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선 (단국대학교 3학년,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카자흐스탄 10기)

지난 2011년 2월, 카자흐스탄에 도착했을 때 내 시야 앞으로 펼쳐졌던 초원들과 방목된 가축들, 그 뒤로 보이는 만년설. 그리고 구 소련 때 지어진 오래된 건축들과 최근 발전하면서 세워진 선진국 형 건축물을 보면서 내가 결코 평범하지 않은 나라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카자흐스탄에서 동서양 문화권의 사람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가는 모습들이 무척 생소하고 재미있었다. 집안에 음식을 가득 차려 놓고 온 가족이 함께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유목민문화와 트레이닝복과 같은 홈웨어를 입고 나가면 아주 큰 실례라고 생각하는 유럽권 문화 등이 함께 존재했다. 또한 마을 사람들끼리 한 집안에 모여서 회의할 때 좌식문화의 동양인들이 유럽민족 사람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웠고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여 살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하지만 청소년들을 위한 여가문화가 건전하게 발달하지 못했다. 러시아문화권인 카자흐스탄에 발레나 오페라 등 고급예술문화가 발전해있지만 일반 서민층의 청소년들은 방과 후에 즐길 곳이 없어서 대부분 영화관이나 클럽, 술집에서 놀거나 알콜과 마약중독에 쉽게 빠져들었다. 우리 단원들은 그런 학생들을 위해 ‘세계문화의 날’이라는 행사에 초대하여 각 나라의 문화공연과 한국 음식 체험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준비했으며 앞으로 그들을 위한 다양한 아카데미도 계획했다. 행사를 마치자 우리의 공연에 감동한 학생들이 정말 재미있었다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해왔는데, 그들을 위해서 1년 밖에 일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슴 아팠다.

내 관념에서 벗어나다
우리는 또한 공사현장을 돕는 봉사활동도 열심이었다. 이왕 봉사 온 것 제대로 해보겠다고 마음먹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언어공부하고 낮에는 누구보다도 솔선수범하고 밝은 태도로 봉사했다. 그런데 실수밖에 안 하는 내 자신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더 밝고 활달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을 보고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한번은 남자 단원과 다투고 2달간 서로 말도 안 했을 정도로 마음이 무척 힘들었다. 한국에서도 그런 자격지심 때문에 힘들어한 적이 많았는데,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하지 않고 방황하던 시간이 길어서 사람들보다 내가 지식이나 성품적인 부분이 많이 뒤떨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에 있었다면 집에 가서 잠수타면 그만이겠지만 해외에 봉사단원으로 온 이상 내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이렇게 1년을 보내다가는 주변 사람들도 더 힘들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내가 원래 속 좁고 잘 못하는 사람’라고 인정하고 다투고 말을 하지 않았던 남자 단원에게 먼저 다가가서 사과했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내 마음이 훨씬 자유로워졌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작은 봉사에도 고마워하고 있었고 내가 실수했다고 무시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20년 평생 가지고 살아왔던 내 고립된 시각과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나를 자책하거나 행동을 고치려고 하다가 바뀌지 않으면 포기해버렸지만 이젠 잠시 주저하다가 더 크고 어려운 일에 도전하는 길을 택했다. 공연기획, 후원사 찾아가기, 청소년 상담, 각종 가정일과 설거지 봉사 등 뭐든지 도전했고 한계를 만나기도 했지만 내 마음은 오히려 더 밝아졌다. 배우기 어려웠던 러시아어도 터득하면서 카자흐스탄 사람들과 대화하는 티타임이 즐거워졌고 나와 같은 막무가내를 좋아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다.

카자흐스탄에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해외봉사에서 얻었던 마인드를 바탕으로 한국에 돌아와서는 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들을 하고 있다. 귀국하자마자 2012굿뉴스코페스티벌 행사진행 일을 했고 여름에는 2012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 인사팀을 맡아 일하며 국제행사개최와 행사진행을 세밀하게 책임지고 참가자들을 배려하는 부분들을 배웠다. 이때 키르기스스탄 청소년부장관님을 만나 나의 짧은 러시아어 실력으로 청소년정책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2013년부터는 다양한 대외활동에서 홍보팀을 맡아서 여러 기업과 국회의사당들을 바쁘게 찾아다니며 홍보했다. 홍보활동을 하면 할수록 내 한계를 만날 때도 많았지만 다양한 직위의 사람들을 만나서 우리 행사를 소개하고 또 그분들에게 조언도 들을 수 있어서 배울 것도 많았다. 물론 학교 다니면서 활동하자니 정말 바쁘고 때론 너무 피곤해서 쓰러지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학접에만 매달려 전전긍긍하던 예전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무척 대견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러시아어와 관련된 사람을 참 많이 만나고 있다.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스탄 대사님을 만나 해외봉사단 귀국발표회를 초청했고 아프리카 가나의날 행사에서는 우크라이나와 조지아 대사님을 만나 내가 해외봉사 다녀온 이야기를 해드리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러시아어를 듣고 다가가서 친해진 러시아인 교수 부부와는 6개월 동안 서로 왕래하면서 가족처럼 지내왔다.
현재 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으며 1년 동안 배웠던 러시아어를 문법부터 새롭게 공부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바쁘게 사는 이유는 바로 카자흐스탄에서 만난 청소년들처럼 소망없이 살아가는 러시아어권 국가 청소년들을 위해서 일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진 못했고 공부해야 될 것도 많지만 청소년들이 건전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는 교육제도를 만드는 것이 내 꿈이다. 내 인생을 새롭게 했던, 나의 제 2의 고향 카자흐스탄을 생각하며 오늘도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

*스탄 사람들이 사는 세상

카자흐스탄의 이주 역사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스탄 국가들은 과거에 실크로드의 교역상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동서양의 다른 문화나 산물을 연결해주어 민족의 이동과 성쇠가 복잡했다. 카자흐민족은 15세기 중엽 우즈베크족과 분리되어 형성됐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러시아가 카자흐 민족을 정복하면서 러시아인, 카자크인도 이주하여 함께 살기 시작했다. 1936년 구소련의 처녀지개척운동 때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카자흐로 대량 이주하였으며, 1937년 스탈린의 정권하에 이루어진 강제이주에 따라 수십만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옮겨왔다.

형식적인 예절보다 마음으로 다가오는 사람들
현재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의 나라가 위와 비슷한 역사 때문에 여러 민족이 함께 살아가지만 신기하게도 미국과 같은 인종차별이나 문화차이로 인한 부딪힘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가가 볼키스를 하며 안부를 묻고 소개하는 매우 개방적인 인사예절을 가졌다. 남자들끼리는 모르는 사이더라도 만나면 꼭 악수로 인사해야 하며, 초등학생 꼬맹이가 삼촌뻘 아저씨에게 ‘안녕? 뭐하고 지내?’와 같이 인사를 하거나 자신의 친지들는 무조건 어른아이 구분 없이 ‘너’라고 호칭하는 문화였다. 이런 문화를 처음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형식적인 예절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처음 만난 손님이나 외국인들과 격없이 쉽게 친해지는 장점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친한 사이가 아니면 자신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 데 반해 스탄 사람들은 그룹단위로 모여 함께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또한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잘 들어줘서 무슨 이야기든 자연스럽게 할 수 있다.

차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스탄 사람들은 외식보다 집에서 모이는 것을 좋아한다.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준비한 음식을 대접하고 식사 후에는 차이(차)와 뻬차니예(차이와 함께 먹는 주전부리)까지 함께하는 차 문화를 즐긴다. 손님들이 찻잔을 비우지 않게 하는 것이 예절이라 계속해서 차를 채워준다. 나는 30분 동안 6잔을 마신 적도 있다.
이와 같은 스탄 사람들 특유의 친화력 깊은 문화는 슬픈 역사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침략과 강제이주로 만난 민족들이 지극히 어려운 환경에서 한데 어우러지며 만들어낸 인고의 산물이 바로 인종차별 없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오늘의 스탄 국가들이다. 

담당 |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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