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Lovely AFRICA (1)

중간고사를 갓 마치고 서울과 부산에 사는 대학생들이 대학로의 한 카페에 모였다. 그들은 지난 한 해 동안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돌아온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들로, 아프리카를 그리워하는 그들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하다. 기자가 던진 몇 마디 질문에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간추리고 간추려 보았다. 

▲ 왼쪽부터 우다겸(동아대학교 산업디자인학 3), 김한솔(경복대학교 간호학 2), 김광수(부산외국어대학교 사회복지학 3), 김송이(단국대학교 화학공학 3) 이들은 작년 한 해동안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아프리카에 다녀왔다.
▲ 왼쪽부터 우다겸(동아대학교 산업디자인학 3), 김한솔(경복대학교 간호학 2), 김광수(부산외국어대학교 사회복지학 3), 김송이(단국대학교 화학공학 3) 이들은 작년 한 해동안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아프리카에 다녀왔다.
전 세계 다양한 국가 중에 특히 아프리카로 해외봉사를 선택한 솔직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한솔 고등학생 때 스스로를 ‘사회에서 쓸모없는 인간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제 자신을 비관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월드비전에서 주최한 ‘기아체험 24시간’에 참여했어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프리카 난민촌에 사는 아이들에 대한 영상과 사진들을 보면서 많이 울었어요. ‘나는 먹을 것이 많고 편안한 집에 살면서도 죽고 싶어 하는데 저 아이들은 살고 싶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야 하는구나. 저 아이들은 살고 싶겠구나....’ 하고 무척 가슴이 아팠어요. 이런 나일지라도 아프리카에 가면 무엇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아프리카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막상 기아체험을 해보니 식량이 부족하고 의료 환경도 열악한 것이 보였어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니 마음이 찡했죠. 그래서 당시 문과였던 제가 지원가능했던 의료계열인 간호학과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꼭 아프리카로 의료봉사 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학교를 다녔고 굿뉴스코 봉사단을 알게 돼서 모잠비크를 지원했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딸이 아프리카 가는 것에 무척 걱정하고 반대하셔서 “버스 사고가 많이 난다고 버스를 안 탈 수 있어요? 홍수가 무섭다고 물로 세수 안 할 수 없잖아요?” 하고 설득했어요. 아프리카 봉사는 제 인생에 아주 필수적인 것이라고요. 끊임없는 설득을 통해 부모님이 겨우 승낙해주셨고 저도 아프리카에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도 극복할 수 있었어요.

 
 

김광수 저는 축구를 좋아해서 영국에 가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아프리카로 봉사 다녀온 선배들의 체험담을 듣고 아프리카에서 경험하고 온 이야기들이 무척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아프리카 가서 봉사하면 고생도 심하게 하지만 그만큼 얻는 것도 많다는 것을 알고는 아프리카로 가기로 했어요. 마침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이 영어권 국가이며 유럽풍 문화가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내가 찾던 곳이 여기구나!’ 하고 남아공을 지원했죠.

김송이 부끄럽게도 저는 봉사하고 싶어서 해외봉사를 지원한 것이 아니었어요. 외국에 한번 나가서 영어를 배워보고 싶었던 바람도 컸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에 있는 삶이 너무 싫어서 도망치듯이 지원했어요. 집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기고 아버지가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한다는 오해 때문에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차에, 굿뉴스코 해외봉사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거다!’ 하고 지원했거든요. 굉장히 적극적으로 봉사 갈 나라에 대해서 탐색하고 있는데 한 선배가 짐바브웨에 대해서 지폐 하나를 들고 설명하는 것을 봤어요. 그것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연말 선물로 유행하던 짐바브웨의 100조 달러짜리 수표였어요. 빵 하나를 사기 위해 돈을 수레 하나 가득 싣고 와도 사지 못한다는 짐바브웨의 경제 상황에 호기심이 생겼고 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어요. 게다가 다른 나라보다는 치안이 안전하다는 사실을 듣고 짐바브웨로 결정했어요.

우다겸 저는 제 성격이 열정적이지 않고 자신감이 없는 편이라고 생각해서 저와 반대되는 성격의 사람들이 사는 남미 국가로 가고 싶었어요. 낙천적이고 열정적인 남미 사람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저도 조금씩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거든요. 선배들이 저에게 아프리카에 갈 것을 권했어요. 아프리카에 가면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외모콤플렉스도 심했는데 아프리카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프리카로 지원국을 바꿨죠. 또한 아프리카에서 봉사한다는 것 자체가 남들이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니, 그만큼 열정적일 수 있다고 기대했죠.

막상 아프리카에 도착하고 나서 아프리카에 대해 인상 깊은 점과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김광수  남아공은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백인들의 비율이 높고 심지어 남아공에서 태어나서 자란 백인들도 있어요. 그리고 ‘컬러’라고 부르는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 인도계 사람들 등 여러 민족이 같이 살아가는 다인종 국가였어요. 또한 대륙 남쪽 끝에 위치하기 때문에 4계절이 존재하고 겨울은 우리나라처럼 추운 날씨가 아니더라도 보일러와 난방 시설이 없기 때문에 작은 추위를 그냥 견뎌야 했죠. 이불을 몇 겹이나 돌돌 말고 잘 정도였죠.  아프리카 길거리에서는 자동차와 야생동물들이 같이 다닐 거라고 상상했는데 실제로 고급 승용차인 벤츠나 아우디, BMW와 같은 차들만 쉽게 볼 수 있더라고요. 처음 남아공에 도착했을 때는 아프리카인지 유럽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아름답고 깔끔한 요하네스버그 공항 때문에 무척 놀랐어요.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도 두산, 삼성과 같은 한국 회사들의 광고판을 보면서 아프리카에 왔다고 느끼지 못했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드넓은 초원이 나타났을 때에야 ‘내가 지금 아프리카에 있구나’라고 느꼈어요. 그러나 범죄율이 특히 높은 나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범죄를 예방하려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특히 아줌마들의 경우 휴대폰을 가슴속에 넣어두고 다니는데 그 이유가 주머니에 넣어두면 훔쳐가기 쉬우니까 제일 안전한 곳에 넣어두는 거라고 해요.

 김한솔 모잠비크는 남아공 공항에 내려서 이틀 머물다가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들어갔어요. 남아공의 발전된 도시를 보다가 국경을 넘는 순간 산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모두 완만한 언덕으로 이루어진 초원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한국에서는 높은 건물들 때문에 하늘이 무척 좁게 느껴졌는데 모잠비크 하늘은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정말 넓고 새파랬거든요. 지나가면서 보이는 생소한 나무들과 짚과 시멘트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을 보면서 제가 드디어 아프리카에 왔음을 실감했어요. 처음으로 모잠비크 길거리에 나갔을 때는 어떤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어요. ‘경찰을 불러야 하나?’ 안절부절 못했는데 알고 보니 바닥에 누워서 자고 있던 것이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은 길을 걷다가 힘이 들거나 졸리면 길가 아무데나 누워서 잔다고 해요. 한국이었으면 사람들 눈치가 보이기도 하고 흙바닥에서 자는 것을 비위생적으로 생각할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서 자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무척이나 편해보였어요. 그래서 저희도 가끔 너무 지치거나 힘들면 그늘에 가서 앉거나 살짝 눕기도 했는데, 한국에 와서는 그럴 수 없으니 그때의 시간이 그립기도 해요.

김송이 짐바브웨는 남부아프리카 중에서도 기후가 좋기로 유명한 나라에요. 여름엔 햇볕이 굉장히 세게 내리쬐지만 한국처럼 습기가 많지 않아서 그다지 후덥지근한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영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백인들이 짐바브웨를 거주지역으로 삼았을 정도인데요, 영국인들이 계획적으로 발전시킨 수도의 건축물들은 몇 십 년이 지나 낙후되긴 했지만 여전히 세련되고 멋있더라고요. 경제상황은 2008년도에 2억%까지 돌파했던 인플레이션으로 바닥을 친 후 최근 화폐개혁으로 미국 달러를 사용하면서 안정이 되고 있는 중이었어요. 하지만 실업률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대학생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들도 남아공으로 건너가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요. 남아공에서 외국인인 그들은 주로 낮은 임금의 궂은 일을 하게 되는 실정이에요. 저랑 친했던 어느 친구도 남아공에서 취직하고 매우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 무척 안타깝더라고요. 월드캠프 후원을 받으면서 만났던 고속버스 회사 사장님은 남아공과 어떻게든 연계해서 짐바브웨 사람들을 버스기사로 채용하고 계속해서 짐바브웨 청년들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계셨어요.

우다겸 케냐의 가난한 사람들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비참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고 반면에 부자들은 상상 이상으로 잘 살았어요. 우리가 살던 집의 이웃은 마약 사업자였는데 하루에 한두 번씩 헬리콥터를 자가용으로 타고 다녔어요. 그런데 우리 집에서 5분정도만 걸어가면 흙길 위에 바나나 잎이나 수숫잎을 엮어서 지은 1평도 채 안 되는 집에서 5명 이상 잠을 자고 왕복 1시간이 걸리는 곳에 가서 물을 받아와서 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빈부격차가 큰 아프리카가 더 가난하고 좋지 않은 이미지의 나라로 비쳐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들은 가난함에 불만을 갖고 있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 안에서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비록 돈을 적게 벌지만 돈 버는 것에 인생을 다 걸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앉아서 조그마한 북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어요. 숟가락이 없으면 손으로 먹고 전등이 없으면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을 즐기는 등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진 그들의 순수함이 부러웠어요. 한국에서 훨씬 풍족하게 살지만 늘 불만투성이였던 제 삶을 많이 반성할 수 있었어요.

 
 

아프리카 봉사단원들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미지의 아프리카가 아닌 때론 어려움 속에 행복에 젖은 낮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살아가는 곳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부패한 관료들로 인해 아프리카의 발전이 더디지만 민간 외교까지 하고 온 여러분들에게 아프리카는 봉사 후 느끼는 보람 외에도 얻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김광수 그곳에서 1년 동안 영국은 아예 잊고 살았어요. 딥슬룻이라는 흑인 마을에 가서 무료 아카데미를 열고 고등학교에 가서 강연과 공연을 하고 마약갱생원에 가서 마약중독자들을 상담했어요. 9월에는 월드캠프를 개최하고 10월부터는 주변 나라에 갔다가 무전여행도 다녀왔어요. 정말 정신없이 남아공 봉사활동에 빠져서 지냈어요. 총 6명의 단원들 중 제가 두 번째 막내였지만 주로 행사와 업무 진행을 맡아서 하다 보니 저보다 나이 많은 동료들에게 불만이 많았어요. 그런데 처음 두 달 간 가졌던 ‘밤 9시의 마음 터놓고 대화하는 시간’에서 그날 하루 있었던 제 불만을 다 토해내고 대화를 나누었어요. 한국 같았으면 친구가 마음 상하고 나를 상대해주지 않을까봐 쉽게 말하지 못했던 속마음들을 남아공에서는 표현할 수 있었고, 먼 이국 땅에서 봉사하면서 만나는 한계 속에서 동료들끼리 속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한국은 선진국이지만 높은 건물밖에 안 보이는 도시 안에서 사람들과 진솔하게 대화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남아공에서는 동서남북 어딜 봐도 지평선이 보이는 곳에 살면서 아프리카 사람들과 가식 없이 주고받았던 말들 속에서 제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꼈어요. 비록 물이 안 나오거나 3일 씩 정전이 계속되기도 하고 밤에 배고파도 간식 사러 갈 편의점도 없지만 저는 그곳이 무척 그립거든요. 그래서 지금 영어공부를 다시 제대로 시작했고요, 군대 다녀와서 다시 남아공의 친구들을 보러 가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김한솔 모잠비크는 주변 남부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서 가난하고 의료 환경도 열악해요. 길거리에서 팔다리가 잘려서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사탕수수가 재배되는 나라에서 달게 먹다보니 당뇨병 때문에 손발이 썩어서 자르고 다니더라고요. 기본적인 의료지식이 부족해서 불우하게 사는 사람들이 무척 안타까웠어요. 반면에 제가 무슨 일을 하든 고마워하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제 마음이 무척 행복해졌어요. 한국에서는 뭐든지 잘 못하는 어린 여대생이었지만 모잠비크에서는 저보다 덩치가 3배나 큰 흑인 사람들이 웃으면서 다가와서 저의 작은 봉사에도 고마워했어요. 그들이 무척 순수해보였고 모잠비크에 꼭 다시 오고 싶었어요. 그래서 지금 제가 가장 열중하고 있는 것은 간호학과 수업이에요. 주사실습도 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언젠가 다시 갈 아프리카를 생각하며 공부하고 있고요, 앞으로 의료봉사도 가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간호교육도 하고 싶어요. 그리고 항상 비관적이었던 제 마인드도 180도 바뀌어서 이젠 여러 가지 대학생 기획단과 행사 운영에 지원하여 뭐든 도전하고 경험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김송이 짐바브웨에서 봉사하면서 히치하이킹, 캠프 준비, 후원 요청 등 이제까지 제가 해보지 못했던 일들을 하면서 한계를 많이 경험했어요. 너무 힘들고 지쳐서 한국 집에 전화를 걸어서 돌아가고 싶다고 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와 솔직한 대화를 한 것이 오해가 풀리는 계기가 됐어요. 저를 무척 걱정하시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들었거든요. 아버지는 항상 자식들에게 관심 없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짐바브웨에서 지내는 이야기들을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들어주시면서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오라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좁게 생각하고 제 위주로 생각하고 오해하는 일이 많은지 알게 됐어요. 아버지에 대한 오해가 풀린 후 그동안 어려웠던 일들에 대해서도 제가 긍정적인 마음을 갖느냐, 비관적인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확실히 달라진다는 것도 배웠어요. 짐바브웨 봉사 1년 동안 무엇이든 포기 잘하고 도망가기 좋아하는 제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죠. 한국에 돌아와서는 공부할 것이 무지 많아졌어요. 영어를 회화 위주로 더 공부하기 시작했고 아프리카의 경제, 문화, 환경 등에 굉장히 관심이 많이 생겨서 전공인 화학공학과 밀접한 공학기술들을 아프리카에 전수하기 위해 전공 공부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했어요. 열악한 경제상황에서 돈을 벌기 위해 분투하는 짐바브웨 국민들의 모습이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 있는데요. 훗날 제가 추진한 프로젝트로 아프리카 경제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생각하며 바쁜 제 대학생활에 즐거운 채찍질을 가하고 있어요.

대화를 마치고 나서 그들은 한참동안 아프리카에서의 추억에 잠겨 있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아프리카 봉사를 지원했고 다른 나라에서 봉사하고 돌아왔지만 그들 모두 ‘아프리카에 다시 갈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에서 에어컨 없이, 얼음물 하나 없이 일했고 며칠 동안 정전이 돼서 밤이란 얼마나 어둡고 답답한 것인지 경험하며 그곳의 사람들에 매료됐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돌아온 봉사단원들은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아프리카에서 겪은 경험은 이제 그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잊지 못할 소중한 산 경험이었다. 

인물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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