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곤 대장, 히말라야 14좌 완등 산악인

김미곤대한민국의 산악인. 등반가의 전설 라인홀트 메 스너의《검은 고독 흰 고독》을 읽고 고산 등반을 꿈꾸게 됐다. 1998년 마나슬루 등반길에 오르며 히말라야 초행길에 나섰고 2000년 초오유 등정을 시작으로 2018년까지 히말라야 8,000m 급 14좌 등정이라는 업적을 세웠다. 국내 체육훈 장의 최고 등급인 ‘청룡장’을 수훈하였다.
김미곤
대한민국의 산악인. 등반가의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의《검은 고독 흰 고독》을 읽고 고산 등반을 꿈꾸게 됐다. 1998년 마나슬루 등반길에 오르며 히말라야 초행길에 나섰고 2000년 초오유 등정을 시작으로 2018년까지 히말라야 8,000m 급 14좌 등정이라는 업적을 세웠다. 국내 체육훈장의 최고 등급인 ‘청룡장’을 수훈하였다. 사진제공 IYF

안녕하세요. 키 작은 산악인 김미곤입니다. 강연을 들으러 오신 분들 중에 키 큰 분들이 많아서 무대에 선 제가 더 작게 보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사람도 8,000m가 넘는 히말라야 14개 봉우리를 완등完登하고 왔습니다. 처음 히말라야를 다니기 시작한 1998년부터 2018년 7월까지 20년 동안 저는 8,000m가 넘는 14좌를 등정했습니다. 이 기록이 세계에서는 40번째, 우리나라에서는 6번째라고 합니다. 등정 기록을 하는 분들이 말해줘서 알았습니다. 저는 단지 산을 오르는 등반가여서 기록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산에만 다닙니다.(웃음) 이렇게 외길로 산을 오르다 보니 대한민국 정부에서 체육훈장 청룡장을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히말라야는 어떤 곳입니까? 눈보라가 치는 곳으로만 알고 계시죠? 그곳엔 열대 과일도 무성합니다. 히말라야가 위도상 아열대성 기후에 속하기 때문이죠. 히말라야의 저지대에는 아열대 식물, 2,000m 이상에서는 온대림, 3,000m 이상에서는 고산지대의 나무들이 자랍니다. 여러분이 아는 만년설은 5,000m 이상 가야 볼 수 있고 6,000m가 넘어가면 식물이 거의 자라지 않습니다. 저희는 5,000m에서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산에 오를 준비를 하는데, 거기에서도 나름의 문화생활을 즐깁니다. 태양을 이용해 전기를 만들어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습니다.

그곳에 가면 저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산을 오르기 위해 오는 외국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과는 문화, 종교, 언어적 차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저희에겐 오직 단 하나, 산에 오를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 같은 하나의 목표로 친구가 됩니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우리는 안전한 곳에 캠프를 설치합니다.

어느 날, 영화 ‘히말라야’ 촬영팀이 제게 현지 코디네이터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히말라야 부근 영화 촬영장에서 저는 6개월간 함께했습니다. 영화는 엄홍길 대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에베레스트에서 하산 중 실종된 후배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엄홍길 대장이 휴먼 원정대와 함께 위대한 여정을 떠나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내용은 실제 우리 산악인들의 이야기이며,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8년 7월 9일, 마침내 히말라야 8,000m 급 14좌 완등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2018년 7월 9일, 마침내 히말라야 8,000m 급 14좌 완등이라는 대업을 달성했다.

“야! 같이 올라왔으면 같이 내려가야지!”

제가 산을 향해 했던 모든 도전은 쉽지 않았고 시련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제게 큰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산에서 큰 사고가 두 번 있었는데요. 2005년, 산 정상에 오르다가 7,550m에서 낙석落石을 맞게 됩니다. 돌 하나가 제 오른쪽 어깨를 때리고, 다른 하나는 제 발을 찍었습니다. 둘러 보니 저 혼자만 다쳤고 다른 대원들은 멀쩡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7,550m에서 줄에 매달린 상태로 살아서 내려갈 수는 없다. 내 동료들은 과연 나를 버리고 갈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줄을 끊어야겠다.’ 줄이 끊기면 제 몸은 7,500m에서 3,000m까지 자유 낙하를 하게 됩니다. 동료들은 제가 죽었기 때문에 슬프겠지만 빨리 그 위험한 곳을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찾았습니다. 당시 오른팔을 다쳤기 때문에 왼팔로 더듬거리며 칼을 찾았으나, 오른쪽 엉덩이 부근에 있는 칼을 왼손으로는 잡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칼을 향해 손을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동료가 제게 툭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야! 같이 올라왔으면 같이 내려가야지!” 그 친구는 제가 줄을 끊으려 할 걸 알아차린 거죠. 그래서 그 계획을 포기하고 저는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를 살리기 위한 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7,550m에서 사고를 당해 살아 내려온 사람은 실제로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동료들은 저를 데리고 기적적으로 내려왔습니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해 확인하니 발뼈가 다섯 조각으로 동강나 있었고 오른쪽 어깨 근육들도 다 파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동료들 덕분에 저는 사고 이후에도 등반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등반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형제 같은 동료들이 있어 가능하다. 이들과는 항상 마음의 끈이 연결되어 있다.
등반은 절대 혼자 할 수 없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형제 같은 동료들이 있어 가능하다. 이들과는 항상 마음의 끈이 연결되어 있다.

나만 살아서 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그런데 나를 가장 아프게 했고 나를 성장시켰던 것은 2010년도의 사고입니다. 산 정상을 앞에 두고 저는 2명의 대원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는 발에 심각한 동상을 입었고요. 하지만 나만 살아서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빠져 저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제 목숨보다 더 좋아했던 산을 더 이상 다닐 자신이 없었습니다. 후원을 해주는 회사에 가서 “나는 그만 산을 포기하겠다. 내가 다 배상을 할 테니 우리 계약을 파기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후원사에서 의외의 반응이 왔습니다. “나는 너에게 후원을 한 거지, 산에 후원한 게 아니다. 네가 산을 가든 안 가든 우린 너에게 계속 후원을 할 테니 치료를 열심히 받아라.”

이듬해에 히말라야에 묻힌 동료의 시신을 찾으러 구조팀이 결성되었습니다. 그 구조팀에 저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동료의 유가족이 찾아와 “네가 데리고 갔으니 네가 가서 데려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저는 동상 걸린 발 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등반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유가족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곧바로 병원으로 가서 치료 중인 두 번째, 세 번째 발가락을 한 마디씩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히말라야로 갔습니다. 나의 동료를,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잃은 동료들을 찾는 과정은 참 고통스러웠습니다. 7,400m에서 마침내 시신을 찾았습니다. 그 동료들을 저 밑 문명사회에까지 데려간다는 게 불가능하지만 저는 시도했습니다. 한 달의 사투 끝에 그들을 문명사회로 데리고 내려왔습니다. 유가족 측에서 또 연락이 왔습니다. “네가 할 수 있다면 그들의 한을 풀어줘라. 그들의 사진을 산 정상에 묻어줬으면 좋겠다.” 유가족의 소원대로 저는 다시 산으로 오르기 시작했고, 정상에 그들의 사진을 묻어주고 왔습니다. 이 두 사건이 저를 상당히 성장시켰습니다.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은 그의 또다른 고향이다. 누군가가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그는 기꺼이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사진제공 김미곤
히말라야가 있는 네팔은 그의 또다른 고향이다. 누군가가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그는 기꺼이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사진제공 김미곤

다른 사람을 도우며 마음의 끈이 연결되다

2013년도에 파키스탄에서 등반을 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대만팀이 다른 봉우리의 정상에 갔다가 내려오면서 추락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어서 주변에 도움을 요청해 왔습니다. 베이스캠프에는 다른 여러 팀이 있었지만 다들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사고가 난 지점이 7,900m이기 때문입니다. 그 높이에서 사람을 구조한다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저는 2005년도에 7,500m에서 다쳐 살아서 내려왔었고, 2010년도에 동료를 잃는 마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대만팀이 그 아픔을 느끼면, 이 또한 나의 고통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나와 일면식이 없는 팀이어도 우리는 같은 산을 다니는 동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조하러 갔습니다. 신이 도와서 무사히 대만팀을 데리고 베이스캠프까지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겨울이 되면 한국에서 같이 훈련하는 정말 형제 같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2014년에도 작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한 중국 여성대원이 설치한 텐트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7,400m 높이에서 그 대원은 매서운 추위를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당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저는 새벽 2시에 하네스를 착용하고 로프를 설치해 그를 구조하러 엉금엉금 기어갔습니다. 바람이 너무 강했고 텐트가 능선에 있었기 때문에 실수하면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100m가 100km로 느껴졌습니다. 추위에 쪼그리고 앉아서 살아 돌아갈 희망을 포기한 대원의 팔목을 잡고 저는 다시 엉금엉금 두 시간을 기어 텐트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팀은 정상 등반을 포기했습니다. 바람이 너무 강했고 지난밤에 일어난 사건으로 서로가 체력이 너무 소실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텐트에 돌아와서 차를 한잔 마시고 조금 있으니까 바람이 잦아들었고, 정말 신기한 것은 제 몸에서 에너지가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제 동료와 그 대원에게 정상에 갈 수 있냐고 물어보니까 그들도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정상을 향했습니다. 평소보다 4~6시간이 더 걸렸지만 정상을 찍고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그 중국 대원도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고 우리는 무척 친한 친구가 됐습니다.

이렇게 제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었던 이유는 2005년과 2010년 때문입니다. 동료들이 내 목숨을 구했고, 또 동료를 잃은 그 아픔이 있었기에 저는 다른 사람을 도우러 갈 수 있었습니다. 2010년도 당시에는 사고의 고통이 너무나 컸습니다. 3년 동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저는 잠들기 위해 매일 저녁 소주 한 잔씩 먹어야 했습니다. 죽은 동료의 사진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를 다시 산으로 이끌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할 수 있게 한 것은 그 사고였습니다. 이런 고통과 아픔은 나만 겪으면 되지 다른 사람이 겪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저는 2013년과 2014년에 그런 도움을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 계속 마음의 끈이 연결됐습니다.

사진제공 김미곤
사진제공 김미곤

정상이 바로 저긴데, 나는 하산을 택했다

2015년도에 안나푸르나 등반을 할 때였습니다. 정상을 앞에 두고 베이스캠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차를 한잔하고 있는데 갑자기 찻잔이 흔들리더니 툭 넘어지는 겁니다. 눈사태가 크게 난 줄 알고 텐트 밖으로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눈사태는 물컵이 흔들릴 정도이지 컵이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또 눈사태가 나면 후폭풍이 베이스캠프까지 와서 텐트가 반절로 접힙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조금 있더니 한쪽에서 “지진 났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지진이 어떤 것인지 체험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당장 눈앞에 아무런 흔적이 없어서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사람이 많이 죽었대.”, “저 밑에는 차가 다닐 수가 없대.”와 같은 심각한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왔습니다. 네팔 친구가 “나라 전체를 뒤흔든 지진이 일어났다. 에베레스트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우리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이틀만 있으면 정상을 가기 때문에 계속 등반할 것인지를 두고 대원들과 의논했습니다. 절반은 내려가자, 나머지 절반은 정상을 가자는 의견이었습니다. 대원들은 이 산에 오르기 위해 1년을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했고, 직장까지 그만두고 온 대원도 있었습니다. 의견이 양분되었기에 결국 대장인 제가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또 다시 2010년도 사고가 떠올랐습니다. 동료가 내 곁을 떠나갔을 때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기억났습니다. 네팔 사람들에게는 지진으로 자기 가족이 죽은 상황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 잃은 아픔에 고통하고 있을 걸 생각하니까 도저히 등반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하산을 결정했고, 남은 식량과 장비로 네팔 사람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당시 다른 팀의 리더들도 모두 저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히말라야 8,000m 급 10개 이상을 등반한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짐을 싸서 내려가니까 이들도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A팀과 B팀으로 나누어서 네팔 구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차량들이 진입할 수 있는 곳에는 이미 구호 활동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2~3일 도보로 가야 하는 깊은 산중의 마을들은 장비 진입이 어려워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습니다. 저희는 그런 곳들을 찾아가서 있던 식량과 장비를 나눠주며 구호 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물품이 턱없이 부족해서 위성 전화기로 후원사에 연락해 물품 공급을 요청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도 후원사에서 텐트와 의료품, 의류 등을 3톤이나 보내주었습니다. 또 후원사는 네팔 정부에 “차량이 들어가지 못한 곳에 이 물건들을 헬기로 떨어뜨려 달라.”고 요청했고, 헬기가 구조하고 잠깐 시간이 날 때 식량과 물품을 산간 지역에 배달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약 2주간 네팔에 있으면서 구호 활동을 하고 왔습니다. 네팔 사람들이 가족을 잃은 슬픔을 빨리 덜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우리의 활동에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네팔 아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습니다. 2015년도에 도움을 받았던 아이들이 이제는 커서 스무 살이 되었고 어떤 아이는 한국에 와서 일을 합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기쁨의 눈물도 흘리고, 슬픔의 눈물도 흘립니다.

큰 산이 작은 저를 크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나의 동료가 저를 더욱 더 크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별것 아닌 사람이지만 누군가 제게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도울 마음을 먹었습니다. 제 전문 분야에서 여러분들이 도움을 요청한다면 저는 언제든지 달려가겠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저 같은 아픔 없이 정말 행복한 삶을 살면서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정리 김진숙 기자

* 이 기사는 부산 월드캠프 행사에서 열린 ‘명사 특강’을 직접 듣고 정리한 내용입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