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마저 비슷했던 모네와 마네는, 비슷한 이름 때문에 서로를 오해하며 서먹한 관계로 시작했지만 진솔한 대화 끝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40살이 되기까지 무명화가로 살았던 모네, 그보다 8살이 많았던 선배 화가 마네는 세상이 모네를 알아줄 때까지 묵묵히 그를 지지해 주었다. 1883년 마네가 세상을 떠났고, 마네의 그림이 혹평을 받으며 미국으로 팔려갈 위기가 오자 모네는 마네의 그림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도록 일일이 편지를 써 그의 그림의 가치를 알렸고, 현재 마네의 그림은 그의 바람대로 루브르
두려웠던 군 생활을 특별하게 해주었어요는 제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자 저에게 특별한 군 생활을 만들어준 고마운 친구입니다. 제가 복무할 때 매달 잡지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신병 시절 체력이 약하고 성격이 소심해 적응하기 힘들어하던 제게 용기와 심리적 안정을 주는 기사가 많았고, 선임이 되어서는 힘들어하는 후임 병사들에게 책을 권하기도 했습니다.저는 부대에서 ‘또래상담병’으로도 활동했는데, 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상담 활동에 더욱 매진하면서 저만의 상담북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병사들과 대화를 나
지난 8월 29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를 읽고 느낀 점을 발표하는 ‘제1회 투머로우 말하기 대회’가 열렸다. 헛된 희생이 희망을 주는 나무로“여러분은 봉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봉사를 헛된 희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봉사하여 제가 얻는 이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봉사를 타인에게 보여주기 식으로만 했습니다. 그러나 를 본 후 제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먼저 이 교양지 안에는 정명철 씨와 같이 봉사활동을 통하여 지혜와 행복, 새로운 삶
‘굿뉴스월드’ 사무실에서 홍석영 씨를 만났다. 서울시 양재동에 위치한 사무실은 정답고 아담했다. 평범한 회사원을 꿈꿨던 그가 필리핀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택한 직장은 ‘국제 개발 협력 NGO’였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자신도 행복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실제로는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신입사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분투했던 그녀의 4년 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NGO(비정부기구) 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에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에 클래식 음악 축제가 열렸다. 거기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임현정도 함께했다. 베토벤을 좋아하는 그는 스무네 살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EMI클래식에서 데뷔 음반으로 발표했으며, 그 음반이 빌보드 차트 클래식 부문과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보통 몇 년 걸린다는 전곡 녹음을 그는 단 29일만에 해내 ‘천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코로나19로 줄곧 한국에서 머물고 있는 그녀가 아주 오랜만에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다. 처음에는 만나기로 했지
우간다에서 받은 값없는 사랑은 내 마음에 단단하게 박혀있던 이기적 유전자를 빼내었다. 이제 그곳에는 행복이 가득하다.“민서야, 왜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않아?” 봉사단원 중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언니가 울 듯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우리는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청소년 캠프를 위해 댄스팀을 만들어 연습하고 있었다. 외국인과 현지인을 포함해 총 12명으로 구성된 팀에서 나는 댄스를 좀 할 줄 안다는 이유 하나로 팀장이 되었다. 다들 댄스에 서툴렀지만 모든 팀원은 열심히 연습했다.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필리핀으로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다녀온 학생들은 필리핀을 ‘기회의 땅’이라고 부른다.한국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2,000여 명이 참석하는 규모의 행사를 기획하고 1,0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나 프로그램을 홍보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워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르지만 봉사단원들과 함께 했기에 ‘끝까지’ 도전할 수 있었다.그들은 1년간 필리핀에서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면서 필리핀의 진짜 매
바다 거북이는 약 100개의 알을 낳지만, 한 마리 정도만 어른 거북이가 된다고 합니다. 부화한 새끼 거북이들이 게나 갈매기에게 잡아먹히거나 높은 파도에 휩쓸려가는 등 많은 어려움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오만 가지 생각을 하는데, 그중 한 가지 생각만 살아남아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즉, 한 가지 생각이 마음에 들어와서 우리 인생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인류 역사를 빛낸 인물로 에디슨은 빠트릴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에디슨이 어릴 적에 주변 사람들로부터 바보라고 불렸다는
누구든지 인생에는 저마다의 ‘에베레스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에베레스트는 꿈, 혹은 크고 작은 목표 등 우리가 살면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그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리고 꿈을 이루는 진정한 기회는 위기가 바뀌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저는 어릴 적부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12살이 되던 해에 집을 떠나 콜롬비아 국경의 아마존 강 유역으로 가서 브라질, 페루, 에콰도르 등을 탐험하며 지냈습니다. 저는 스무 살에 집으로 돌아왔고, 그 여행에서 자연의 소중함
13살 때 보디빌더였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체육관에 갔다가 복싱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시합이 두렵기도 했지만 첫 경기를 ‘넉아웃’으로 이기며 복싱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복싱을 하면 할수록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공부와 권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오자 가족들은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권투는 여성을 위한 스포츠가 아니라며,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했죠.‘아니야, 성공할 수 있어!’ 하고 오기가 생겼습니다. 다행히 중미 지역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선발전에 나
선수 시절, 저의 가장 큰 무기는 ‘끊임없는 연습’이었습니다. 농구는 체력이나 기술뿐 아니라 사고가 필요합니다. 제가 연습을 정말 많이 하던 시절에는 경기 중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경기 장면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결정적인 슛을 날릴 수 있었습니다. 스카티 피펜(토털 패키지라 불리던 전 NBA 농구 선수)도 저를 막을 수 없던 그 시절, 저는 기본을 지키고 계속 훈련하면서 마인드를 컨트롤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에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납니다. 구소련과 경기 중
“거기 위험한 나라 아니야? 벌레도 많대…. 조심해야겠다.”필리핀으로 1년간 해외봉사를 간다는 소식을 들은친구들은 모두 나를 걱정했다.인터넷에 ‘필리핀’을 검색하면 나오는 정보가대부분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불안감이 커진 나는 각종 비상약을 챙겼고,필리핀에 도착하자마자 숙소 주변의 안전을 살피고 사람들을 경계했다.하지만 필리핀에서 지낸 지 3개월 만에 이전에 했던 모든 걱정을 잊어버렸다.다가가 눈만 마주쳐도 웃는 꼬마 아이들,맑고 깨끗한 바다, 열대 과일, 가진 것이 없어도 먼저 다가와도움을 주려는 따뜻한 정을 가진 사람
지난해 필리핀에서 1년 간 해외봉사를 하고 돌아온 김은빈 씨.그는 필리핀에서 4개월간 '마인드 강사'로 50회 강연을 했고, 5천여 명이 그의 강연을 경청했다. 그는 해외봉사를 떠난 것이 인생에서 '신의 한 수'라고 말한다. 29살 평범한 회사원이 뒤늦게 해외봉사를 떠난 이유가 있나요?저는 대학 졸업 후 1년간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라는 고민만 깊어졌어요.
축구는 제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축구선수로 활동하며 돈을 벌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그 시간들이 ‘인생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유익한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긴 여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났지만, 6살 때 축구선수였던 삼촌을 따라 프랑스에 가서 성장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기회이며, 성공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피
현대 사회는 가족 구성원이 단출해지고 있다. 1인 가족도 늘고 있다. ‘유재하·신미라’ 부부도 1년 전엔 도시에 사는 전형적인 핵가족이었다. 그런데 남편 유재하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 지금은 충주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처음 귀농 소식을 주변에 알렸을 때 사람들이 유재하 씨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어떻게 아내를 설득했어?”였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신미라 씨 또한 처음부터 귀농이 반갑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귀농을 택했고, 지금은 남편이 무척 고맙다고 말한다. 그들의 시골 생활은 어떨까? 신미라 씨의 시점으로
토고, 코트디부아르 등의 서부아프리카는 2020년을 기점으로 마인드교육을 학교에서 시행할 예정이다. 이에 따라 각국 교육을 책임질 40명의 교수진이 한국에 왔다. 국제마인드교육원(원장 김재홍)에서 5개월 간 교육을 받은 이들이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가 있다. “마인드교육은 자신이 변화하고 다른 사람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살아있는 교육”이라는 것. 실제 삶에서 변화가 이뤄지는 산교육도움말 조성화(마인드교수 과정 담당자)Q. 이번에 마인드교육 교수과정이 국내에서 처음 실시 됐는데, 소감이 어떠신지요.처음으로 마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즐겨 푸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의 고향 진주에서는 다들 그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거라고 확신했지만, 정작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취업의 길로 눈을 돌리려던 그때, 국세청에서 ‘국립세무대학’을 설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들에게 4년 학비 전액과 생활비까지 지급하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당시 세무대학의 경쟁률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지만,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어렵지 않게 입학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재정학, 세법, 회계학 등 남들은 이해하
코로나19 대유행에도 백신은 아직 개발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감염 확대를 막는 최선의 예방책으로 ‘물리적 거리두기’를 실행해왔다. 정부 주도가 아닌 민간인들도 코로나19에서 벗어나도록 각각의 영역에서 위안의 손길을 펴고 있는데, 인류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방법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비대면 온라인 창구를 활용한다는 점이다.물론 이전에도 유통, 패션, 뷰티 업계 등 젊은 층이 선호하는 분야에 비대면 시스템은 활성화되어 왔다. 그런데 코로나19 이후에는 교육, 문화, 경제, 스포츠 등 전 영역에 비대면 시스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