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뤽 아우프Gluck auf(살아서 만납시다)!” 천 미터 지하에 있는 탄광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기 전, 독일 광부들이 주고받는 인사다. 탄광은 언제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모르기 때문에 이 한마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무사귀환을 비는 것이다. 하루 8시간 매캐한 탄가루를 들이키고 아침마다 코피를 쏟는, 생사를 오가는 중노동 속에서 조국의 가족들을 다시 만나겠다는 소망 하나로 버텨온 우리네 아버지들을 소개한다.

박해권(사진 왼쪽)씨. 1976년 4월 26일, 파독 광부 제2차 38진으로 출국해 독일 겔젠키르헨 탄광지대에서 근무했다. 한국파독연합회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파독 근로자들을 위한 기념사업과 친목도모에 힘쓰고 있다. 김학만씨 역시 1976년 파독 광부 제2차 38진으로 출국해 겔젠키르헨에서 일했다.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도 위생병으로 복무한 경험을 살려 남자 간호사로 일하며 다년간 독일에 머물렀다.(사진 홍수정 기자)
박해권(사진 왼쪽)씨. 1976년 4월 26일, 파독 광부 제2차 38진으로 출국해 독일 겔젠키르헨 탄광지대에서 근무했다. 한국파독연합회 상임이사로 활동하며 파독 근로자들을 위한 기념사업과 친목도모에 힘쓰고 있다. 김학만씨 역시 1976년 파독 광부 제2차 38진으로 출국해 겔젠키르헨에서 일했다. 계약기간이 끝난 뒤에도 위생병으로 복무한 경험을 살려 남자 간호사로 일하며 다년간 독일에 머물렀다.(사진 홍수정 기자)

-지금이야 TV나 인터넷을 통해 다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미지의 나라에 가까운 독일행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박해권(이하 박): 그때는 우리가 워낙 경제사정이 어렵고 또 독일 가면 보수를 많이 준다니까 갔지, 지금 같으면 못 갔을 거예요. 한국에서는 한 달 일하고 받는 봉급이 만 몇천 원 정도인데, 독일에서는 10만 원 넘게 받았거든요. 그러다보니 경쟁이 엄청 심했어요. 50명을 뽑는데 수백 명씩 몰려들 정도였어요. 땅속으로 천 미터 넘게 들어가 석탄을 캐려면 체력이 있어야 하니까, 시험과목 중 하나가 60킬로그램이 넘는 쌀가마니를 들었다 놨다 하는 거였어요.

김학만(이하 김): 서류심사와 필기시험, 면접까지 통과하면 4주 정도 영어와 독일어를 배우며 현지적응 교육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광산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 위주로 선발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대개 가방끈이 짧잖아요? 그랬더니 독일에서 ‘외국어를 몰라 의사소통이 안 되니 어느 정도 학력이 되는 사람들로 보내달라’는 요청이 온 거예요. 그래서 고학력자 위주로 뽑아 보냈더니, 그 사람들은 또 험한 일에 익숙지가 않고…. 당시만 해도 기업인이나 공무원, 유학생 아니면 영화 국제시장의 진짜 주인공을 만나다 외국 나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보니, 독일에 가서 일도 하고 기회가 되면 공부도 해 볼 요량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떨리는 가슴을 안고 독일로 가셨겠군요. 실제 가 보니 어떻던가요?

김: 생활환경이나 시스템, 복지 등이 너무도 잘 갖춰져 있더군요. 길거리가 굉장히 깨끗했습니다. 시민들도 친절하고 국민의식도 높았습니다. 독일은 그때 이미 교통카드란 게 있어서 전철을 탈 때 카드를 기계에 찍고 탔는데, 검표원이 따로 없는데도 무임승차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지나가다 조금만 부딪혀도 ‘미안하다’는 인사를 꼭 하더라고요.

박: 처음 독일 갔을 때 길을 몰라서 독일 사람에게 물어보면 완전히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알려주더군요. 심지어 가는 길을 따라오면서 가르쳐 주거나, 자기 차로 목적지까지 직접 태워다주기도 했습니다. 빨간불이면 지나가는 차가 없어도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렸다가 건넜고요.

김: 무엇보다 참 검소해요. 우리는 옷 하나도 유행 지났다 싶으면 안 입잖아요? 독일 사람들은 산 지 10년 넘은 옷도 그냥 입고 다녀요. 차도 자기 소득수준이나 용도에 맞는 것을 타지, 고급차는 타지 않아요. 고급 독일제 차는 오히려 한국에 더 많은 것 같아요(웃음). ‘이런 것은 우리나라도 배워야 된다’ 싶은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탄광 입구에 적힌 ‘글뤽 아우프Gluckauf(살아서 만납시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탄광 입구에 적힌 ‘글뤽 아우프Gluckauf(살아서 만납시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처음 독일 땅을 밟았을 때의 소감을 박 씨는 이렇게 표현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놀라움에 젖어 있을 틈이 없었다. 이들은 독일인들이 꺼리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대신 하러 온 용병에 불과했다. 이른바 ‘저먼 드림German dream’을 좇아 그리스·터키·인도·일본 등에서 모여든 외국인 근로자들 틈바구니에서 한국인 광부들은 하루 8시간씩 석탄을 캐야 했다. “콰르릉~!” 석탄과 함께 쏟아지는 탄가루는 요즘 말하는 미세먼지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 없었다. 지하 1천 미터 속 열기로 탄광 내부는 한여름날씨였다. 1리터 넘게 물을 마셔도 화장실에 갈 필요가 없었다. 수분이 고스란히 땀으로 배출되기 때문이었다.

탄광의 가장 깊은 안쪽인 막장에 내려가기 전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광부들.
탄광의 가장 깊은 안쪽인 막장에 내려가기 전 작업복으로 갈아입는 광부들.

-공기도 제대로 안 통하는 더운 땅 속에서 일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드셨을 텐데요.

박: 거기서는 지하수도 펄펄 끓는 물이 되어 나와요. 사우나에 들어온 기분이었지요. 펌프로 바깥 공기를 넣어주는데, 그쪽으로 가면 정말 시원하지만 바람에 탄가루가 날리다 보니 온몸이 탄가루 범벅이 되지요. 워낙에 더우니까 제가 쓸 수 있는 힘이 100이라면 50정도밖에 쓰질 못합니다.

김: 우리나라 같으면 탄을 캐기 위해 굴을 파고 들어가는데, 독일은 석탄이 아예 1~2미터 높이로 층을 이루어 쫙 깔려 있어요. 탄층과 탄층 사이에는 암반이 있고요. 그렇게 몇 킬로미터를 파고 또 파들어가도 계속 석탄이 나오는 거예요. 탄광이 하도 넓어 안에서는 전철을 타고 다닐 정도였지요.

박: 흔히 알려진 것처럼 우리가 곡괭이로만 채굴작업을 한 건 아니에요. 자동굴착기가 마치 탱크처럼 석탄층을 파고들면서 석탄을 캐내면, 굴착기가 미처 닿지 않은 가장자리는 우리가 직접 곡괭이질을 해야 했지요. 석탄을 캐서 옮기는 일이야 어느 정도 기계화되어 있지만, 탄광이 무너지지 않도록 ‘슈템펠’이라는 쇠기둥을 세우는 일은 수작업으로 했습니다. 언제든 탄광이 무너지거나 굴착기 칼날에 돌멩이가 튀는 등 사고가 생길 수 있으니까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지요.

김: 팀을 이뤄서 작업했는데, 팀마다 독일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었어요. 나머지는 전부 외국인 근로자였어요. 구소련이나 터키 등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가만히 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이 제일 체격이 작았습니다. 체구도 훨씬 커서 힘으로는 서양인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어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베갯잇이 코피로 젖어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일이 고된 것 외에 다른 힘든 점은 없었습니까?

박: 외로움이었죠. 아침 6시에 작업이 시작되니까 늦어도 5시에는 숙소를 나와야 했어요. 일이 끝나면 오후 2시쯤 되는데,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와 한숨 자고 나면 저녁시간이 돼요. 그럼 새벽 출근 때까지 시간이 많지만 물 한 병 사기도 쉽지 않은 독일어 실력이니, 밖에 나가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어요. 한국에서 가족들이 보낸 편지를 기다리는 게 낙이었어요.

김: 저도 말이 안 통해 자주 어려웠어요. 한번은 독일 사람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오해가 생기는 바람에 그 사람이 “뭐, 날 죽이겠다고!” 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이 있어요. 마트에 갔는데 통조림에 개 그림이 붙어 있길래 ‘개고기 통조림도 있나 보다’ 하고 사다 먹었는데, 알고 보니 개사료 통조림이었던 적도 있고(웃음).

독일인들은 친절했지만,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엄격했다는 게 두 사람의 기억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독일인 반장은 슥 훑어보기만 해도 광부들이 열심히 하는지, 꾀부리는지를 단박에 알아챘다. 작업량을 다 채우면 보수를 10~30%씩 더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절대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다. 그들이 매달 한국에 송금하는 돈은 가족들에게는 귀한 생명줄이었고, 조국에게는 경제를 일으킬 소중한 밑천이었으니까.

-가족 생각을 하며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셨습니까?

박: 그렇죠. 독일에서 받는 돈이 한국에 비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었지만, 독일 물가도 그만큼 비싸니까 돈을 최대한 아껴 써야 했어요. 독일 사람들처럼 맛있는 것 사먹고 휴일에 놀러 다니고 하면 가족들에게 보낼 돈이 없어지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하고, 먹고자는 것 외에는 돈을 쓰지 않으니까 월급의 90% 이상을 고향에 송금할 수 있었어요. 특히 저는 결혼하고 처자식을 한국에 두고 독일에 갔었거든요. 그 기쁨은 말로 다 못하죠.

김: 저는 철도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먼저 독일에 광부로 간 형의 권유로 독일로 갔어요. 제가 간 뒤에는 작은형이 왔고요. 그렇게 8남매 중 저를 포함한 형제 셋이 독일에 갔어요. 3형제가 번 돈으로 여동생들이 공부도 하고 시집도 가고…. 은행에 가서 돈을 보낼 때면 직원들이 “어떻게 이렇게 큰 돈을 모으셨어요?” 하고 깜짝 놀라더군요.

-두 분 모두 1976년 4월에 독일로 가셨으니 40년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났네요. <투머로우>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김: 잔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지금 우리가 이처럼 잘살게 된 데는 앞선 세대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꼭 좀 기억해 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거면 충분하죠.

박: 젊었을 때 탄광에서 고생해서 그런지 저는 지금도 기관지가 안 좋고 약간의 후유증이 있어요. 저야 생계를 이어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지만, 사실 많은 파독 근로자분들이 노후대책이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힘들게 지내고 계세요. 국민들께서 그런 분들에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돌아봐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번 취재를 진행하며 지인들에게 아는 파독 광부나 간호사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고교 동창은 ‘지도교수께서 파독 광부셨다’고 알려왔고, 알고 지내던 어느 직업군인도 어머니가 파독 간호사 출신이란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새삼 떠오른다. 하기야 어디 파독근로자들뿐이겠는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 모두가 오늘의 대한민국을 건설한 숨은 일꾼들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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