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에 앉자 감당할 수 없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정다운 친구들, 고향산천을 떠나 3개월도 아닌 3년이란 긴 세월을 미지의 세계에서 산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지난해 이맘 때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독일로 간 간호사’ 기획전 입구에 적힌 문구다.

1960년대 초,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에 불과했다. 정부는 국가발전의 마스터플랜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며 한국 경제를 일으킬 의욕을 불태웠지만, 세계 경제순위 101위의 소국에 이를 실행할 자본이나 자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이때 활로를 터 준 것이 광부와 간호사 파견이었다. 독일(당시 서독) 정부로부터 1억 4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받는 대가로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1963년 123명으로 구성된 파독 광부 1진이 출국한 이래 1977년까지 독일로 간 광부는 7,968명, 간호사는 1만 1,057명에 이른다.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 대한민국은 그들의 희생과 눈물이 모여 일군 결과물이다.

나라와 가족을 위해 생명을 걸고 청춘을 바치다

50여 년 전인 1960년대 초의 대한민국. 6·25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그때 그 시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암담했다. 하루 밥 세 끼만 먹어도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 될 만큼 국민들은 지독한 가난에 허덕였다.
그러던 1963년의 어느 날, 국내 주요 일간지에 ‘독일에 가서 일할 광부를 뽑는다’는 광고가 일제히 실렸다. 모집인원은 500명이었지만 지원자는 4만 6천 명에 달했다. 당시 30%에 육박하던 실업률을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원자들의 면면도 다양했다. 전직 경찰, 베트남전 참전 용사, 사이클 선수 등 힘깨나 쓸법한 장정들은 물론, 서울대 법대 재학생, 장관 보좌관, 초등학교 교사 같은 ‘엘리트’들도 있었다. 하도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증명서를 위조하는가 하면, 돈을 받고 합격시켜 주겠다는 브로커가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선발조건 중 하나가 체중 61킬로그램 이상이어서 계란 노른자 서른 개와 우유를 마시고 겨우 통과했다’는 어느 파독 광부의 사연은 애교처럼 느껴질 정도다.
서류심사→필기시험→면접을 거쳐 선발된 123명은 마침내 1963년 12월 21일 독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총원 7,968명에 달하는 ‘파독 광부’ 15년 역사의 시작이었다. 당시 파독 광부들의 평균 월급은 650~950마르크(한화 13~19만 원)로, 국내 직장인 평균 여덟 배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돈은 절대로 거저 주는 돈이 아니었다. 램프 없이는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수백 미터 지하에서 생명을 담보로 걸고 먼지와 더위, 차별과 멸시를 견뎌가며 버는 돈이었다.
1965년부터 파견된 파독 간호사들의 생활 또한 결코 만만치 않았다. 간호사로서의 본업 외에 약사, 파출부와 간병인 노릇까지 감당해야 했다. 병실 청소, 이불세탁, 음식 배식, 식사 수발, 환자 목욕시키기, 대소변 치우기, 틀니 닦기 등 온갖 궂은 일이 그들의 몫이 되었다. ‘한국 음식 조금만 먹으면 금방 힘이 날 텐데….’김치가 먹고 싶을 때면 ‘자우어크라우트sauerkraut’라는, 식초에 절인 양배추요리에 고춧가루를 버무려 먹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도 집에 편지 쓸 때면 ‘여기는 환자들도 매너가 좋아서 힘든 줄도 모르겠고, 독일 음식이 워낙 맛있어서 고향 생각도 별로 안 난다’고 썼어. 편지를 쓰다가 감정이 복받쳐 올라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행여 편지지에 떨어져 눈물자국이 남을까 봐 얼마나 조심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나중에 한국 와서 부모님께 여쭤봤더니 거짓말인 줄 다 알고 계시더라고.”이제는 여섯 손주의 할머니가 된 어느 파독 간호사의 말이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갖은 고생을 해가며 조국으로 보낸 돈은 집안의 해묵은 빚을 갚고, 부모님의 병원비와 동생의 학비 및 결혼자금 등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1965년부터 75년까지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총 1억 1,530만 달러에 이른다. 이 기간 우리나라 국민총생산GNP의 2퍼센트에 달하는 금액이다. 광부와 간호사의 독일 파견은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파독 광부들은 물 한 병에 빵 한 덩이로 점심을 때워가며 묵묵히 일했고, 간호사들은 고된 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아 ‘천사’ ‘나이팅게일’ 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1970~80년대 고유가로 중동 경제가 활기를 띠면서, 성실성을 인정받은 한국인 근로자들은 국제무대에 본격적으로 활약하며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일꾼들’이란 찬사를 받았다. 청춘을 바쳐가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조국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들… 지금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기가 한국이야, 독일이야?” 경남 남해군 삼동면의 독일마을로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유럽식 주택 40여 채가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2001년 조성된 독일마을은 60년대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터전을 잡은 곳이다. 이곳의 주택들은 모두 독일식 전통 가옥들로, 독일에서 수입한 재료로 건축되었다. 면적은 약 3만 평에 이르며, 주민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숙박업에 종사하고 있다. 파독전시관이 있어 파독 근로자들이 살아온 자취를 관람할 수 있다.(홈페이지:남해독일마을.com)
“여기가 한국이야, 독일이야?” 경남 남해군 삼동면의 독일마을로 들어서면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유럽식 주택 40여 채가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2001년 조성된 독일마을은 60년대 독일로 간 광부와 간호사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터전을 잡은 곳이다. 이곳의 주택들은 모두 독일식 전통 가옥들로, 독일에서 수입한 재료로 건축되었다. 면적은 약 3만 평에 이르며, 주민들은 관광객을 상대로 숙박업에 종사하고 있다. 파독전시관이 있어 파독 근로자들이 살아온 자취를 관람할 수 있다.(홈페이지:남해독일마을.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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