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DS시큐리티 보안팀 박성민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에티오피아 카페 안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한국 돈으로 500원을 카페에 내고 카페 안 작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자기 팀을 열렬히 응원한다. 거리에 빈 깡통만 있어도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축구를 시작한다는 에티오피아. 그곳에서 축구를 가르치기 위해 1년 간 교육봉사를 다녀온 박성민 씨를 만났다. 현재는 한국으로 돌아와 보안 전문 회사에 다니며 대기업 임직원들의 의전을 담당하고 있다는 박성민 씨. 축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를 만나본다.

Q. YTN 뉴스에 에티오피아 축구단에서 코치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내용이 보도되었습니다. 특별한 경험이었을 텐데, 방송을 보고 어땠나요?

TV에 제가 나온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좀 쑥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제가 나오는 뉴스를 본 가족들과 친구들이 연락해 와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성민아, 뉴스를 보면서 저녁을 먹다가 네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진짜 너 맞아?” 하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부모님께는 자식 자랑할 수 있는 기회를 처음으로 만들어드린 것 같아 괜히 뿌듯했습니다(하하). 개인적으로는 가문의 영광이라,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서 영상을 잘 소장하고 있습니다.

Q. 뉴스를 보니, 에티오피아 선수들에게 ‘협동심’을 가장 중점적으로 가르쳤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가 있을까요?

에티오피아 선수들은 다리도 길고, 타고난 신체적 이점들이 많습니다. 거기에다 워낙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이라 개인기도 뛰어납니다. 그런데 오히려 잘하는 것이 독이 될 때가 있습니다. 본인들이 잘하는 걸 알기 때문에 혼자 해결하려고 하거나, 공을 패스해야 득점과 연결되는 상황인데도 자신이 슛을 날린다든지요. 그래서 매 수업마다 ‘협동심’을 가르쳤습니다. 개인의 뛰어난 재능보다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걸 알려주니 학생들도 점점 함께하는 경기를 익혔습니다. 혼자 공을 가지고 놀 때는 몇 번해보다가 안되면 포기할 때가 많았는데, 자신이 할 수 없을 때 옆에 있는 선수에게 패스해주고, 나중에는 득점의 기회를 가진 선수를 찾아 패스를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경기가 훨씬 재밌게 흘러간다는 걸 느끼더군요. 선수들이 축구의 진짜 묘미를 알아가며 즐거워하고, 저도 팀이 성장하는 걸 보니 보람찼습니다.

지금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다. 그리고 축구의 묘미는 ‘함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친구들과 축구를 한다. 그리고 축구의 묘미는 ‘함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Q. 선수들을 가르치며 배운 점도 많을 것 같습니다.

13세 미만의 선수팀 40명, 18세 미만 선수팀 25명을 각각 일주일에 3번, 2시간씩 가르쳤는데요. 선수들이 너무 많아서 제가 다 관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또 에티오피아는 암하라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언어의 장벽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선수들 이름부터 외우는 것이었어요. 알파벳만 300개가 넘는 암하라어를 외워 선수들 이름을 부를 수 있게 연습했고, 두 번째론 축구 용어들을 암하라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찾아서 따로 공부했습니다. 관련된 책을 한국에서 받아 훈련과 감독 분야를 좀 더 깊이 있게 조사했습니다.

처음 수업할 때 제가 어눌한 암하라어로 선수들 이름을 불렀는데, 선수들이 복권에 당첨된 듯 좋아하더라고요(하하).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어린 선수들이 이미 집 앞에 찾아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곤 제 어깨에 멘 축구공 꾸러미를 대신 들었습니다. 그렇게 한 손으로는 축구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손을 잡고 연습실까지 걸어가곤 했습니다. 한국에선 흔한 축구공 하나를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고, 저의 가르침을 통해 축구 선수의 꿈을 키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 같은 사람도 아이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구나’라는 사실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Q. 한국에선 생소한 축구감독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것도 남아공에 있는 대학으로요. 그런 결정을 한 계기가 있나요?

제 기억으론 7살 때부터 놀이터에서 공을 차며 놀았어요. 자연스럽게 축구를 시작했죠. 축구 선수 박지성을 좋아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보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중학생 시절엔 축구 선수로도 활동했을 만큼 저는 축구밖에 모르는 남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축구 선수로 성공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선생님, 부모님과 상의한 끝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고, 고등학교를 알아보던 중 아프리카에 있는 학교를 알게 되어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친해진 친구들이 축구감독학과가 있다는 것을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저도 축구 선수는 아니더라도 축구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한번 도전해보라고 응원해주셔서 진학했습니다.

ⓒYTN 협동하며 축구를 하는 의미를 아주 잘 배운 덕분에 아이들의 실력이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고등학교 교사 므흐레투.
ⓒYTN 협동하며 축구를 하는 의미를 아주 잘 배운 덕분에 아이들의 실력이 나아지고 있다고 말하는 고등학교 교사 므흐레투.
ⓒYTN 축구를 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해주고 게으르지 않게 코치님이 가르쳐주면서 축구의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는 에티오피아 유소년 축구단 선수 로벨 배깰레.
ⓒYTN 축구를 할 때 서로를 존중할 수 있게 해주고 게으르지 않게 코치님이 가르쳐주면서 축구의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는 에티오피아 유소년 축구단 선수 로벨 배깰레.

 

Q.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을 다 아프리카에서 보냈는데요, 낯선 땅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보통 유학생들은 학기를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 방학을 보내고 다시 옵니다. 그런데 저는 비자를 다시 발급받는 게 어려워서 3년간 한국에 오지 않았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죠. 그리고 모든 유학생들이 그렇듯, 처음엔 언어 구사력이 부족해서 수업을 따라가거나 일상생활이 자유롭지 못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말라리아나 장티푸스는 셀 수도 없이 많이 걸렸습니다. 길을 걷다가 강도를 만나 심장이 덜컹했던 적도 있었죠. 그런 어려움이 있었던 건 맞지만, 확실한 건 행복했던 적이 더 많았다는 겁니다. 말라리아나 장티푸스로 아파 누워있는 제 옆에는 항상 저를 돌봐주는 현지인 가디언이 계셨어요. 아프리카에서는 약이 귀한데 제가 아플 땐 약을 아끼지 않고 주셔서 금세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문화도 다르고,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지만 같이 축구를 하면서 빠르게 친해졌습니다. 같이 땀을 흘리다 보면 다르다는 건 문제가 안됐어요. 자연스럽게 저를 이해해주고 챙겨주는 친구들이 옆에 있어서 든든했습니다.

ⓒYTN 박성민 씨는 축구선수라는 꿈을 꾸는 에티오피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봉사했다.
ⓒYTN 박성민 씨는 축구선수라는 꿈을 꾸는 에티오피아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봉사했다.

Q. 현재는 다른 진로를 선택하여 취업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축구와 관련된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축구선수 출신이 아니다 보니 제한이 많았거든요.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친구가 ‘세계 대학총장 포럼’에서 대외활동을 해보자고 제안했고, 의전팀으로 합류했습니다. 한 달간 의전 교육을 받고 2주간 진행되는 포럼에서 각국에서 오신 총장님들을 수행하는데, 저에겐 새로운 경험이자 도전이었습니다. 그때 까진 축구 외의 경험은 전무했으니까요. 그 일이 발화점이 되어 에티오피아 메켈레에서 열린 아프리카 대학체전에도 의전팀으로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선 의전팀 부팀장으로 아프리카 학생들에게 의전 교육을 진행했는데, 학창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낸 경험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제가 해외봉사활동을 할 때 배운 암하라어도 활용할 수 있고, 아프리카 문화를 잘 알다 보니 학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하면서 보안·의전 부분에 흥미가 생겼고, 현재는 대기업 임직원들 의전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Q. 새로운 경험이 새로운 직업을 선물했네요. 앞으로의 꿈과 계획이 궁금합니다.

전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행복했어요. 축구공으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고, 운동화가 낡아서 신을 수 없으면 맨발로 걸으면 된다는 걸 배웠어요.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는 아이들과 손만 잡아도 전달되는 고마움이 좋았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 일을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임원분들께서 고맙다고 말해주고, 잘 먹어야 한다며 손에 간식을 쥐어주실 때면 소소한 행복을 느낍니다. 앞으로도 그런 행복을 느끼고 싶습니다. 남을 위해 살 때 얻는 기쁨과 나의 작은 수고로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요. 이곳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지 좀 더 찾아볼 생각입니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보람되게 살지 아직 고민 중이거든요.

인터뷰 말미에 “임원 면접 때 무슨 질문이 나왔나?”는 기자의 질문에 박성민 씨는 ‘아프리카에 간 이유’를 물었다고 답했다. 프로필에 적혀 있는 특별한 이력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리고 박성민 씨가 들려주는 아프리카에서 보낸 학창시절과 해외봉사에 대해 들으며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누군가를 돕는 것이 행복하다’는 사람이 회사에 적합한 인재라고 확신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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