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우(영산대학교 4학년,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카자흐스탄 10기)

‘굿뉴스코 단원들이 봉사했던 나라 스탄 3국. '스탄'은 땅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카자흐 민족이 사는 땅 카자흐스탄, 키르기스 민족이 사는 땅 키르기스스탄, 우즈벡 민족이 사는 땅 우즈베키스탄이라고 할 수 있다.이렇게 국가 이름이 있지만 실제로 중앙아시아의 스탄 국가들에는 동서양의 다양한 민족들이 한 데 어우러져 살아간다. 과거 러시아와 구 소련의 지배를 받아서 러시아어가 통용되며 그들의 문화 또한 비슷하게 닮아있다. 인종차별 없이 외국인마저 가족처럼 대하는 그들의 친화력에 빠져들어 러시아어까지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는 봉사단원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 한상우 (영산대학교 4학년,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카자흐스탄 10기)
▲ 한상우 (영산대학교 4학년,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카자흐스탄 10기)

졸업을 앞두고 무역학 공부를 위해 바쁜 한상우 씨는 2011년 한 해 동안 카자흐스탄에서 해외 봉사했던 경력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에서 활동하며 습득했던 러시아어와 사람들과 만나서 소통하면서 한 때 일그러진 꿈 때문에 방황했던 그의 젊은 날에 다시 화창한 태양이 떠올랐다.
한상우 씨의 전공은 다름 아닌 경찰행정학. 스무 살 풋풋한 새내기였던 그는 졸업만 하면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무척 적극적이고 희망찬 대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경찰 지망생으로서 남자답게 살고자 하여 과대표를 맡았고 넉넉지 않은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아르바이트도 병행하며 살았다. 남들이 마지못해 가는 군대도 현역이 아닌 해병대 부사관에 직접 지원해서 4년 3개월 동안 군 생활을 했다.

건실한 청년이었지만
“부사관은 9급 공무원 정도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월급도 상당했습니다. 저희가 근무하던 곳이 김포 쪽에 있어서 서울 신촌까지 40분이면 갈 수 있는데 제 동기 대부분은 월급 받으면 흥청망청 놀기 바빴죠. 반면에 저는 술자리에는 함께 했지만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어요. 군에서 받았던 월급을 거의 쓰지 않고 모아서 5천만 원이라는 목돈을 만들어서 제대했죠. 친구들이 ‘대단하다, 너는 어디 가서도 잘 살겠다’ 고 하더라고요. 제 나름 근면과 절제를 실천했던 군 생활이었는데 어느새 그것 때문에 조금 우쭐해졌었나 봐요.”
어느 날 한순간 방심하다가 교통사고를 냈다. 그의 잘못이 컸고 상대방과 합의가 되지 않아 벌금을 물고서야 사건을 일단락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건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조심해서 운전하면서 청렴결백한 경찰이 되고자 했던 자신이 사람을 다치게 한 사고를 낸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하면 된다’라고 믿었던 그의 미래가 암울한 현실로 느껴졌다.

해외봉사에서 가능하다고?
“학교에서 과대, 군에서는 간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제 휴대폰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번호가 저장돼 있었어요. 하지만 사고를 당하고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제 마음을 하소연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너무 힘들었어요. 가족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한 달 동안 방황만 하다가 다시 일어났어요. 여기서 또 쓰러지겠냐고, 액땜했다고 생각하고 복학해서 더 열심히 살았어요.”
하지만 한번 마음에 긁힌 상처를 치료하지도 않고 가만히 두자니 계속 쓰라리고 또 다시 같은 일로 다칠까봐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우즈베키스탄에 다녀온 한 여학생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봉사하면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법을 배웠고 언어도 아주 쉽게 배울 수 있었어요.”라고 밝게 말하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가족에게도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못하는데 외국에서는 그런 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궁금했다. 이후 봉사단 워크숍에 참석해서 선배들의 경험담을 들으면 들을수록 무척 부러웠고 꼭 한번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장학금을 받았고 전혀 주저하지 않고 휴학계를 낸 다음, 그가 지원했던 카자흐스탄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화내는 할머니 때문에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즐거웠고 또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건축봉사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쉽게 다칠 수 있는 위험한 일들이 많았지만 4년간의 혹독한 해병대 군 생활을 경험했던 그에게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고. 군대 짬밥으로 익혔던 다양한 노가다 기술들을 가지고 봉사활동에서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밝은 성격에 뭐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일하며 주위에서 칭찬을 자주 들었던 그가 카자흐스탄에 와서는 아무도 기분 좋은 소리를 해주지 않는 것 때문에 매우 섭섭했다고 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기분 좋은 말 몇 마디로 몇 배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직접적으로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같이 사는 카자흐스탄인 할머니가 저만 보면 오히려 혼내는 것 같았어요. 러시아어를 초반에는 알아듣지 못해서 오해가 더 컸죠. 저는 제 자신이 인격적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가 자꾸 그러시니 괜히 의기소침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나중에는 못 참고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말씀 드렸더니, 할머니는 결코 저를 싫어해서 화를 낸 것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오로지 제가 무사히 잘 지내다 가길 바라는 마음뿐이라는 거예요.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칭찬만 바라고 할머니 마음은 전혀 보지 못했던 제가 잘못했다고 느꼈죠.”

▲ 우즈베키스탄 전통음식 쁠롭을 요리할 때
▲ 우즈베키스탄 전통음식 쁠롭을 요리할 때

진정한 시너지 효과
그는 벽돌 쌓기, 배관작업, 인테리어 목수일 등을 도왔고 한국에서 온 기술자 선생님들의 통역도 맡았다. 러시아어 사전을 두 개로 나누어서 바지 양쪽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쉬는 시간 마다 흙바닥에 단어를 쓰면서 공부하고 통역했다. 공사가 어느 정도 마쳐질 때에는 그의 러시아어 실력도 어느새 일취월장해 있었다.
“통역하면서 카자흐스탄 사람들과 대화할 시간이 많아졌어요. 아무리 바빠도 오후에 꼭 가지는 티타임 중에 대화하면서 제가 일차적으로 생각했던 부분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알게 됐어요. 카자흐민족이나 러시아인들은 느리고 여유가 많아서 게으르게 일한다고 속으로 불평을 했거든요. 그런데 말이 통하고 서로를 알게 되면서 전혀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퇴근시간이 지나도 맡은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제 생각이 얼마나 좁았는지 알 수 있었죠. 그렇게 서로의 약점과 단점을 알게 되면서 그만큼 마음도 가까워졌어요. 마음으로 진정한 친구를 사귀는 방법은 저의 약점을 먼저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죠.”
칭찬이 아닌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 함께 할 때 더욱 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의 한국에서 삶도 되돌아보았다. 타의 모범이 되는 바른 삶을 살면서 ‘하면 된다’는 뚝심으로 남자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할 때 모두들 그에게 잘 될 것이라는 기분 좋은 말만 해줬지 그에게 진심으로 충고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교통사고가 났을 때 그의 괴로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었던 것이다. 친구란 잘못된 길로 갈 때 언제든지 따끔하게 충고해 주고 서로의 허물도 기꺼이 보듬어줄 수 있는 사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가장 따뜻한 잠자리를 내주던 사람들
봉사단원들은 비자 연장을 하기 위해 세 달에 한 번씩 키르기스스탄에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무전여행을 떠났다. 그를 비롯한 두 명의 팀원들이 잠 잘 곳이 없어서 밤 11시가 넘을 때까지 헤맸다. 팀원들 모두 배고프고 지쳐서 여행을 그만두고 싶어 할 때 그가 대화 좀 하자고 팀원들을 불러 세웠다. 자신감 있게 출발했지만 상황이 힘들어지니까 그만두고 싶은 솔직한 서로의 마음을 나누면서 팀원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성공적으로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아파트에 방문했을 때는 조그만 방 안에서 라디에이터의 열기 하나 의지해서 사는 가족들을 만났어요. 그런데 라디에이터 제일 가까이 있는 잠자리를 우리에게 내주셔서 한사코 거절했어요. ‘너는 귀한 손님’이라고 끊임없이 권유하는 통에, 그곳에 눕긴 누웠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죠.”
봉사활동하면서 가장 많이 알게 된 것은 마음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가였다. 그의 봉사에 사람들은 고마워했고 가난해도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을 보면서 봉사란 단순히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보다는 마음을 함께 해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임을 느꼈다.

마음으로 소통하는 러시아어 통역
한국에 돌아와서 러시아어를 계속 사용하고 싶어서 학과수업으로도 바빴지만 교수님들의 허락을 구해 2012여수세계박람회의 아르메니아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그런데 러시아어를 1년 배웠던 그보다 러시아어권 국가에서 고등학교나 대학을 나온 유학파 출신의 다른 통역관들은 월등한 러시아어 실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아르메니아 사람들도 그에게 통역을 부탁하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끄럽고 분했어요. 당장 집에 가고 싶었지만 한 번 더 생각해봤죠. 제가 실력도 없는데 유학파 출신 통역관들과 동급 대우를 받으려고 하니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그때부터 4개월 동안 아르메니아 사람들과 마음을 맞추려고 노력했고 그들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장 먼저 갖다 주고 사소한 요구도 웬만하면 들어주기 위해 힘썼어요. 처음에는 눈길도 안 주던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돌아갈 때는 ‘한국 하면 너밖에 생각 안 날 거야. 정말 고마웠다’라고 인사하는데 정말 제 가슴이 뭉클했어요.”
해외봉사 가서 배웠던 겸손과 마음 나누는 법이 그를 더욱 빛나게 했던 것이다. 2013년 2월, 평창스페셜올림픽 자원봉사자로 참여해서 아제르바이잔 국가의 전담 통역을 맡았다. 일반적으로 선수들과 통역관은 숙소를 따로 사용했지만 ‘지적장애인 선수들을 도와주러 왔는데 내가 같이 생활해야 한다. 여기는 내 러시아 실력을 과시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선수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경기가 마치고 헤어질 때 선수들은 “너는 아제르바이잔의 친구”라며 감사의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해외 친구들과 가슴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우정을 쌓게 된 그는 4학년 1학기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고 돌아오면서 글로벌 마인드를 한껏 키웠다.

새로운 꿈을 향해
이제 곧 졸업을 앞둔 그는 경찰이 아닌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다. 해외봉사에서 러시아어로 소통하는 법을 배운 이후로 전 세계인과 소통하는 해외무역을 꿈꾸고 있다. 현재 산업통상부가 주관하는 GTEP*에 참여하여 전공과 상관없이 전문적인 무역인이 되기 위한 체계적인 수업을 받고 있으며 얼마 전 터키, 두바이, 홍콩 전시회도 다녀왔다. 무역도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마인드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그의 꿈을 향한 도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GTEP: 대학 무역교육에 현장실무지식과 현장실습을 접목하여 글로벌 경쟁시대에 기업의 요구에 부응하는 무역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