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마친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렇게 읊조렸다.
“다행히, 지나간 옛일이네요.”
너무 힘들어서 기억을 봉인하고 살았던 독일에서의 삶. 이제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멀리 가버렸겠지 싶어서 옛이야기를 꺼냈다가 그는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우리나라 근대 발전사와 맞물려 있는 그의 인생 이야기 속으로 따라가 본다.

한국나이로 예순여섯인 박선애 씨는 손주가 둘이다. 어린 시절을 묻자, 커다랗게 웃으며 "부잣집 맏딸이었어요. 공부도 잘하는 우등생이었구요. 그런데 그거 다 소용 없어요. 마음이 행복해야 진짜 행복한 거예요."라고 답했다.
한국나이로 예순여섯인 박선애 씨는 손주가 둘이다. 어린 시절을 묻자, 커다랗게 웃으며 "부잣집 맏딸이었어요. 공부도 잘하는 우등생이었구요. 그런데 그거 다 소용 없어요. 마음이 행복해야 진짜 행복한 거예요."라고 답했다.

도넛 장사를 왜 하는지 묻지 않았던 선생님

6.25전쟁으로 국가도, 국민도 모두 헐벗고 가난했던 시절, 박선애씨는 전주 근처 이서라는 동네에서 일백 마지기 논을 가진 부잣집 딸로 태어났다. 한 마지기는 백 평 정도로, 보통 서너 마지기면 한 가족이 일 년 먹을 쌀이 나온다고 한다. 그는 증조할머니까지 4대가 어우러진 대가족 안에서 6남매의 맏이였다. 전주 성심여자중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공부도 잘하고 천성도 씩씩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투자 사업에 문제가 생겼고 결국 부도가 났다. 여기서부터 안정된 궤도에 있던 그의 인생도 아주 조금씩 빗겨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빚 갚는다며 논을 다 팔아 서울로 가셨다.

사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그에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학교만 계속 다닐 수 있다면…. 남은 논뙈기로 가족이 근근이 먹고 살았지만, 돈은 눈 씻고도 구경할 수 없었다. 그때 떠오른 기발한 생각, ‘도넛을 팔자!’ 등교 전, 서둘러 남문시장 가게에 들러 도넛을 도매로 가져다가 학교에서 팔았다. 10원에 4개가 원가인데 10원에 2개를 팔았으니, 어림잡아 차비는 나올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줄 서서 사먹는 친구들 덕분에 도넛은 점심 전에 바닥이 났고 그는 매일 커다란 밥통 두 개에 도넛을 가득 받아다가 신나게 팔았다. 몇 달 뒤, 담임선생님이 그를 교무실로 불렀다. 선생님은 다짜고짜 큰소리부터 내셨다.
“너는 친구들 돈을 우려먹는 아주 나쁜 놈이야. 교실에서 장사를 하다니 말이 돼?”
엉엉 울었다. 그가 서럽게 울었던 이유는 야단맞는 것 때문도 아니고, 돈을 더 이상 못 벌겠다는 걱정 때문도 아니었다. 이런 일을 왜 하는지 한마디도 묻지 않으시는 선생님의 무관심이 서러웠다. 왜 돈을 벌려고 하는지,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겨 힘든 건지 한번만 물어봐주셨다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슴에 섭섭한 응어리를 품고 있진 않았을 텐데…. 선생님에게 받은 이 상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해주었고, 훗날 심리학을 전공해보고 싶은 열망을 만들어주었다.

어린 동생과 가난한 집안을 위해 선택한 길

집안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동생은 장남이니까 대학까지 꼭 가르쳐야 한다. 네가 양보해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공장 아르바이트를 해서라도 학업을 계속하려는 그의 마음에 못을 박았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오빠의 성공을 위해, 남동생의 앞날을 위해 도시나 공장으로 돈 벌러 떠나는 누나와 누이들이 흔한 시절이었다. 그는 아버지 뜻을 따라 취업이 잘된다는 간호원 양성소에 입학했다. 학교 과정을 마칠 즈음에 해외개발공사에서 낸 파독 간호사 모집 신문광고를 봤다. 일자리가 없던 당시에 선진국으로의 해외취업은 사회적 이슈였다. 병원 간호사, 양호교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재수, 삼수 지원자도 생겨났다. 유럽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향후 유학을 꿈꾸는 개인적 동기로 원서를 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뒤로 줄줄이 서 있는 동생들의 학비나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마지못한 길이었다. 몇 년 고생해서 목돈을 마련해보려는 똘똘한 여성들도 지원을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그도 필기시험을 봤다. 경쟁률 200대 1을 뚫고 합격한 그는 7개월 동안 언어와 소양교육을 받았다. 1972년 8월, 막상 떠날 날이 가까워지자, 어머니가 간곡히 말리셨다.
“선애야, 가지 마라. 우리 그냥 덜 먹으면서 같이 살자. 거기 가서 호강하는 것도 아니고 노인환자들 똥바라지 한다고 들었는데, 네가 그 일을 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진다. 제발 가지 마라.”
울며 붙잡으셨지만, 정작 아버지는 ‘가고 안 가고는 네가 결정하라’며 이성적으로 말씀하셨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원하던 학업도 포기하고 이역만리 땅으로 발을 내딛는 딸내미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딸의 눈에 아버지는 맏이의 노고를 당연시하는 것 같아 섭섭했다. 담임선생님 이후 사람에 대해 실망감을 느낀 두 번째 사건이었다. 당시 매스컴은 파독광부와 간호사들을 ‘애국자’ ‘경제 디아스포라’로 보도했고, 그 대열에 선 박선애 씨도 기울어가는 집안을 일으키고 남동생들의 앞날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각오로 비행기에 올랐다.

해외취업을 위해 입학한 성모간호원양성소에서의 기념 사진.
해외취업을 위해 입학한 성모간호원양성소에서의 기념 사진.

‘모니카 박’으로 시작된 백의천사의 삶

그런데 도착한 곳은 독일 땅이 아니었다. 파독 간호사들의 활약이 알려지면서 오스트리아 정부에서도 한국인 간호사를 요청했는데, 그가 거기에 합류된 것이다. 챙겨간 여름 한복을 입은 2백 명의 간호사들은 비엔나 시청 홀에서 마련한 환영식에 참석했다. 오스트리아에 온 최초의 코리안 노동자들이었다. 그는 이제부터 ‘모니카 박’으로 새로운 인생을 펼쳐갔다.

없이 살던 시절에도 그때엔 해외에 한복을 가져가는 것이 나라사랑의 기본이라고 생각했었다.
없이 살던 시절에도 그때엔 해외에 한복을 가져가는 것이 나라사랑의 기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비엔나 시절은 단순했지만, 흰 가운 안에 검은 고통을 숨기고 살았다고 회상한다. 내과 근무를 했는데. 새벽 6시부터 시작해 오후 6시까지 12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다음 날도 아침 6시부터 12시간. 그 다음날은 1시간 줄어든 11시간 근무. 그리고 다음 날은 저녁 6시부터 아침 6시까지 12시간 야간근무에 들어갔다. 주된 업무는 투약과 주사, 검사지만 환자 식사, 침상정리, 환자 목욕 등 간병사의 일도 그곳에선 간호사의 몫이었다. 언어가 서투르니 처음엔 ‘잡일’부터 도맡아야 했다. 특히 대소변 받기와 시체 처리는 앳된 스무 살에게 가혹한, 인생의 종착역 같았다.
크리스마스 때로 기억하는데 하룻밤에 환자가 여덟 명이 죽어나가는 날이 있었다. 보통 간호사 둘이 시신을 지하의 영안실로 옮기는데 그날은 일손이 부족해 혼자 가야 했다. 갈 때는 괜찮았는데, 시신을 안치소에 넣고 덜컹이는 빈 침대를 끌고 돌아 나올 때면 누가 등 뒤에서 당기는 것 같아 모골이 송연해졌다.

밤근무 중이던 1973년 어느 날, 동료 간호사와 함게 촬영했다.
밤근무 중이던 1973년 어느 날, 동료 간호사와 함게 촬영했다.

괴로운 또 하나의 업무는 환자들의 대소변 치우는 일이었다. 환자들 곁을 지나던 그에게 누워 있던 누군가가 ‘간호사, 변기 줘.’ 외치면, 멀쩡히 있던 옆 환자가 ‘나도’ 하는 것이었다. 소변은 전염되는 것인지, 오줌 누는 소리가 들리면 다들 ‘나도’ ‘나도’ 해서 정신이 없었다. 한번은 환자들에게 거둔 소변통을 차곡차곡 쌓아서 들고 나가다가 와르르 무너져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흩어진 대소변을 손으로 닦아내면서 눈물 섞인 땀이 그의 얼굴에 흘렀다. 비위가 상해서 토하고 또 토하고… 나중엔 헛구역질이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애국자 간호사’들은 가족에게 말 못할 고통으로 시달렸다. 이름만 백의천사인 그들에게 피하고 싶은 때가 또 있으니 식사시간이었다. 한국 사람이 밥상 위에서 나이프, 포크질을 해봤겠는가? 구내식당에 가면 옆 테이블을 슬쩍 보면서 빵을 썰어 입에 넣는데 포크를 쥔 왼손이 계속 떨렸다. 어색하고 불편해서 기숙사방에 앉아 눈물의 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 당연히 생각은 고향 집으로 이어졌고 그리움에 또 울었다. 일이 힘들어지니까 향수병도 같이 커졌다. 동료들 중에 우울증을 앓는다는 소식이 하나둘 들려왔다.

1972년 12월 비엔나 쉔부룬궁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다.
1972년 12월 비엔나 쉔부룬궁 앞에서 찍은 단체 사진이다.

드디어 받은 첫 월급 3,620실링. 당시 그의 월급은 한국에서 만져보기 힘든 큰돈이었다. 다른 간호사들은 여행도 가고 쇼핑도 하지만, 그는 굶어가며 더 모았고 보너스 달엔 5,000실링을 고스란히 집으로 보냈다. 송금한 금액을 나중에 합산해 보니 1만 유로, 지금 환율로 1억 3천만 원이나 되었다고 한다.
돈을 보내면 한 달 뒤에나 아버지 통장으로 입금되었고 거기서 보름이 더 지나야 한국에서 부친 편지가 도착했는데, ‘네 돈으로 빚을 좀 갚았다. 고맙다.’ 주로 그런 내용이었다. 비싼 국제전화는 생각도 못하고, 우체통만 바라보며 고향소식을 기다리는 것이 그에게 소소한 기쁨이었다. 그가 번 돈이 가족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힘든 고생도 잊게 해주었다.
죽고 싶다는 말에 정신과로 보낸 간호원장
하지만, 월급을 모조리 집으로 보내고 나면 모래에 뿌린 물처럼 허무하기도 했다. 밥맛을 잃고 불면 증세까지 보이던 때가 있었는데, 밤 근무를 하던 그는 불현듯 살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근무하던 간호사 언니에게 독약장 열쇠를 달라고 했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
“나 저 독약 먹고 가버리려고 그래.”
“가긴 어딜 가? 뭐, 네가 죽는다고? 죽어서 뭐하려고?”
“죽으면 마음이 편해질 거야.”
“네가 죽으면 엄마가 통곡을 하고, 네 동생들이 울고불고 난리일 텐데….”
그런 말을 듣고도 눈물이 핑 돌지 않았다. ‘내가 죽어도 가족들은 살아갈 거야.’ 그는 무감각해진 빈 가슴으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간호사 언니는 열쇠를 감추고 그를 밤새 다독거렸다.
아침에 근무를 끝내고 숙소로 가서 자는데 사감선생이 흔들어 깨우면서 간호원장이 부른다고 했다. 간호사들에게 간호원장은 제일 무서운 존재였기에, 무조건 달려갔다. 간호원장이 그를 힐끗 보더니 손가락질을 하면서 물었다.“어젯밤에 당신이 죽는다고 했어요, 안했어요?”
“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조국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나를 보내야 하나요?”
“죽는다고 했으니까요.”
의학적 관점에서 자살시도는 심각한 질병이다. 한국에서는 죽는다고 말하는 게 여러 의미를 갖지만, 유럽에서의 그 말은 정신질환자임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돈벌러 떠난 사람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가족들은 다시 굶고, 동생들은 학교를 중단하고… 상상만 해도 가혹했다. 간호원장 앞에서 그는 돌부처한테 빌듯이 싹싹 손을 비비며 잘못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병동 수간호사를 불러 정신과 박사님께 데려다 주라고 했다. 또 다른 산을 만난 그는 두려웠다. 박사님의 첫 질문은 의외였다.
“댄스홀에 춤추러 다니나?”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는 손사래를 쳤다.
“돈 벌어서 뭐 해?”
“집에 보내요.”
“그러지 말고 춤추러 가봐. 젊은 사람이 젊은이답게 살아야지.”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는 그에게 박사님의 처방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렇게 모은 돈은 한 가정을 살리고 한 국가의 성장에 기여를 했다. 당시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우리나라 경제성장에 65년엔 12%, 67년엔 15% 이상을 기여했다는 통계가 있다. 그들이 보낸 돈은 국내 소비를 부추기는 동시에 저축을 늘렸으며, 국가 차원에서는 외환 보유고를 늘려 새로운 투자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인력 수출은 고용 증대와 내수 진작, 투자 활성화를 가져왔으며 국가 경쟁력도 높일 수 있었다.

독일인과의 사랑 그리고 결혼

비엔나에서 2년 반을 보낸 그는 한국인이 없는 독일의 한 도시로 가서 병원에 취직했다. 그런데 입원해 있던 동갑내기 독일인 환자가 그에게 관심을 보이더니, 퇴원 후에도 계속 찾아왔다. 한번은 휴가차 비엔나에 간 그를 만나려고 독일 청년은 혼자 자동차를 몰고 800킬로미터를 달려 왔다. 남자는 그에게 청혼을 했고, ‘이런 사람이라면’ 싶어서 사진과 함께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몇 달 뒤 부모님으로부터 승낙한다는 답장이 날아왔다. 국제결혼이 호락호락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다. 게다가 독일 경제가 침체기로 접어들면서 외국인 간호사들을 자국으로 돌려보내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었기에, 잔류하려면 결혼 외에 별다른 길이 없었다.

그는 남자에게 두 가지 결혼의 조건을 내걸었다. ‘우리나라는 이혼이라는 게 없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영원히 살지 않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갈 사람이다.’ 그 말에 남자는 하늘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맹세했다. 부모님이 이혼을 했기 때문에 본인도 이혼은 싫다고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남자의 말을 믿은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고 한다.
1976년에 두 사람은 식을 올렸고 아내는 워킹우먼으로 일하면서 남편 출세시키는 일에 온통 전념했다. 대학 졸업장을 따게 했고, 세계적인 기업 지멘스에 취직할 수 있도록 도왔다. 입사 후에도 남편의 자기계발을 위해 회사의 모든 교육에 참석하라고 종용했다. 동료들은 남편에게 ‘그거 배워 뭐하느냐’며 비아냥거렸지만, 그 덕분에 남편은 고속 승진을 해서 마흔 살에 지멘스 부장이 되었다.

가족을 소비자로 바라보는 정감 없는 남편

첫딸을 기르면서 그는 친구가 생긴 것처럼 좋았다고 한다.(오른쪽 사진) 어느덧 2남1녀의 어머니가 된 그가 꽃들이 활짝 핀 과수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첫딸을 기르면서 그는 친구가 생긴 것처럼 좋았다고 한다.(오른쪽 사진) 어느덧 2남1녀의 어머니가 된 그가 꽃들이 활짝 핀 과수원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느덧 그도 2남1녀의 어머니가 되었고 독일 국적도 얻었다. 하루는 한국의 창원에 지멘스 지사장 자리가 났다며 남편이 답사를 간다고 했다. 꿈이 이뤄질 것 같아 들떴다. 그러나 다녀온 남편의 반응은 싸늘했다. 아직 한국은 더럽고 시끄럽고 치안도 위험하다는 게 이유였다. ‘결국 독일에서 뼈를 묻어야 하나?’ 상실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는 못다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병원을 그만두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제야 적성에 맞는 일을 발견한 듯, 그는 아주 열심히 공부를 했다. 어느 날 남편이 이런, 기막힌 말을 아내에게 했다.

“당신은 우리 집에서 한 달에 1,750마르크를 쓰는 소비자다. 당신 집세가 얼마, 쓰는 전기료는 얼마, 또 학비가 얼마, 휘발유비는 얼마, 식비가 얼마….”
통계를 들이대는 남편을 향해 분노가 치밀었지만, 뒤늦게 신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참을 수 있었다. 공부하고 배워가는 행복이 금방 끝나지 않도록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3학년 때 해외선교라는 과목을 들었는데 6주 실습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한국을 택했고, 전주 근처 소양이라는 시골로 갔다. 실습을 마치고 집에 오니, 뜻밖의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이다. 아내가 고아들을 돌보는 동안 남편은 스무 살 어린 젊은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았다. 평소 내성적인 남편은 쾰른 대성당 대문 같았다. 마음이 잠겨 있어서 그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마음이 통하지 않는 부부, 오래 갈 수 없었다. 아내와 세 자녀를 외면한 채 남편은 젊은 여자를 택했고, 10여 년 지루한 소송을 거쳐 결국 이혼을 했다. 남편이 떠난 것을 그는 지금도 잘 이해를 못한다. 왜 느닷없이 갔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어떻게 가족이 떠날 수 있어요? 떠나지 않는 게 가족 아니에요? 남편은 가족인데… 이해는 못하지만 그냥 받아들이려고 해요. 내가 아버지에게 받은 교육이 독일에서는 하나도 써먹을 수 없었다고 아버지께 말했어요. 나를 반대로 키웠다고도 했어요.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여자가 다 희생하고 남자를 섬기라고만 가르치니 독일인 남편은 얼마나 편하고 좋았겠어요? 지금 같으면 그렇게 안할 거예요.”
재독교포 사회에서 한때 잉꼬부부로 통했던 이들은 결혼 24년차에 빈 둥우리만 남기고 서로 남남이 되었다.

신기루를 따라간 인생을 대체할 새 꿈

제자가 겪는 어려움에 관심조차 없었던 담임선생님, 딸이 마주할 고생을 못본 척했던 아버지, 부하직원의 고통을 업무적으로만 해결했던 간호원장, 그리고 가장 믿었건만 가장 비정하게 등을 돌린 남편…. 돌이켜보면 그녀가 바라던 신기루들이었다.
‘저기 가면 행복이 있고 편히 쉴 수 있을 거야’ 하며 따라가면 좀 더 먼 곳에 가 있고, 또 따라가면 더 먼 곳으로 가버리는 신기루…. 그에게 인생의 쓴맛을 가르쳐준 ‘신기루 같은 그들’ 덕분에 박선애 씨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파고들수록 미궁에 빠지는 심리학 공부가 아니라, 창조주가 만드신 마음의 세계를 배우고 싶었다.
최근에 아버지 병환으로 한국을 찾은 그가 이참에 존경하는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냥 인사를 드리려고 만났는데, 그 목사님은 박선애 씨의 노후를 차분히 생각하시더니 학생들 돌보는 일을 같이 하며 여생을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친정아버지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을 목사님에게서 들으며 그는 속으로 오열을 터뜨렸다. 이제야 진짜 고향, 진짜 친정에 온 것 같았다. 스무살 때의 열정을 환갑 지난 나이에 재현할 것을 상상하니, 박선애 씨는 벌써 두둥실 창공을 나는 기분이다. 마음이 통하는 고국에 오니 좋다. 그래서 그는 행복하다.

 

힘든 현실은 인생 끝이 아니라 인생 시작이다.
실패는 새로운 용기를 준다.
그래서 지난 과거는 힘들었으나
지금에 와서 주님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
나의 과거는 이제 어둠에 잠기지 않고
빛 가운데서 힘든 곳들을 비추어준다.
주 없는 삶 속의 불행이 주 안에서 행복을 낳았다.

(박선애 씨의 노트에서 발견한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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