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 이은아 부부 가족의 초상

학교에 다니는 학생 3명 중 1명 꼴로 한부모 가구 자녀라고 한다. 한부모 가족 비중이 커졌지만, 이들을 위한 정서적 교육이나 상담은 부족한 상황이다. 그 중 유년시절 부모의 불화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거나 상대적으로 낮은 자신감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이 상처는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 아물 수 있다. 이번 칼럼의 주인공은 8년차 주부 이은아 씨다. 그녀가 어떻게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기억에서 벗어나 가족을 꾸리며 따뜻하게 살고 있는지 1인칭 시점으로 소개한다.

이혼한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듬직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두 아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문득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결혼은 가족이라는 선물을 가져다준 최고의 선택이었다. 물론, 크고 작은 어려움과 싸움도 있지만 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소중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학창시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밝게 사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릴 적에 이혼하셨고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아버지를 따라가 살았다. 얼마 후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재혼하셨다. 되돌아보면 어릴 적엔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나는 늘 외로웠다. 가족이 내게 쉴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어른들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나는 늘 조심해야 했고, 잘해야 했다. 그러다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가족들과 거의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난 학교나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중학교 때 한번은 친구와 교환일기 쓰기를 한 적 있었는데, 성의껏 일기를 쓴 나와 달리 친구는 달랑 두 줄을 써서 줬고 그 때문에 마음이 상한 나는 친구와 다투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당시 나는 친구와 오해를 풀려 하지도 않고 그 친구에게서 돌아섰다. 나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대학에 입학해 남자친구도 사귀어봤지만 모난 성격 탓에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내가 과연 결혼을 할 수 있을까? 금방 이혼해버리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딸은 엄마 팔자를 닮는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말이 현실이 되어버릴까 두려웠다.

은아야, 너도 행복하게 살 수 있어

그런 내가 결혼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27살에 훌쩍 떠나 몽골에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덕분이었다. 대학 졸업 후, 나는 22살부터 방송 스타일리스트로 일을 시작했다. 성공하리라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사회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일은 익숙해져 수입은 늘어났지만, 사람과의 관계에 지친 나는 잠시 일을 멈추고 몽골로 1년간 해외봉사를 떠났다.

늘 ‘나만의 세계’ 속에서 어둡게 살던 나는 문화가 다른 몽골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는 법을 하나씩 배웠다. 특히, 어릴 적부터 미워했던 부모님의 삶을 자주 떠올려 보았다.

‘새엄마도 친딸이 아닌 나를 키우는 것이 쉽지 않았을 거야….’ 나는 어렴풋이 새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몽골로 떠날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하다며 자주 내게 연락을 주셨는데, 그때 처음으로 나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몽골에서 1년간 함께 생활했던 봉사 센터지부장님과 사모님은 나를 딸처럼 아껴주셨다. 두 분은 나의 별난 성격부터 가정의 어려움까지, 나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들이었는데, 종종 내게 “은아야, 너도 결혼해서 충분히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어”라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종종 몽골 지부장님 그리고 사모님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2012년, 두 분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내 생애 가장 좋은 친구를 만나다

결혼할 당시, 주변에서 우리 부부를 ‘미녀와 야수’라고 부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운동을 정말 좋아하는 남편은 키나 체격이 굉장히 큰 편인데, 나는 무척 작고 왜소해서 함께 서있으면 차이가 더 도드라졌다.

외모도 외모지만 성격이나 다른 방면으로도 남편과 나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특히 부부싸움이 일어날 때 그랬다. 내 성격 같으면 싸운 뒤 말하기 싫어하는데, 남편은 꼭 그 자리에서 대화하고, 화해해야 했다.

남편은 내 성격을 알기에 부부싸움이 생긴 후에는 언제나 남편이 먼저 내게 다가온다. 내가 혼자 ‘꿍’하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 컵이 어디 있지?” “여보, 카드 봤어?” 등 부러 내게 말을 걸며 내게 다가와서 나와 대화하려 한다. 그때마다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하지만, 사실 그런 남편이 무척 고맙다. 뾰족뾰족한 나를 품어주는 남편과 함께 8년을 살면서 나는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 그리고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웠다. 마음을 나눌 친구 한 명이 없던 나에게 남편은 평생 내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가족은 따뜻한 존재였다

“밥풀을 계속 흘리면 어떡해!”

8살 세아와 6살 정현이. 두 아이들과 밥상머리에 앉으면 나는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종종 내 몸이 몹시 피곤할 때면 내 목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불필요하게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야 만다. 하지만 아이들은 1분 전에 혼이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내 배 위로 올라와 나를 콕콕 찌르고, 흔들며 사랑스럽게 장난을 치곤 한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은데, 아이들은 내가 엄마라는 이유로 날 용서해주고 사랑해준다는 마음이 들어서 미안해진다.

부족한 나를 품어주는 남편, 엄마라는 이유로 날 사랑해주는 아이들을 볼 때면 나는 가족이란 서로 감싸줄 수 있는 사이임을 느낀다. 나는 오늘도 세 식구와 함께 살며 ‘가족’의 새로운 의미를 느끼고, 발견해가고 있다.

아내 이은아가 묻고, 남편 김용수가 답하다

1. 용수씨에게 결혼은 어떤 의미야?

결혼 전에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며 오랫동안 자취를 하며, 늘 나와 함께 울고 웃으며 함께 지낼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결혼이 무척 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잘 안됐지. 상처도 많이 받았고. 그때, 당신이 나타나서 나랑 결혼해주었어. 결혼은 내게 삶의 동반자를 주었고, 또 내가 온 마음으로 사랑을 줄 수 있는 가족을 선물했어. 사랑은 받을 때도 좋지만 마음껏 줄 때 행복한 것 같아.

2. 결혼 전에는 시간만 나면 운동을 하러 다녔잖아. 결혼 후에는 시간을 쓰는 방식이 바뀌었는데, 어떤 변화가 있었어?

크게 두 가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 결혼 전에는 밤 아홉 시에 퇴근해도 밤 한시까지 조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탔어. 주말에는 피트니스센터에서 반나절을 살았지. 그런데 결혼 후에는 집안일이나 육아를 함께 도와서 하다 보니 결혼 전처럼 운동만 하고 살 수는 없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살이 좀 쪘어. 결혼하기 전보다 몸무게가 10킬로그램 넘게 늘었어.(하하) 두 번째는 ‘혼자’ 보다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졌다는 거야. 나는 다 같이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아이들이 사는 이야기도 들어보고, 당신과 차분히 대화하는 시간이 좋더라고. 아이들 어렸을 때 당신이 3인용 전기 자전거에 앞뒤로 애들을 태우고 나랑 탄천까지 산책 갔던 거 기억나? 이젠 애들이 커서 자전거를 새로 살 때가 된 것 같네.

3. 결혼 후, 우리가 서로 닮아가는 점이 있다면?

글쎄. 아주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은데, 사소한 것들을 닮아가는 것 같아. 예를 들면 나는 떡볶이를 거의 안 먹던 사람인데, 결혼하고 나서는 당신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나도 같이 먹고 있더라고. 생각해보니 신기하네.

4. 앞으로 내가 어떤 엄마 혹은 아내가 되었으면 좋겠어?

당신이 나와 결혼해준 것만으로도 늘 고마워. 예쁜 아이를 둘이나 낳아주고. 당신 8년간 엄마로 또 아내로 정말 잘해왔어. 앞으로도 이렇게 살자. 내가 함께 도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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