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vely AFRICA (5)

2013년 2월, 우다겸 씨는 시원한 바람이 있는 케냐 나이로비 공항에서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도시 몸바사로 이동했다. 다리를 지나 몸바사 섬으로 들어갈수록 습하게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그는 앞으로 봉사하게 될 1년이 가슴 두근거리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 작년에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 12기로 케냐에 다녀온 우다겸(동아대학교 산업디자인학 3)
▲ 작년에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 12기로 케냐에 다녀온 우다겸(동아대학교 산업디자인학 3)


“3~4kg 정도의 쓰레기 더미 옆에서 사람들이 소를 잡아 먹고 있는 모습을 봤어요. 그리고 항구나 호텔 관광지 근처에서 마약을 파는 사람들과 옷을 입은 듯 안 입은 듯하게 입은 여자들이 다니는 광경을 보면서 이런 환경에서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자라야 하는 이곳의 아이들이 너무 불쌍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나병환자들이 밀집해 사는 곳으로 가서 각종 문화공연을 열어주고 한국어를 가르쳐주면서 아이들에게 밝은 미래를 선물해주려고 했어요.”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학생캠프, 대학에 올라가는 학생들을 위한 유스캠프, 대학생들을 위한 월드캠프를 주최하기 위해 우다겸을 비롯한 몇몇 단원들이 기업 후원을 받으러 다녔다. 기업 사람들은 ‘무중구(하얀 사람)가 여기 와서 뭘 하고 있냐’고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히치하이킹을 여섯 번 해서 찾아온 그의 열정을 무시하지 못했다. 게다가 점심 값을 아끼기 위해 직접 싸온 그의 도시락이 죽밥 위에 당근, 양파, 토마토를 볶아 만든 소스를 올린 아프리카의 일상 음식인 것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다. 20대 젊은이가 한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을 희생하고 아프리카까지 와서 고생하며 봉사한다는 사실에 감동 받고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사랑받고 싶었던 소녀
해외봉사 오기 전 우다겸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평범하게 살지 못한 대학생이었다. 부모님이 바쁜 은행원이었기 때문에 할머니 손에 컸던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 어딨니?’ 하고 묻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가끔씩 전화하면 통화음이 국제전화로 넘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학교에서 남자 친구 한 명이 건물 4층에서 밀어버리는 바람에 떨어져 크게 다치고 말았다. 병원에서 당장 수술을 해야 했지만 수술 동의서에 서명할 보호자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시간이 흐를 수록 긴박한 상황이 이어졌고 결국 교장선생님이 서명해주어서 수술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어린 소녀 우다겸은 일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은 부모님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썼다고 한다. 부모님이 권하는 옷과 음식은 무조건 입고 먹으려고 했고 대학을 갈 때도 디자인을 전공하길 바라는 부모님 때문에 순수미술을 포기하고 진학했다고 한다.
사랑받으려면 상대방보다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갇혔던 그는 혼자 지내는 대학생활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가면 모르는 사람과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휴대폰에 새로운 전화번호가 저장되는 것을 보고 친구를 사귀기 위해 술집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자신이 대범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았고 친구들도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 같아서 매일 같이 술을 마셨고 하루에 새로운 전화번호가 10개 이상씩 생겼다. 그런데 어느 날 술을 마시면서 그대로 기절해버렸고 눈을 떠서 보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의사는 그가 거의 알코올중독 수준까지 갔다고 경고하며 반드시 술을 끊으라고 말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술을 안 마시면 자신감을 잃고 친구도 잃고 다시 혼자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집에 가서 부모님 앞에서는 공부를 착실히 하는 학생처럼 연기했다. 점차 이중인격으로 변해가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고 친구라고 저장해둔 전화번호는 많은데 고민을 상담할 친구가 없는 것이 쓸쓸했다. 지금까지 투자한 시간과 돈에 비해서 너무나 처량한 자신의 상황 앞에서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그가 발견한 것이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의 홍보 문구인 ‘내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였다.

 
 

그런 것은 친구가 아니야
‘돈을 써보고 술도 같이 마셔줬지만 얻지 못했던 친구의 마음을 내 젊음과 시간을 팔면 정말 살 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커졌고 결국 그는 봉사단원으로 아프리카 케냐에 갔다. 그의 짐 가방은 다른 단원들에 비해서 무지 컸는데 사인펜, 색종이, 가위, 과자, 머리끈 ... 등 아프리카 친구들에게 선물해주고 친해지기 위해 뭐든지 가져갔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오는 친구는 없었다.
“2개월 후 모든 물건이 동이 나자 마음이 조급해졌어요. 생활비를 더 받기 위해 집에 연락을 했고 그 돈으로 무엇이든 사서 친구들 마음을 끌고 싶었죠. 그런데 한 현지인 친구가 저에게 와서 ‘나 너 싫어. 우리를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로 취급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것은 친구가 아니야’라고 말하는데, 처음으로 제가 살아온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을 느꼈어요. 친구가 500원어치 사주면 나는 1,000원어치 사줄 때 그 친구가 나를 500원만큼 좋아해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순수한 사귐이 아니라 비즈니스 관계였어요.
그것을 알고 나니 너무 속상했고 제 인생이 너무 허무하고 바보 같았어요.”
그때부터 케냐 사람들에게 그가 가장 하기 부끄러웠던 말을 했다.
“친구해도 돼?”
친구를 어떻게 만들어야 될지 몰라서 질문하는 그의 말 한마디에 케냐 사람들은 친구를 사귀고 싶어 하는 그의 진심을 보았다. 그때서야 그에게 말을 걸어주고 살갑게 다가오는 친구들을 보고 그가 발견한 사실 하나는 ‘친구들 마음을 얻으려면 먼저 내 마음을 보여줘야 된다’는 것이다.

인생이 닮은 친구를 만나
투마이니라는 케냐인 친구는 깡마른 몸매에 예쁜 눈망울을 가졌으며 만날 때 마다 꼭 끌어안으면서 ‘친구야, 보고 싶었어’라고 인사했다. 어느날 그는 투마이니가 자신의 뒤에서 안 좋은 말을 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너무 속상해서 왜 그랬는지 직접 물었고 투마이니는 무척 당황해서 “네가 내 옛날 모습과 같아서 싫은 감정이 많았어. 정말 미안해”라고 사과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투마이니의 이야기에 그는 무척 공감했고 투마이니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친구인 것을 알았다. 투마이니는 어렸을 때 친구를 사귀지 못해서 학교에 다니지 않았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던 것. 또한 아버지가 세 번이나 바뀌어서 가족문제로 힘들 때가 많았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극복해내고 지금은 밝게 살고 있었다.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 우리는 단짝 친구가 되어 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됐어요. 제가 예전처럼 실수하려고 하면 투마이니가 바로 옆에서 지적해줬고요. 투마이니 덕분에 사람들과의 관계도 안정됐고 그동안 부모님에게 갖고 있었던 슬픔도 조금씩 풀렸어요. 투마이니의 부모님보다는 한국의 우리 부모님이 가족을 위해 더 애쓰시고 노력하셨지만 저는 부모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어요. 단지 사랑을 덜 받았다는 생각에 더 말을 잘 듣고 예뻐 보이려고 했지만 부모님은 저를 잘 모르셨던 것 같아요. 사람의 마음과 관심을 얻으려면 제 마음을 먼저 보여야 했다는 것을 아프리카에 가서야 알았어요.”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
케냐에서 유스캠프와 월드캠프를 열기 위해 후원을 받으러 기업들을 찾아다닐 때 그는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태도로,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을 가르쳐준 아프리카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제가 케냐에 와서 학생들에게 컴퓨터 타자 치는 법을 가르치고 마우스 사용법을 알려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어요. 월드캠프 아카데미에서도 컴퓨터 아카데미를 열고 싶어요.”
그의 말에 기업 사람들뿐 아니라 히치하이킹으로 얻어 탄 차 주인도 돈을 보내주겠다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어주기까지 했다. 무슬림이었던 차 주인이 “내 마음을 움직인 것은 너를 이곳으로 보내준 신이다. 나는 너를 도우려는 것이 아니다. 네가 여는 캠프를 통해 몸바사의 희망 없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 말은 오히려 봉사단원인 우다겸의 마음에 감동과 힘을 주었다. 깔끔한 정장과 매끄럽고 논리적인 영어, 수준 높은 프레젠테이션 실력만이 사회에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과의 감동이며, 그 감동은 사랑하는 마음을 진실하게 표현할 때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전까지는 늘 사람들 앞에서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혼자 다니는 것을 좋아했던 그가 어느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에 자연스러워졌고 사람들의 진심을 이끌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투마이니를 비롯한 케냐 친구들과도 가까워지면서 처음으로 ‘친구들과 함께했던 추억’이란 것도 만들었다.

투마이니는 희망이라는 뜻
1년 봉사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그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동안 케냐 친구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적이 많았고 자신은 친구들의 사랑을 하염없이 받기만 했는데 이렇게 돌아가자니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이다.
“하루 종일 보이지 않던 투마이니가 온몸이 땀으로 젖어서 급하게 뛰어서 들어오더니 ‘다겸아, 너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해.’ 하고 가죽 샌들 한 켤레를 꺼내놨어요. 그때 투마이니의 다 해어진 샌들과 온통 먼지와 상처투성이인 발이 보였어요. 저에게 선물하려고 샌들을 산 다음 차비가 없어서 그 먼길을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는 투마이니를 끌어안고 한참동안 울었어요. 눈물 때문에 친구들에게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어요.”

▲ 탄자니아 국경근처 룽가룽가 마을에서 아이들과 함께.이 주변에는 마약 원재료를 생산하는 농장이 많다.
▲ 탄자니아 국경근처 룽가룽가 마을에서 아이들과 함께.이 주변에는 마약 원재료를 생산하는 농장이 많다.

투마이니는 아프리카 스와힐리어로 ‘희망’이란 뜻이다. 사람의 마음을 사고 싶어서 갔던 케냐에서 투마이니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그에게 사랑하는 마음, 함께했던 추억,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희망을 선물했다. 그는 아직도 케냐 친구들에게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예전과 다른 인생을 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친구들에게 다 말하지 못했던 고마움과 아쉬움, 그리고 나날이 커가는 그리움들이 그의 가슴 속에 다양한 말들로 쌓이고 있다.
“제가 전공하고 있는 디자인은 혼자만의 영감으로 일할 수 있지만 스티브 잡스처럼 다양한 아이디어를 융합시켜 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 아이디어 디렉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해요. 저는 그 방법을 아프리카 케냐에서 배웠기 때문에 또 다시 아프리카에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고 싶어요. 그래서 아직 정확한 꿈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프리카를 생각하며 공부하는 시간이 즐거워요.”
 
인물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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