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기 작가들_박완서, 알렉스 헤일리, 김은숙

학창 시절 많은 이들이 문학소녀, 문학소년을 자처하며 한 번쯤은 작가의 꿈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현실의 녹록지 않은 문제 앞에 조용히 꿈을 접고 있다면, 슬로 스타터 작가들의 이야기를 길잡이 삼아 주저하던 발걸음을 다시 내딛어 보면 어떨까.

수많은 그물을 쳐놓다, 박완서

‘예술성이 높은 것은 대중성이 떨어진다.’고 암묵적으로 통용되던 문학계 불문율을 깨고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던 소설가 박완서. 세대와 계층을 불문하고 한국인이 사랑한 대표 작가로 인정받은 그가 나이 마흔에 등단했다는 사실은 의외의 놀라움을 준다. 뒤늦게 작가의 길에 들어선 사례가 지금은 흔하지만 박완서가 글쓰기를 시작한 1970년의 한국 문단은 20대 초반에 데뷔하는 경우가 자연스러웠던 때였다. 거기다 5남매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의 늦은 등단은 확실히 특이했다. 박완서는 왜 그때서야 세상에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까.

박완서는 산문집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전쟁의 상처 등을 차분한 어조로 기록했다. 박완서 문학의 자양분이 된, 그가 살아온 생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알라딘 홈페이지
박완서는 산문집에서 자신의 유년시절, 전쟁의 상처 등을 차분한 어조로 기록했다. 박완서 문학의 자양분이 된, 그가 살아온 생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알라딘 홈페이지

어려서부터 꾸준히 독서를 통해 문학적 자양분을 얻은 박완서는 딸자식도 공부시켜 신여성으로 만들려는 홀어머니의 교육열에 힘입어 오빠와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어머니가 삯바느질로 번 돈으로 어렵게 공부해 숙명여고에 입학했고 선생님이었던 소설가 박노갑 선생의 문학수업을 들으며 같은 반 친구인 한말숙(소설가), 박명선(시인)과 함께 글쓰기의 꿈을 키웠다. 1950년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갔지만 한 달도 못 되어 한국전쟁이 터졌고, 전쟁으로 오빠와 숙부를 잃으면서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미8군 PX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이후 동화백화점에서 근무하다 그곳의 측량기사였던 호영진과 만나 1953년 결혼한다. 전업주부로서 1남 4녀를 낳아 키우며 그는 평범한 삶을 살았다.

2년 터울로 5남매를 기르고 시부모를 모시며 집안 살림을 이끌어야 하는 상황에서 작가의 꿈은 구체화될 수 없었다. 그렇게 17여 년의 세월이 흘러 막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1970년, 소설을 처음 써보았다. 공모에서 떨어지면 창피할까봐 몰래 아이들이 학교 간 뒤나 밤에 글을 써서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냈고 가족들은 소설 《나목》이 당선돼서야 그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박수근 화백의 작품 ‘나무와 두 여인 ’.《나목》의 모티브가 되었다. 두 사람은 미8군 PX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였다. 온갖 어려움에도 우직함과 정직함을 잊지 않았던 박수근 화백이었다고.사진 블로그 opsspt
박수근 화백의 작품 ‘나무와 두 여인 ’.《나목》의 모티브가 되었다. 두 사람은 미8군 PX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였다. 온갖 어려움에도 우직함과 정직함을 잊지 않았던 박수근 화백이었다고.사진 블로그 opsspt

“늦은 나이도 아니오, 이른 나이도 아닌 굉장히 자연스러운 나이였다.”고 말한 박완서는 왜 등단이 늦은 것에 조급해하거나 성급하게 굴지 않았을까? 자신의 천부적인 작가적 재능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 나름의 그물’을 치며 충분히 ‘발효의 시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가 말한 ‘그물’은 무엇인가. 작품 구상을 말한다. 아이 낳고 살림하느라 보통 주부의 면면을 드러내던 박완서였고 습작할 시간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 그는 대신 머릿속으로 수없이 많은 그물을 치며 글쓰기를 준비했다. 그물에 어떤 ‘경험’이 걸려들었다. 그 경험은 또 무엇인가. 박완서의 청춘을 휩쓸고 지나간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다. 전쟁과 친오빠의 죽음, 그로 인한 엄마의 정신적 붕괴,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며 겪어야 했던 모욕과 빈궁의 순간, PX의 초상화부에 근무하던 시절 자신을 닮은 박수근 화백과의 인연….(오랜 전업주부로서의 삶 역시 훗날 소설의 중요 소재가 됐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온 민족이 암담했던 그 시절을 소설로 써보고 싶다는 어떤 치기로 견뎠다고 한다. 하지만 결혼을 하면서 자식 키우고 살림하느라 글쓰기를 행동으로 쉽게 옮길 수 없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머릿속으로 수많은 그물을 치면서 거기에 걸려든 자신의 경험과 영감을 충분히 발효시키는 것. 조급해 하지 않고 차오를 때까지 말이다.

충분한 숙성 과정이 지나고, 막내 아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임무를 완료한 박완서는 밤에 몰래 글쓰기를 시작했다. 경험은 무기가 됐다. 전쟁을 체험한 20대의 박완서는 ‘이경’이 되었고 박수근 화백은 ‘옥희도’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소설 《나목》이 나왔다. 박완서 속에 오랫동안 구겨져 있던 소설가라는 형체가 드디어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옥희도의 유작전에서 그가 그린 그림이 죽은 나무, 즉 ‘고목枯木’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었다는 이경의 발견은 곧 박완서 자신의 발견이었다. 전쟁이 그를 짓밟았지만 그 아픔을 딛고 ‘봄에의 믿음’을 가져본다는 메시지는 우리 민족에게 하는 희망의 전언이기도 했다. 박완서는 뒤늦게 시작한 슬로 스타터 작가였지만 제대로 거친 긴 ‘발효의 시간’은 그의 문학세계의 저변을 확장시켰다. 자신은 ‘고목’이 아니라 ‘나목’이었다는 깨달음이 섰을 때 소설가로서의 새 삶을 살기 시작했고 그것을 계속 증명하며 성장의 깊이를 더해갔다.

느림보 거북이의 칠전팔기, 알렉스 헤일리

박완서가 전업주부로 살면서 작가의 꿈을 위해 20년 가까이 인내했다면, 흑인의 이야기로 미국사회에 경종을 울린《뿌리》의 작가 알렉스 헤일리는 20년간 바다를 대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대학에 일찍 진학했지만 곧 공부에 흥미를 잃고 17세에 연안수비대에 입대한다. 미국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도 참전한 알렉스는 20년 동안 해군생활을 하면서도 작가의 꿈을 잃지 않았다. 그에게 글쓰기의 꿈을 준 사람은 외할머니 신시아 팔머이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현관 계단에 앉아 들려 준 선조들의 삶이 담긴 가족사, 특히 어른도 되기 전에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온 선조의 이야기는 그의 호기심을 사로잡았고 훗날 글로 써서 사람들에게 알릴 것이라 결심했다고 한다.

《뿌리》는 1977년,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TV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1977년 당시 미국 TV 역사상 사상 최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진 교보문고 홈페이지
《뿌리》는 1977년, 2016년 두 차례에 걸쳐 TV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1977년 당시 미국 TV 역사상 사상 최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진 교보문고 홈페이지
소설《뿌리》의 표지. 쿤타 킨테와 후손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소설《뿌리》의 표지. 쿤타 킨테와 후손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뿌리》의 저자 알렉스 헤일리 평전 표지. 사진 아마존 홈페이지
《뿌리》의 저자 알렉스 헤일리 평전 표지. 사진 아마존 홈페이지

연안수비대 시절, 그는 배 안에서 틈틈이 글쓰기를 연습했다. 38세에 제대해서 본격적으로 글을 냈지만 마흔이 다 된 무명작가의 글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지독한 생활고와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에 지칠 법도 했으나 헤일리는 계속 작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43세 때에 한 흑인지도자의 자서전 집필을 통해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이듬해에 외할머니로부터 듣던 아프리카 선조들의 이야기를 쓰기로 결심한다. 방대한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감비아로 건너가 조상 쿤타 킨테의 여정을 추적한다. 55세가 되던 1976년, 오래 준비해온 작업이 결실을 맺어 소설 《뿌리》를 발표했다. ‘노예의 역사에 지대한 공헌’을 이유로 그는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로서 대성공을 거둔 후, 한 방문객이 그의 집 벽에 걸린 사진의 의미를 물었다. 장대 위에 거북이가 올라가 있는 특이한 그림이었다. “장대에 올라갈 수 없는 거북이가 거기에 있는 것은 누군가의 손길이 있었기 때문이죠. 내가 작가로서 영광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신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라는 헤일리의 대답에서 그의 겸손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느림보 ‘거북이’로 표현했다. 전업 작가가 되기까지 긴 기다림, 작가가 되어서 가난과 무명의 설움을 딛고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 글쓰기의 꿈을 주었던 자기 조상의 이야기를 12년간 끈질기게 추적해서 구체화시켰다. 그 모든 과정은 느리지만 묵직한 행보였다. 뿌리와 같은 깊고 건실한 내면까지 더해진 알렉스 헤일리의 삶은 슬로 스타터의 전형이라 할 법하다.

‘더 글로리’를 얻기까지, 김은숙

우리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 중, 2023년의 대한민국을 드라마 ‘더 글로리’로 뜨겁게 수놓았던 김은숙 작가 역시 슬로 스타터라는 사실을 아는가.

김은숙의 어린 시절은 굉장히 가난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죽음 뒤 어머니 혼자서 2남 1녀를 키우며 생계를 이어나갔기 때문에 책 한 권도 제대로 사 읽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가 쓴 동시를 학교 선생님이 칭찬한 일로 작가라는 꿈을 꾸었지만, 장녀로서 고교 졸업 후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고향인 강릉에서 가구점 경리로 7년간 일을 했다. 틈틈이 직장 근처의 도서대여점에서《토지》, 《태백산맥》, 오정희와 신경숙 작가의 책을 빌려 읽으며 아쉬움을 달래던 어느 날 우연히 서울예술대학교 입학 광고를 보았다. “가슴이 뛰는 거예요. 갑자기 잊고 있던 꿈이 억울했어요.” 몰래 입학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더 글로리’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은숙 작가.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더 글로리’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인터뷰하는 김은숙 작가. 사진 유튜브 넷플릭스 코리아
드라마 ‘더 글로리’ 포스터. 학교폭력의 비극을 다뤄 우리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진 작품이다.사진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포스터. 학교폭력의 비극을 다뤄 우리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진 작품이다.사진 넷플릭스

어머니의 격려를 받으며 동경하는 신경숙 작가가 다니던 서울예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27살의 나이였다. 공부하면서 등록금, 생활비까지 마련하는 치열한 삶을 살았고 졸업 후 신춘문예에 도전했지만 2년 동안 낙방하고 대학로에서 희곡을 썼다. 서울생활 줄곧 월세 반지하 단칸방을 벗어날 수 없었고, 새우깡 한 봉지로 3일을 버틴 적도 있었다. 드라마를 써 보라는 지인의 권유로 방송작가에 입문했고 수많은 ‘웰메이드 드라마’(well-made drama : 완성도가 높게 잘 만든 드라마)로 현재의 김은숙 작가가 되었다.

접어둔 꿈을 다시 시작하는 시기는 언제라도 상관이 없다. 단지 꿈을 내려놓은 그 시간을 제 나름의 그물을 치며 충분히 발효해 보자. 자신의 경험과 사고를 세밀하게 의식화해 놓자. 박완서처럼 말이다. 한번 거절당했다고 해도, 느림보 걸음이라도 계속 가보자. 칠전팔기 끝에 기다리는 무엇이 있다. 알렉스 헤일리처럼 말이다. 지독한 삶에도 희망은 있다. 존엄을 찾기 힘든 가난, 작가의 꿈을 접게 만들 형편일지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말자. 동경과 이상을 포기하지 말자. 김은숙처럼 말이다. 적절한 시기와 만났을 때 당신의 꿈은 꽃 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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