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스타터 slow starter

영화와 드라마는 실제 인생을 빗대어 담아낸다. 흥미로운 점은, 수많은 관객을 울리고 웃겼던 감동의 주인공 중 많은 이들이 ‘슬로 스타터’라는 것이다. 각양각색 서로 다른 시대, 환경 속의 주인공들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본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영화: 리바운드
부산 중앙고 농구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농구선수 출신 공익근무요원 ‘양현’이 부산 중앙고 농구부의 신임 코치로 발탁된다. 당시 중앙고 농구부는 이름만 있지, 실제 팀원은 하나도 없는 상황. 양현은 길거리 농구가 한창인 거리와 학교 운동장을 다니며 선수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다.

점프력만 좋은 축구선수 출신 ‘순규,’ 길거리 농구만 해온 ‘강호’, 부상으로 농구를 향한 꿈을 접은 ‘규혁’, 주목받던 천재 선수였지만 슬럼프에 빠진 ‘기범’, 농구 경력 7년차지만 만년 벤치워머였던 ‘재윤’, 농구 열정만 만렙인 ‘진욱’. 이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최약체 팀이었다. 실제로 첫 전국대회에서는 팀워크가 무너져 몰수패를 당하며 농구부 해체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양현은 포기하지 않는다.

“슛 쏴도 안 들어갈 때가 있다 아이가? 근데 그 순간 노력에 따라 기회가 다시 생기기도 한다. 그걸 머라카노?”

“리바운드!”

많은 사람이 꼽은 이 영화의 명대사다. 양현은 실의에 빠진 팀원들의 마음을 먼저 일으킨다. 그렇게 뭉쳐진 마음을 바탕으로 죽기살기로 훈련을 시작한다. 그리고 2012년 대한농구협회장기 전국 중고교 농구대회에서 기적을 쓴다. 신임 코치와 단 6명의 선수가 쟁쟁한 농구부를 제치고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이후 중앙고 농구부 팀원들의 인생은 서로 다르게 펼쳐졌다. 누군가는 프로 농구 선수의 길을 걸었고, 누군가는 대학 진학 후 교육자가 되기도 했다. 양현 코치는 훈련 중에 이런 말도 했다. ‘농구는 여기서 끝나도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라고. 실제로 선수들은 2012년 그 농구 코트에서 삶을 살아가는 법을 배웠으리라. 운동도, 삶도 어떤 멘토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모양이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영화 속 그들처럼.

사진 JTBC
사진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
의대 졸업 후 20년 넘게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왔던 주인공 ‘차정숙’. 자신의 꿈은 포기한 채, 가족들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온다.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서게 되면서 포기했던 레지던트 과정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는다.

필기 시험은 통과하지만, 레지던트로 일하며 실수를 연발한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어린 선배에게 혼이 나기도 하고, 무시도 당한다.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아들이 도움을 주려 하지만, 언제나 옆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3 딸의 대학진학 문제가 붉어지면서 차정숙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 그때 그를 붙잡은 사람은 차정숙이 최선을 다해 살폈던 환자였다. 어느 기업의 회장인 환자는 병원에 거액을 기부하며, 차정숙이 병원에 계속 근무하는 것을 기부 조건으로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 일로 차정숙은 다시 용기를 얻고 의사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이후 남편의 외도, 친정엄마의 병, 차정숙의 병 재발 등 여러 위기 상황을 맞으며 갈등 속에 빠지기도 한다. 그 과정을 통해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차정숙은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되어 병원을 개업하면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늦깎이 전문의가 되겠다는 차정숙을 향해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환자뿐만 아니라, 차정숙의 주치의인 로이킴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가슴 먹먹한 장면은 친정엄마의 말 한마디 한 마디였다. 그가 의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겠다고 했을 때도, 다시 의사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했을 때도, 언제나 엄마는 “그래 잘 생각했다.”며 딸의 선택을 지지했다. 의사가 되건, 아이의 엄마로 살건 친정엄마의 마음은 딸 차정숙이 행복하기만 바라기 때문이다. 늦깎이 닥터 차정숙 뒤에는 수많은 이들의 사랑이 있었다. 우리를 달려갈 수 있게 하는 건, 결국 이런 사랑이 아닐까.

사진 tvN
사진 tvN

드라마: 나빌레라
이 드라마는 나이 일흔에 발레리노를 꿈꾸는 ‘덕출’과 스물세 살의 꿈 앞에서 방황하는 발레리노 ‘채록’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덕출은 어린 시절 우연히 발레리노를 보고 꿈을 꾸던 적이 있다. 하지만 몸 쓰는 일 말고, 펜 쓰는 일을 하라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집배원이 된다. 결혼 후에는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게 전부라고 알고 살았다. 그런데 칠순을 앞두고 우연히 채록이 발레하는 모습을 보고 그 꿈을 다시 떠올린다.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결심한다. 죽기 전에 딱 한 번 날아 오르고 싶다고. 수차례의 부탁과 사정 끝에 덕출은 채록의 매니저로 일하며 그에게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다.

발레의 가장 기본 동작을 익히는 것도 쉽지 않지만, 발레에 진심인 덕출은 끊임없이 연습을 이어가며 실력이 향상된다. 또한 채록과 자주 만나게 되면서 그의 말 못할 집안 사정과 고민을 알게 된다. 덕출은 그런 채록에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멋지다, 빛이 난다.…’ 덕출은 언젠가 채록이 크게 날아오를 사람이라 믿는다. 그런 마음이 전해졌을까. 채록은 점점 덕출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던 중, 채록은 덕출이 알츠하이머 질환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된다. 채록은 더욱 살갑게 덕출을 챙겨 결국에 두 사람은 한 무대 올라 함께 날아오른다. 가장 아름다운 발레 공연을 선보인 것이다.

채록은 원래 오랜 날 축구선수로 훈련을 해오다 19살이 되어서야 발레를 시작한 특이한 경우였다. 운이 좋게도, 타고난 재능으로 1년 만에 무용원에 입학했지만, 슬럼프에 빠진 상태였다. 그런 그의 마음을 다시 뛰게 한 것이 덕출이었다. 처음에는 일흔의 나이에 발레를 배우고 싶다는 할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내저었던 그였다. 하지만 덕출과 함께하며 채록은 다시 발레리노에 대한 꿈을, 멀리 날아오르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덕출에게는 채록이, 채록에게는 덕출이. 그렇게 서로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어준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자. 어쩌면 내 옆사람이 나를 일으켜 줄 고마운 이가 될지도 모른다.

사진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사진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영화: 줄리&줄리아
1949년 ‘줄리아 차일드’가 외교관인 남편인 폴을 따라 프랑스에 도착한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 생활에서 먹을 때 가장 행복한 자신을 발견하고 명문 요리학교 ‘르 꼬르동 블루’를 다니며 요리에 도전해 전설적인 프렌치 셰프가 된다.

2002년, 다른 시공간에 ‘줄리’라는 여성이 있다. 대학 시절에는 유망주였지만, 현재 말단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어느 날 동창 모임에 갔다가 자신의 삶이 초라함을 느낀다. 남편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그가 블로그를 시작해보라 제안한다. 그는 평소 자신이 무척 좋아했던 전설의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의 레시피를 정복하기로 한다. 1년간 줄리아의 요리책에 등장하는 524개 요리 만들기에 도전한 것이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꿈을 찾아가기 시작하는 두 여자. 줄리아는 파리에서 익힌 요리를 책으로 출판하고자 한다. 줄리의 블로그 또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줄리아는 이런저런 이유로 출판 거절을 당하고, 심지어 남편은 다른 나라로 발령이 난다. 줄리는 어느 순간부터 요리 만들기가 즐거움이 아닌, 잘해야 하는 일이 되면서 지쳐간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처음 그들이 도전을 시작할 때도, 시련을 만나 좌절할 때도 두 사람의 남편은 아내를 한결같이 응원해 준다. ‘당신은 내 빵의 버터 같은 존재이자, 내 삶의 숨결이야.’ 줄리아 차일드의 남편 폴의 대사다. 그 덕분에 줄리아는 요리책을 성공적으로 출간하고, 전설의 프렌치 셰프가 된다. 초심을 되찾은 줄리는 ‘뉴욕타임스’에 인터뷰 요청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다.

줄리와 줄리아. 두 사람 중 더 많은 시간 동안 고군분투했던 이는 분명 줄리아였다. 책 출간만 8년이 걸렸으니 말이다. 줄리아의 전적인 지원군이 남편뿐이었다면, 줄리에게는 남편 외에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수십 년 전 같은 심정으로 요리를 시작했던 줄리아의 책이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의 문제를 만날 때면, 책장 앞으로 간다. 책을 읽으며 위로를 얻고, 삶을 살아갈 힘을 얻곤 한다. 지금 우리 곁에는 어떤 책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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