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키르기스스탄에서 귀국을 준비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에 도착한 것이 엊그제 같건만, 벌써 활동을 마감할 시기가 온 것이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10개월은 내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무엇보다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나의 관념이 바뀐 것이 가장 큰 변화가 아닐까 한다.

열심히 뭔가를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공허했던 대학생활
나의 대학생활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지루함’이었다. 나름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도 탔고, 선후배 관계 유지를 위해 적당한 음주도 즐길 줄 알았지만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기회들은 생각 밖에 둔 채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대학 2학년까지는 이런 삶에 별 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외 경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대학생활이 얼마나 단조로웠는지를 새삼 발견하게 됐다. 나도 언젠가는 다른 나라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처음으로 들었다. 제대 후엔 일단 스펙을 조금 더 높이려고 편입공부에 1년을 투자했다. 그런데 결과는 실패였고 다시 학교에 돌아와야 했다. 앞서 간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다시 토익과 전공 공부에 전력을 기울였다. 여름방학에는 국토순례에도 도전했고 학기중에는 열심히 공부해 전액장학금도 탔다. 다양한 곳의 사람들을 만나 나름대로 즐거운 추억도 만들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은 공허하고 불안했다.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었지만 바쁘신 부모님께는 걱정을 끼쳐드릴까 싶어 마음을 꺼내기 어려웠고, 친구들에게도 역시 내 속내는 털어놓지 못해 답답한 마음은 커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앞을 지나다 해외봉사단 모집 포스터 앞에 내 발길이 멈췄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봉사자 워크샵에 참석하면서 어쩌면 해외봉사가 나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볼을 맞대며 인사하는 문화는 아직도 어색하다
드디어 2월 12일, 나는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공항에 내렸다. 새벽에 마주친 공항은 마치 한국의 여느 버스터미널처럼 작고 초라해보였다. 마중 나오신 분들의 안내로 차를 타고 봉사센터로 가는 길에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자동차 헤드라이트만을 의지해 갔다. 게다가 길도 고르지 않아 웅덩이를 피하기 위한 곡예운전을 해야 할 정도로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밝아진 후에 만난 비슈케크는 신비하기만 했다. 손에 닿을 듯한 푸른 하늘과 높고 거대한 순백의 천산산맥에 둘러싸인 도심, 그 속에 현대식 건축물과 러시아풍의 오래된 집이 어우러진 모습이 나를 설레게 했다. 고산도시라서 매우 추울 것 같았는데, 우리나라와 비슷한 겨울 기후가 편안함을 주었다. 이른 새벽에 공항까지 마중 나오고, 식사를 대접해 주신 키르기스스탄 현지인들의 모습에서 포근한 인정도 느낄 수 있었다.
해외 경험이 전혀 없던 나에게 가장 신기했던 이곳의 문화는 언제 어디서 만나든지 악수하며 ‘잘 지내셨어요?’를 묻는 인사법이었다. 남자들끼리는 악수를 하며 포옹을 하고, 여자들의 경우에는 볼을 맞대는 인사를 한다. 어떤 나라는 여자끼리 손만 잡고 가도 동성애자로 오해하는데 비해 여기서는 길거리에서도 심심치 않게 여자끼리 볼을 맞대고 포옹을 한다. 친척이나 친한 친구를 만났을 때는 3회 정도 자주 볼을 맞대며 인사를 하는데, 연인이 아닌 친구사이인 남녀가 볼을 맞대며 인사하는 방식은 이곳에서 지낸 지 10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어색하기만 하다.

러시아어가 트이자 대화가 마냥 즐거워지다
세상에서 배우기 가장 어려운 러시아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에 잔뜩 긴장을 했는데, 마침 외국인을 위한 러시아어 강좌가 있어서 봉사활동 틈틈이 기초 러시아어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나는 현지 학생들에게 합기도를 가르치는 교육 봉사활동을 했다. 말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 염려가 많이 됐다. 그런데 중앙아시아는 K-POP과 한국 드라마 인기가 무척 높아 이미 한국어를 배우고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현지 학생들이 예상 밖에 많았고, 내 수업시간에도 한국어에 매우 능통한 ‘리스쿨’이라는 학생이 있어 통역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던 지난 5월경 현지인의 집에 초청을 받아 방문했을 때다. 그 전까지는 통역에 의지했기에 몇몇 러시아 단어만 아는 정도였는데, 그 날은 갑자기 현지인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모르는 단어를 받아 적는 것도 가능해지면서 사전을 바로 검색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오랜 시간 영어를 공부하면서는 결코 발휘할 수 없었던 언어 감각이 느껴지자 신기하기만 했다. 그 이후부터는 키르기스스탄 학생들과도 대화하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키르기스스탄에 온 지 7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한국어 교실을 시작했다. 화요일과 목요일 수업을 하고, 토요일에 토킹클럽을 만들어서 그동안 배운 한국어를 직접 대화에 활용하는 시간도 마련했다. 한국말은 하고 있지만 한국어를 가르쳐본 적이 없는 내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어 아카데미를 통해 현지 학생들과 대화하며 학생들과 마음 속 고민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겐 남다른 시간이었다.
키르기스스탄도 예외 없이 취업의 문이 좁아서 대학 졸업 후에 백수로 사는 경우도 많고, 이런 현실에 좌절해 해외로 나가려는 사람도 많았다. 실제로 한국어를 배우는 상당수의 학생들은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 아셀이라는 학생도 역시 진로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무작정 돈을 벌기 위해 한국행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번 고민을 해보라고 했다. 오직 돈 때문이라면 아무리 부유해져도 마음은 여전히 가난할 것이라고 말을 하면서, 성공의 기준을 돈에 두지 말고 마음의 행복에 두고,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서툰 러시아어로 나눈 대화지만 나 역시 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도 던져보며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고 있다
한국에만 있을 때에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일도 거의 없었고, 내 일하기 바빠서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 해외봉사 와서는 키르기스스탄은 물론 주변 러시아어권 국가 국제정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최근 한국과 키르기스스탄간의 관계가 호전되어 많은 한국 기업들이 진출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가면 러시아어 자격증을 따고 내 전공을 살려 LED사업분야의 전문직으로 다시 키르기스스탄에 오고 싶다.
한국에서는 하루하루 열심히 바쁘게 살지만 공부와 술, 친구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는 공허한 삶이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보낸 10개월이 바쁘고 힘들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여유와 포용력을 갖게 되어 내 공허한 마음이 채워지고 있다. 이국 생활과 봉사가 힘들어서 축 쳐져있을 때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는 아카데미 학생들을 보며, 내가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왔지만 결국은 내가 이들에게 위로를 받고 이들에게서 새로운 마음을 배운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언어가 달라 모든 말을 다 이해하기 힘들더라도,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면 마음과 마음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예전에는 나 외의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법을 몰라 문제가 있으면 혼자 끙끙거리고만 있었는데, 이제는 주위 친구들과 서로의 고민을 나누고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진정한 행복은 나를 위한 투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투자라는 것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이제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부모님을 만나게 될 텐데,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마음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무리 가까이 살아도 마음이 통하지 않으면 가장 먼 사람처럼 서먹한 사이가 될 수밖에 없다. 그동안 부모님께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죄송함도 이야기하고 싶고 사랑한다고도 말씀드리고 싶고, 또 동생과 친척들, 아울러 친구들에게도 키르기스스탄에서 내가 배우고 경험하고 온 것들을 말해주고 싶다.

글 | 서덕경(대진대학교 3학년, 키르기스스탄 12기)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