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하자

# 나는 누구와 있을 때 편히 쉴 수 있는가?

주한 벨라루스 대사인 안드레이 체르네츠키 박사가 인터뷰 중에 해준 이야기가 있다. 대담 주제와 딱히 맞지 않아 메모만 해둔, 혼자 듣기엔 아까운 말이었다.

“서로 남남이었던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게 됩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가정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저는 아내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보, 들어봐. 우리가 싸워야 할 이유를 댄다면 천 가지도 댈 수 있어. 그러나 싸우지 않아도 될 이유가 단 한 가지라도 있으면 돼. 그걸 찾아보자.’ 그리고 서로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들을 찾아봅니다. 우리 부부에겐 두 아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이외에도 우리에겐 공통된 것들이 찾아보면 많습니다.”

이 말을 패러디해서, 남녀가 결혼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아내려면 천 가지도 댈 수 있을 것이다. 금쪽보다 귀한 자유의 상실, 개인적인 삶의 축소, 자녀양육에 대한 부담, 원치 않는 가사노동, 상대의 간섭, 경제적 불만, 시댁과 처가의 뒷바라지…

이유를 대자면 끝이 안 보인다. 그러나 이를 제압할 수 있는, 결혼해야 할 이유를 단 한 가지라도 찾아보자는 말에 사람들은 ‘정신적 의지가 되어’를 첫 번째로 꼽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실시한 결혼과 출산 인식 조사 결과*(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2020년 발표한 ‘저출산ㆍ고령사회 대응 국민 인식 및 욕구 심층 조사 체계 운영’ 정책 현안 보고서 중, 만 19~49세 성인 남녀 2천 명 대상으로 한 결혼과 출산에 대한 생각 설문 조사 결과 참조)에도, 결혼의 가장 큰 장점이 ‘정신적 의지’이며, 두 번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음’으로 나왔다.

설문에 응답한 남녀 2천 명은 결혼이 ‘정신적 의지가 되는 사람과 사랑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고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단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을 ‘결혼식’으로 연결할 도화선을 찾지 못해 제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저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지 말지 망설여질 때 생각해 보자. ‘나는 누구와 있을 때 편히 쉴 수 있는가?’ 피곤한 몸은 침대에 누워야 쉴 수 있다. 그런데 믿지 못할 사람이 옆에 있다면 누워도 누운 게 아니다. 몸은 쉬고 있는데 마음이 편치 않으면 꽃자리는 곧 가시방석이 되고 만다. 우리 인간의 마음에는 나를 사랑하고 믿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쉬는 버튼이 작동한다. 그때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식은 평생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을 공표하는 자리다.

사진 프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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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반결혼, 반반부부가 가능할까?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것보다 개인의 삶에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은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선택’으로 본다. 그들은 결혼을 선택할 때, ‘반반결혼’이라는 합리적인 방법을 택해 결혼식 비용도 반씩 나눠 부담한다. 그들이 ‘공정하다’고 굳게 믿는 ‘반반半半’ 개념은 그들의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생활비도 반반, 육아도 반반, 집안일도 반반, 부모님 용돈도 반반… 이런 식으로 목표를 정했으니 그 다음엔 ‘반반’을 실천할 체크리스트를 만든다. 신혼 때부터 이렇게 각자의 할 일을 분리수거하듯 나눠서 해온 부부들은 처음부터 현실적인 길을 선택하고 들어선 것이므로 실망이 크지 않다.

문제는 결혼 후 신세계를 기대한 사람들이 느낄 좌절감이다. “신혼 때 부부의 의무는 지금과 비교하면 새털만큼 가벼웠던 것 같아요. 아이를 낳고 나니 배우자로서의 의무만이 아니라 부모로서의 의무가 더해졌고, 필요 노동력은 곱하기가 아닌 제곱수로 불어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부부의 짐은 더욱 불어날 것 같아요.

아이가 커가는 것에 따라, 양가 부모들의 건강에 따라, 또 부부 각자의 노화 정도에 따라서 말이죠. 겉으로 볼 때 부부의 세계라는 건 시간에 비례해 의무만 늘어나는 세계가 아닐는지 싶습니다.”

어느 블로거의 조용한 독백인데, 그 스스로도 표현했듯이 ‘겉으로만 보면’ 부부의 세계는 의무만 늘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요즘 변호사 앞에 와서 이런 엑셀 파일을 들이밀며 이혼하겠다는 부부가 꽤 있다고 한다.
요즘 변호사 앞에 와서 이런 엑셀 파일을 들이밀며 이혼하겠다는 부부가 꽤 있다고 한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정신없이 사는 주변 선배에게 한번 물어보자. “결혼생활이 1+1=2인 것 맞지?” 십중팔구 이렇게 답할 것이다. “숫자로는 맞아.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가정 안에서 1+1=0이거나 1+1=무한대일 때가 더 많다. 가성비, 수익률, 효율성 같은 수치로 사물의 가치를 계산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은 가정을 이끌어 갈 때도 인풋 대비 아웃풋이 커야 한다는 논리를 적용한다. 직장에서 숫자를 다루는 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살아 보면 안다. 가정에선 그 원칙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물질과 사랑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결과는 미미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런데 신기한 사실은, 사랑과 물질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고, 더 주고 싶고, 또 주고 싶은 마음이 화수분처럼 계속 생긴다는 점이다. 그러니 앞으로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길 바란다. 죽기까지 멈추지 않고 뛰는 심장처럼, 내 안에서 가족을 향한 사랑이 끊이지 않고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결혼을 미루려 한다. 그때를 기다리다가 꽃다운 젊은 시절을 다 놓쳐 안타깝다. 사람은 궁극엔 마음으로 사는 존재다.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는 조건만으로 부족한 걸까? ‘반반’ 원칙을 고수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아프리카 정글에 가서야 깨달았다는 전직 은행원 출신 선교사 아내의 스토리 일부를 소개하고 싶다. 글을 읽으며 결혼에 필요한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자.

저녁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이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선교사를 초대한 집주인과 선교사 내외만 남았다. 집주인이 입을 열었다.

“선교사님, 미안합니다. 나는 선교사님에게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저기 달린 게 없는 바나나 나무가 내 것입니다. 내 아내는 부자입니다. 저 코코넛 나무도 아내 것이고, 파파야 나무와 망고 나무도 아내 것입니다. 뜰에 있는 닭도 계란도 모두 아내 것입니다. 그래서 드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선교사 아내는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망고나 코코넛 같은 것들이 몇 푼이나 된다고 부부가 내 것 네 것을 따져? 이 바나나 나무는 남편 것이고 저 바나나 나무는 아내 것이고 하면서 사는 게 무슨 부부냐? 정글 사람들은 정말 치사하다. 저거 다 합해도 10달러도 안 되겠는데….’

그때 선교사 아내에게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자신은 집주인 아내처럼 코코넛, 바나나 가지고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자신 역시 어떤 부분에서는 남편 것과 자기 것을 구분해서 살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는 자신이 얼마나 유치한 사람인지 알았고, 자신의 욕심대로 자기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는 남편과 마음을 합해 살기 시작했다.

얼마 뒤, 부부는 영어를 쓰는 가나를 떠나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베냉으로 선교지를 옮겨갔다. 프랑스어가 아직 서툰 그는 가방에 영어 성경과 프랑스어 성경을 각각 넣고, 영어 사전과 프랑스어 사전도 가지고 다녔다. 현지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한 그는 무거운 성경 가방을 들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마음을 쏟아서 전도를 했다. 자신의 그릇된 모습을 발견한 선교사의 아내는 새 삶을 살기 시작했고 그곳 사람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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