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에 대한 기억이 많진 않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추억이 하나 있다. 그때 나는 아빠와 함께 동대문시장에 놀러갔다가 아빠 손을 놓치는 바람에 한참을 혼자 울고 있었다. 어렵게 다시 만난 아빠는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달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주셨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 많은 아이스크림을 홀랑 다 먹고 배탈이 났고, 겨우 멈춘 울음이 다시 터졌다. 이게 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국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

6살 때, 어머니의 나라 몽골에 왔다. 다만 어머니가 아닌 외할아버지와 지냈다. 할아버지와 살았던 집은 넓지 않은 곳이었으나 몽골의 추위에서 나를 가장 따뜻하게 지켜주던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의 몽골어 선생님이었는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른 저녁, 할아버지는 나에게 빵을 사오라며 심부름을 시키셨다. 슈퍼에 도착했지만 빵이 몽골어로 뭔지 몰라서 한참을 계산대 앞에 서 있었다. 그러곤 다시 집으로 돌아가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슈퍼로 왔다. 몽골어로 ‘빵’도 모른다며 할아버지는 나를 연신 놀리셨다. 할아버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이 참 즐거웠다.

댄스대회에 참가한 나를 응원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훈장이 가득 달린 멋진 옷을 꺼내 입으셨다. 우승을 하고 할아버지와 찍은 기념사진.
댄스대회에 참가한 나를 응원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훈장이 가득 달린 멋진 옷을 꺼내 입으셨다. 우승을 하고 할아버지와 찍은 기념사진.

몽골어를 잘하게 된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할아버지를 ‘엄마’라고 불렀다. 엄마 없이 자란 내가 ‘엄마’라는 단어부터 말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할아버지는 정말 나의 ‘엄마’였다. 그리고 때때로 학교에서 몽골어를 못한다며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할아버지는 나의 하나뿐인 친구가 되어주셨다.

한번은 학교에서 댄스 대회가 열렸다. 수많은 관중 속에서 나를 응원해주시던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만 보고 춤을 추었고 우승했다. 그때 나보다 더 신나게 춤을 추며 기뻐하시던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눈 속에서 밝게 웃고 있던 내 모습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다. 내가 9살이 되던 해에 나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였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나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후, 오갈 데 없어진 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별거 중이던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그곳에 오래 있지 못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지내다가 혼자 살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해도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한 번이라도 그들이 느끼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특히 감기라도 걸릴 때면 너무 힘들었다. 누군가가 챙겨주는 따뜻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사랑에 목말라 갈수록 내 안에서 부모님을 향한 원망은 커져만 갔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 태권도는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을 만큼 소질을 인정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시작한 태권도는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을 만큼 소질을 인정받았다.

16살 때, 엄마와 연락이 닿아 처음으로 모녀가 함께 살았다. 같이 살기만 하면 좋을 줄 알았다. 늦었지만 엄마의 사랑도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좋기는 커녕 엄마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낼 때가 많았다. 어쩌다 대화가 오가는 날이면 내 입에서는 엄마에게 쌓인 불평이 터져 나왔고, 그런 나에게 엄마도 소리를 질렀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비난하기에 바빴다. 나는 엄마와 1년 정도 살다가 다시 집을 나왔다. 그렇게 사느니 외로워도 혼자 사는 게 나은 것 같았다.

하루는 페이스북을 하다가 한글 아카데미를 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아빠가 사용하던 언어가 무엇인지 이해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그 수업을 신청했다. 어렸을 때 헤어진 아빠를 늘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속으로는 그리워하고 있었던가 보다.

한글 아카데미 수업은 꽤나 재미있었다. 단어를 외우는 건 어려웠지만, 배울수록 한국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유창하게 한국어를 말하고 싶었다. 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준 사람들은 한국에서 해외봉사를 하러 온 대학생들이었는데, 한글 아카데미 외에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한글 아카데미 외에 다른 수업에도 참여했다. 영어 배우기, 댄스 배우기, 마인드교육 등에 함께하면서 그들과 친해졌다.

그때까지 외로움 속에서 살아왔지만, 한국에서 온 봉사단원과 여러 활동을 함께 하면서 외로운 시간이 많이 줄었다. 무엇보다 몽골에 봉사활동을 하러 온 단원들을 관리하시는 지부장님 부부와 이야기할 때면 편안했다. 그분들과 대화하다 보면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말들이 술술 나왔다. 내가 살아온 과정과 상처들을 털어놓았고,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신 두 분께선 사람의 마음이 흘러가는 길과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하나씩 가르쳐주셨다.

그분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처음으로 ‘엄마에게도 내가 모르는 어려운 일들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엄마와의 관계는 늘 풀리지 않는 숙제였다. 나는 엄마를 찾아가 물었다. 우리가 같이 살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는지, 엄마도 나처럼 힘들었는지. 내 질문을 들은 엄마는 한참 머뭇거리더니 울먹이며 이야기를 꺼내셨다. 나를 볼 때마다 올라오는 죄책감과 미안함 때문에 나를 낳고 한 덩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고. 아빠를 너무 닮은 나를 볼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고. 나를 조금이나마 더 풍요롭게 살게 하려고 16년 간 타국살이를 하며 돈을 벌었다고. 그날 엄마와 나는 밤새도록 울었다. 엄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꼈던 밤, 우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었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나의 가족.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끈끈한 가족애를 느끼고 있다.
현재 함께 살고 있는 나의 가족.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끈끈한 가족애를 느끼고 있다.

나는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어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래서 울란바토르대학 한국어통역과에 진학했다. 집을 떠나 학교가 있는 도시로 온 나는 기숙사 대신 봉사단 건물에서 지부장님 부부와 두 명의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 제멋대로 살던 성질을 버리지 못해 대학생이 되어서도 나는 친구와 싸우고 말썽을 피우곤 한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 지부장님께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리면 “그럴 땐 이렇게 해야지” 하며 알려주신다. 얼마 전엔 두 염소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두 염소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어. 두 염소가 마주보고 서로 먼저 지나가려고 버틴다면 결국 둘 다 밑으로 떨어져 죽게 될 거야. 그런데 한 염소가 엎드려서 상대염소가 자기를 밟고 지나가게 했어. 둘 중 어느 염소가 지혜로운 염소니?”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 보니 엎드린 염소가 지혜로웠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사고력이 부족한 내가 그냥 행동하기 전에 꼭 기억해야 할 교훈이 되었다.

나는 항상 실수한다. 그리고 내 잘못을 이야기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그러는 동안 사랑을 모르고 살았던 내가 무엇이 사랑이며 애정 어린 관심인지 조금씩 알아간다. 내 마음에서 애써 지워버리려 했던 행복이란 단어를 요즘은 하루하루 찾아가고 있다.

어느 저녁, 거실에 앉아 있는데 지부장님이 한국으로 해외봉사를 가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해외봉사라니….’ 한 번도 계획해 본 적 없는 일이어서 당황했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해외봉사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게 기뻤다. 내가 한국에서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나처럼 마음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 보듬어줄 수 있다면, 나의 상처가 이렇게 아물었다고 이야기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내년 이맘때쯤 누군가가 나에게 한국에 대한 기억을 물었을 때, 더 이상 동대문시장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울고 있던 내가 아닌 한국 친구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으로 새롭게 그려지길 기대해 본다. 그리고 몽골로 돌아와 한국에서 배운 것들을 전하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몽골에는 내가 겪은 것 같은 아픔을 가진 친구들이 많다. 그들이 걷고 있는 어둡고 긴 터널 끝엔 빛이 있다고, 그 빛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싶다.

글=바담람(몽골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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