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세에 받은 박사학위, 이범식 교수

2021년 2월, 볕이 따사로운 어느 날이었다. 대구대 대학원 학위수여식이 있던 날, 유독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 58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범식 씨와 아내 김봉덕 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아내는 세상 누구보다 환하게 웃었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모든 것이 당신 덕분이라고 학사모와 가운을 건네며 행복해했다.

그는 조용히 지나온 10년을 떠올렸다. 47살에 대학 합격 통보를 받고 뛸 듯이 기뻐했던 날, 우여곡절 끝에 첫 수강 신청을 하던 날, 밤낮없이 공부에 매달렸던 날, 집으로 날아왔던 첫 성적표, 그걸 보며 활짝 웃던 아내의 모습, 장학금을 받아 들고 집으로 향하던 행복했던 날, 논문 쓰느라 고뇌하던 새벽 날의 풍경…. 길고 길었던 그날들은 그를 패배의 굴레에서 꺼내, 삶을 향해 힘차게 걸어가도록 만들었다.

이범식 박사는 만학도였다. 20대 학생들 틈에서 공부하기 위해선 무던히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남들보다 몇 배의 노력과 인내가 요구되었던 이유는 ‘나이’ 외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양팔과 오른다리가 없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 그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왼쪽 발로 펜을 잡고 글을 쓰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필요했다. 이렇듯 삶의 속도를 붙잡고 늘이던 그의 장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의 그를 ‘기적을 쓰는 사나이’라 불리게 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를 비롯해 ‘유퀴즈’ 등 여러 방송 프로그램이 앞다투어 그의 삶을 주목했다. 많은 이들이 가장 궁금해한 것은 ‘무엇이 그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했을까?’였다.

언젠가 이범식 박사는 이런 고민을 했단다. ‘아내는 나에게 무엇을 바랄까? 무엇 때문에 나와 함께 험난한 길을 걸어가려 하는 걸까?’ 하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며 이는 우문愚問이었음을 알았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희생에는 조건이 없는 법. 그런 아내의 마음을 깨달은 후, 그 또한 아내를 위해 살아가자고 결심했다. 사진제공 이범식

안녕하세요. 인터뷰에 앞서 질문지를 보냈는데, 곧바로 답변을 써주셔서 놀랐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답변을 적었다 지우기를 반복했네요. 아, 그날이 일요일이었는데 일부러 출근해서 답변을 적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하하) 평소에도 늘 제가 해야 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요. 38년간 쉼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오다 보니 습관이 몸에 밴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토요일 하루만큼은 집에서 쉬면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려 해요.

박사학위를 받으신 후 어떠셨는지요.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요. 문경대학교 사회복지재활과에서 강의할 기회가 생겼어요. 학생들도 저 같은 교수는 처음이고, 저도 학생들을 만나 수업하는 건 처음이잖아요.(웃음) 초반엔 긴장도 많이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편안해졌어요. 지금은 방학인데, 곧 2학기 일정이 나올 예정이에요. 또 고등학교나 지방자치단체 등 다양한 곳에서 강연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어디든 가서 제 이야기를 합니다. 번외로 수십 년 전부터 해왔던 활동도 꾸준히 하고요. 한국교통장애인협회 경산지회에서 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장애인 복지와 재활, 인식개선 관련 활동을 하고 있어요.

대구대학교 재학 시절, 강의실 맨 앞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2015년 SBS 교양 프로 ‘세상에 이런 일이’ 출연 당시, 방영된 장면이다. 사진캡처 세상에 이런 일이

47살에 대학생이 되어 11년 만에 박사학위까지 받으셨어요.

학과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생애 첫 수강 과목을 신청하던 날이 어제 같은데 시간이 쏜살같이 지났네요. 늦깎이 대학 생활이 제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어요. 등하교하는 것부터 큰 산이었죠.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야 했는데, 양팔이 없는 저에게는 버스를 타고 내리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 만큼 치열한 일이었어요. 비가 오는 날에는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요. 이외에도 밥을 먹는 것, 화장실에 가는 것 등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에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습니다. 그때마다 도와주는 분들이 있었기에 학교생활을 잘 마칠 수 있었어요. 솔직히 가장 큰 문제는 제 나이였어요. 저보다 한참 어린 학생들과 공부하며 ‘이제 시작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올라왔죠. 그럴수록 공부에 더 집중했어요. 늘 강의실 제일 앞쪽 바닥에 앉아 강의를 들었어요. 발로 책장을 넘기고, 발로 메모하며 수업을 들었죠. 그렇게 한참 공부하다 보면, 허리가 그렇게 아파와요. 자세가 불안정하니 집중력이 떨어질 때도 많았죠. 그래서 강의내용을 꼭 녹음했어요. 집에 돌아와 그걸 들으며 수차례 복습했지요. 그 결과, 여러 차례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범식 박사가 수업을 들으면서 발로 필기했던 노트. 사고 전 그의 손글씨체와 유사하다고. 사진제공 이범식

어려운 도전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50대를 목전에 뒀던 시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참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그대로 머무른다면 우리 부부의 60대의 삶은 불투명해 보였어요. 그때 아내가 제게 ‘그러면 공부를 한번 해봐요.’ 하고 권하더군요. 처음에는 경제적인 문제로 망설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오랜 고민 끝에 아내가 선물해 준 기회를 잡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전문대학을 졸업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그런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니, 제대로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죠. 대구대학교 편입에 성공했고, 그걸 시작으로 박사 공부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공부한 결과가 담긴 성적표가 오면, 제 학부형인 아내가 그걸 보면서 무척 행복해했어요. 그 모습을 볼 때 저도 조용히 미소지었죠. 제 삶의 원동력인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두 개의 터닝 포인트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1985년 11월, 전기기사로 일하며 소박한 꿈을 꾸던 22살 이범식에게 일어난 사고였다. 전기 공사를 하던 중 2만 볼트가 넘는 초고압이 그를 삼켰고, 청년 이범식의 양팔과 오른다리를 앗아가고 말았다. 병실에 누워 죽음을 떠올리는 날도 많았지만, 하얀 눈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그는 다시 살아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후, 그는 양팔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배워나갔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인생의 고난은 파도처럼 그에게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아버지의 죽음, 사업 실패, 불어나는 빚.... 사랑하는 어머니의 자식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 시련과 치열하게 싸우고, 버텨야 했다. 홀로 깊은 터널을 걷고 있던 그때, 그의 삶을 뒤 바꾼 두 번째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고 한다. 바로 그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아내 ‘김봉덕’ 씨를 만난 것이었다. 그날 후로 얼굴에 눌어붙었던 우울함은 서서히 옅어졌고,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그는 다시 한번 일어나 세상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범식 박사와 그의 아내 김봉덕 씨가 결혼하기 전, 의기투합해 만들었던 중증 장애인 돕기 봉사 모임의 이름은 ‘의향당義香當’이었다. 모임에 함께했던 이들과. 사진제공 이범식
사고 이후, 그는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가장 먼저 발가락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끼워 밥 먹는 법을 익혔고, 이후엔 글씨 쓰기를, 그 다음으로 컴퓨터 기술을 익혔다. 사진제공 이범식

어떻게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셨나요?

채팅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당시 아내의 대화명이 ‘평강공주’였고, 저는 ‘이슬비’였죠.(웃음) 우연히 대화하는데,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에 진심인 아내에게 푹 빠지게 되었어요. 함께 중증 장애인을 돕는 사이버 모임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더 가까워지게 되었죠. 그럴수록 아내를 향한 마음은 커져갔고, 그런 제 마음을 메일에 담아 전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내는 그런 제 마음을 알고 펑펑 울었다고 해요. 제 고백을 선뜻 허락할 수 없어서 사흘 밤낮을 울며 고민했대요. 그리고 나흘이 되던 날, 제 고백을 받아들여 주었죠. 저를 도우며 함께 살아가면, 그걸 바탕으로 제가 수십, 수백, 수천의 사람을 돕겠다는 믿음이 있었대요. 그렇게 아내는 제 반쪽이 되어줬어요. 어디를 가든 꼭 이야기해요. ‘아내를 만나서 제 삶이 비로소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라고요.

누구든 ‘삶의 의미’가 있다면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안다면요. 수십 년간 아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셨던 어머니가 제 삶의 의미였고, 이제는 제 아내가 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고 있어요.

이 기회를 빌어, 아내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요.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아내가 그러더군요. 학사, 석사 수여식 때는 가운을 빌려 입혔는데 박사 수여식 때는 제일 좋은 면으로 맞춤 제작을 해주고 싶었다고요. 그걸 제가 모른다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사실 알고 있었어요.(웃음) 그런 아내 마음을 어떻게 모르겠어요. 저희가 경상도 사람들이라 말수는 적지만 흐르는 정은 깊어요. 아내는 제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죠.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게 고맙고, 또 고마워요. 이제는 아내와 함께 전국을 다니며 우리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전하는 일을 하고 싶어요.

한번은 강연을 마치고 나서, 한 학생이 싸인을 해달라고 했단다. 그런데 그 뒤로 학생들이 줄을 서는 것이 아닌가.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런 학생들의 모습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고. 사진제공 이범식
이범식 박사는 학생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강연을 듣고 약점이 오히려 삶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는 말을 해줄 때 그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사진제공 이범식, 강연 문의 wkrudekd@hanmail.net 
이범식 박사는 학생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강연을 듣고 약점이 오히려 삶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는 말을 해줄 때 그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사진제공 이범식, 강연 문의 wkrudekd@hanmail.net 
이범식 박사는 학생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강연을 듣고 약점이 오히려 삶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는 말을 해줄 때 그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사진제공 이범식, 강연 문의 wkrudekd@hanmail.net 
이범식 박사는 학생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좋아한다. 강연을 듣고 약점이 오히려 삶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걸 느꼈다는 말을 해줄 때 그는 새로운 힘을 얻는다. 사진제공 이범식, 강연 문의 wkrudekd@hanmail.net 

앞으로의 계획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장애인이 된 후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고, 그 덕분에 사회에서 한 역할을 담당하는 구성원으로 살 수 있었어요. 가장 어려울 때 손을 뻗으면, 감사하게도 언제나 늘 귀인이 그 자리에 있었죠. 제가 받았던 도움, 사랑을 조금이나마 다시 돌려주고 싶었어요. 한국교통장애인협회 일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런 마음에서였죠. 예전에는 제가 가진 것이 컴퓨터 기술뿐이었어요.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둔 것이었죠. 그 지식을 활용해 교도소에서 기술교육을 하거나 중증 장애인에게 컴퓨터를 보급하는 봉사활동을 해왔어요. 이제는 제 삶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희망을 전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얼마 전에 고등학교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었어요. 강연을 마치고 갈 때 학생들이 제게 웃으며 인사를 하더군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 한마디가 큰 기쁨이고 보람이었어요. 학생들의 소감 후기를 받으면 읽고 또 읽어봐요.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삶의 어려움을 마주할 때가 있잖아요. 제2의 이범식, 제3의 이범식을 찾아 그들과 같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인성교육센터를 만들고 싶어요.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도 아내와 함께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뒤늦게라도 인생의 새로운 걸음을 떼려는 사람들에게 한마디를 해주신다면요.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편안하고 따뜻한 아랫목에서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찬 공기가 나부끼는 밖으로 가는 일이라 생각해요. 인간의 본성은 편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잖아요. 저도 똑같아요. 그런데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 제 자신을 위하는 길이 아니더군요. 그렇기에 늘 저와의 싸움을 해왔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깊이 사고하는 것이라 봐요. 인생이 바쁘게 흘러가지만, 그 와중에도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죠.

제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준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지금껏 저를 도와준 수많은 사람이 있었듯이 여러분에게도 살아갈 힘을 주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저도 다시 시작이에요. 여러분들과 함께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려 합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이범식 박사가 자신의 인생이 담긴 책을 보내왔다. 어떤 고난 속에서도 마음의 힘을 잃지 않는다면,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용기를 전하고자 쓴 책이라고 했다. 첫 페이지를 넘기니 그가 발로 직접 쓴 문구가 보였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띈 것은 그 아래에 적힌 글이었다. ‘저자 이범식, 김봉덕 드림’. 책을 써도, 강연을 해도, 공부를 해도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아내가 함께였다.

‘뒷심’은 어떤 일을 끝까지 견디어 내거나 끌고 나가는 힘을 뜻한다. 하지만 이 단어의 또 다른 뜻은 남이 뒤에서 도와주는 힘이다. 이범식 박사를 만나며 생각했다. 홀로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박수 받을 일이지만, 가장 강력한 ‘뒷심’은 언제 넘어져도 손을 잡아 일으켜 줄 사람과 함께할 때 생기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젠 그가 누군가의 든든한 ‘뒷심’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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