도 혼자지만 활동할 때도 혼자죠. 특히 저희 집에는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학창 시절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함께할 사람도 없었죠. 지금도 사색하고 걱정과 시간들을 전부 홀로 겪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종종 걱정이 생기고 우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이렇게 말해요.

“이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이야.” 그리고 다시 생각해봐요.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든 걸까? 만약 베토벤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저는 베토벤에게서 희망을 얻었고, 희망을 얻어요. 그래서 베토벤은 제게 커다란 선물이죠. 누구나 살다 보면 힘겨울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여러분에게도 희망을 주는 존재가, 어려울 때 떠올릴 수 있는 누군가가 있기를 바랍니다.

2017년, 프랑스 보르도, 툴루즈, 루앙등에서 연주 및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했다. 그리고 ‘침묵의 소리’ 책을 주제로 이탈리아 팔레르모 대학교, 스위스 뇌샤텔(Neuchâtel) 주의 다양한 중∙고등학교에서 토크 콘서트를 하는 등 클래식음악을 대중화 시키는 데 앞장섰다.
2017년, 프랑스 보르도, 툴루즈, 루앙등에서 연주 및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했다. 그리고 ‘침묵의 소리’ 책을 주제로 이탈리아 팔레르모 대학교, 스위스 뇌샤텔(Neuchâtel) 주의 다양한 중∙고등학교에서 토크 콘서트를 하는 등 클래식음악을 대중화 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먼 시대 먼 나라의 위대한 음악가로만 생각했던 베토벤이 꼭 내 주위에 있는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리는 연주를 마치던 날, 임현정 씨는 문득 ‘베토벤이 내 공연을 본다면 뭐라고 말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베토벤이 그녀를 만난다면 어쩌면 그 공연보다, 자신이 음악 속에 담았던 그의 이야기가 임현정 씨에게 힘이 되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할 거라고. 외로운 삶에 누군가가 빛이 되어준다는 것만큼 위대한 일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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