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아들로 부러울 게 없이 살던 그가 어쩌다 아버지가 되었다.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환경미화원 시험에 도전하는데 자기가 쓰는 감동의 자기 이야기

나는 딸만 넷인 집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니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도 남았다. 어머니는 나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셨고, 어떤 잘못도 감싸 주셨다. 나는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며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정말 편하게 살아온 것이다.

꼭 그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나의 습관 속에 공부도 포함되어 나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대학에 턱걸이로 입학했지만 성적이 안 좋아서 학사 경고를 자주 받았다. 속이 상해서 군에 입대를 했고, 제대 후에는 오갈 데 없는 한심한 사람이 되었다.

고민 끝에, 나랑 가장 친한 넷째 누나가 살고 있는 강원도로 갔다. 큰일은 못해도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 싶어 택배 일을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며칠 만에 금방 그만두었다. 막노동은 더 힘들어서 하루 만에 포기했다. 그해에 이 일 저 일을 전전하며 먹고 살길을 찾아보았지만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잘해보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지?’ 라는 고민만 커져갔다. 그러다 하게 된 일이 시골 마트 배달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놀면서 한다는 일을 나는 헉헉거리며 겨우 해냈다. 마치 유격 훈련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월급 안줘도 되니까 사람 좀 만들어줘요

친형같이 친근하면서도 무서운 넷째 매형은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나는 일이 힘들어서 마트 사장님에게 몇 번이나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그때마다 매형이 나를 마트 사장님 앞에 다시 끌어다 놓았다. 그리고 사장님에게 ‘월급 안 줘도 되니 처남을 사람 좀 만들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하기 싫은 마트 일을 하고 또 해야 했다. 형 없이 마음대로 살아왔는데 뒤늦게 나타난 ‘매형’이라는 존재가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신기하게 매형이 하는 말이 자꾸 떠올랐다. “사람이 하기 싫은 일을 계속 하면 정신이 건강해져!” 나는 힘들게 배달 일을 계속하며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한 곳에서 진득이 일하는 법, 어려움을 인내하는 법을 배워갔다.

어쩌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다

얼마 후 넷째누나 가족이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갔다. 하지만 나는 강원도에 남아 지내면서 결혼을 했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내가 하는 일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우리 가족은 강원도를 떠나 처가가 있는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할 줄 아는 것이 없어서 막막했다. 그때 마침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환경미화원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험이 어렵지만 합격하면 안정적이고 보수도 괜찮은 직업이라고 했다. 시험은 체력 시험과 면접이었다. 무게 20킬로그램의 수 화물을 들고 100미터 달리는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나는 학교 운동장에서 20킬로그램 쌀 포대를 지고 뛰고 또 뛰었다.

체력 시험을 보는 날, 시험장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키도 크고 체격도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왜소했다. 하지만 열심히 뛴 덕분인지 체력 시험에 합격했다. 문제는 면접시험이었다. 경쟁률이 얼마나 높은지, 면접을 통과하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는 말들을 했다.

면접관이 질문했다.

“강릉으로 가족 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회사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출근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와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답하기 시작했다.

“회사가 있어야 가족이 있는 법! 회사에서 오라고 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오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다음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도시를 대표하는 환경미화원입니다. 제가 수고하면 도시가 깨끗해지는데 안 오면 되겠습니까? 무조건 오겠습니다!”

모두 자신감이 넘치고 말주변도 좋아보였다. 그런데 나는 할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어물어물하다가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1년을 기다려서 다시 시험에 도전했다. 면접관이 이렇게 물었다.

“어떤 환경미화원이 되고 싶습니까?”

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별명이 마당쇠입니다! 뭐든지 시켜주시면 다 하겠습니다!”

아예 환경미화원 복장으로 와서 면접을 치르는 사람도 있었다.

“제 주변에는 먼지 하나 없습니다. 제가 시민들을 위해 쾌적한 공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단단히 준비한 것 같았는데, 나는 주눅이 든 채 입을 열었다.

“앞서 말한 분들보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결과는 또 낙방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시 배달이나 하며 살아야겠다고 모든 것을 체념했다. 속에서 ‘다 아는 사람 뽑는 거야. 더러운 세상!’ 하고 욕이 나왔다. 그런 즈음에 넷째 매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매형은 내 사정을 듣더니 아는 사람을 소개해주며 통화해 보라고 했다. 그분은 면접 전문가라고 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분께 전화를 해

서 면접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그 분은 내 말을 듣더니 “그러니까 당연히 떨어지지.” 하시며 면접을 또 보면 이렇게 말하라고 가르쳐주셨다.

“저는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총각일 때는 하고 싶은 일, 쉽고 편한 것만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열심히 일하는 아빠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두 아이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며 새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면접관님, 저를 동생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제 인생의 징검다리가 되어주시면 좋겠습니다.

혹시 면접에 합격하지 못하더라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전문가라는 그분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면접장에서는 모두 최선을 다하겠다고 패기 있게 ‘외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환경미화원 삼수생이 된 나

결국 나는 다시 시험에 도전해 세 번째 면접 시험장에 들어섰다. 드디어 면접관 앞에 앉았다. 앞사람들이 하나 둘 답변을 했고, 내 차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원자들은 역시나 열심히 하겠다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 가슴은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세게 두근거렸다. ‘이번에 또 떨어지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가지? 처가 식구들 볼 면목도 없고.... 아내와 두 아이가 언제까지 나를 믿고 따라와 줄까? 아이들이 환경미화원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을까?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어떻게 해야 하지? 면접 전문가가 가르쳐준 대로 해볼까?’ 기다리는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살아온 결과는 늘 실패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내 차례가 왔다. 나는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총각이었을 때는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열심히 일하는 아빠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저를 면접관님의 동생으로 생각하고 뽑아주시면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답변을 마치자, 면접관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 며칠 후 구청에서 전화가 왔다. 지원자 중에 두 사람을 뽑았는데 내가 합격했다는 것이었다. 강한 의지나 말솜씨는 없었지만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져서 좋았다고 했다. 정말 행복한 날이었다.

나를 따뜻하게 때로는 따끔하게 대해주는 사람들

요즘도 출근길에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일도 진득이 하지 못하던 내가 매일 출근을 하고 아내에게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 줄 수 있어서 감사해. 이걸 과연 내가 이룬 것일까? 주변의 관심, 연결, 충고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나 혼자였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조그만 어려움도 견디지 못해 일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주변에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따끔하게 나에게 조언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형 덕분에 힘들어도 견디는 법을 배웠고, 결혼까지 할 수 있었다. 소중한 가족이 생기면서 쌀 포대를 지고 뛸 힘이 생겼고, 실패했지만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도 얻었다. 그리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받아들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내 삶은 그 모든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혹은 진심을 담은 조언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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