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근무하고 계시는 회사를 따라 한국으로 이민을 왔다. 할아버지가 한국인이셨기에 한국어를 조금 할 줄은 알았지만, 수업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반 친구들의 세심한 배려와 도움으로 점차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고 그때 처음으로 ‘언어’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이후, 영어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대학을 영어학과로 진학했다. 입학하던 해, 나는 누구보다 열정이 넘치는 학생이었다. 

국제개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꾸며 학과 공부도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내 계획대로라면 2학년부터는 영어권 국가에 교환학생으로 가거나 인턴 생활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2학년이 되던 해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상을 뒤덮으면서 나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뭐든 할 거면 제대로 하자!’를 삶의 좌우명으로 삼아온 만큼 열정과 성실 하나는 자신 있던 나였지만, 내 모든 삶을 단절시켜 버렸던 코로나를 뚫고 나갈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대외활동이 중단되고, 온라인 수업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나는 전공과목인 ‘영어’에도 흥미를 잃어갔다. 무기력한 상태로 3학년 2학기가 되던 해, 친구로부터 희소식을 접했다. “지원할 수 있는 해외봉사 활동이 있데.” 나는 곧장 모험을 결심했다. 1년간 휴학을 하고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를 쓰는 지구 저 반대편에 있는 나라를 경험해보자고 말이다. 그리고 그 ‘모험’은 내 삶에 가장 행복한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지난 1년간 나는 아르헨티나 곳곳을 다니며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 그중 잊지 못할 두 여행지와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소개한다. 

따뜻한 마을, 멘도사

봉사단원들은 평소 아르헨티나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내며 활동을 했다. 종종 주변 도시로 파견되기도 했는데 그중 하나가 ‘멘도사’라는 곳이었다. 숙소에서 멘도사까지 버스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11시간. 멘도사는 아르헨티나 서부 안데스산맥 기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연간 풍부한 일조량으로 아르헨티나 와인의 70% 이상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하다. ‘도시의 정석’이었던 부에노스아이레스와 멘도사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자연과 공원, 광장이 많았고 조용한 도시를 돌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평화로움’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멘도사 사람들도 그런 주변 환경을 닮아선지 포근했다. 멘도사 봉사 지부는 생긴 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곳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지부에는 한국인 지부장님을 비롯한 여러 현지인 직원들이 있었는데, 멘도사에는 현지인 지부장님 부부만 살고 계셨다. 그만큼 규모가 작은 곳이었다. 그곳에 도착하던 날, 두 분을 포함한 총 다섯 명의 현지분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해주려고 하셨고, 필요한 것이 없는지 늘 살피고 물으셨다. 

멘도사에서 지내는 동안, 우리는 주로 도시 외곽에 위치한 청소년센터에서 교육 봉사를 했다. 나는 영어 수업을 맡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학생이 수업에 참여했다. 대부분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오가며 영어를 배웠다. 수업이 끝나면 내 손에 초콜릿을 쥐여 주는 학생도 있었고, 나를 꼭 안아주는 이들도 있었다. ‘고맙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그들을 보며, 매일 학교를 다니며 마음껏 공부할 수 있음에도 불평하기 바빴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하루는 한 학생에게 영어를 배우는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 학생이 이렇게 답을 했다. “선생님, 저는 영어를 배워서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싶어요.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보고요!” 순간, ‘그러면 나는 무엇을 위해 영어를 배우고 있었지?’라는 질문이 뇌리를 스쳤다. 언어를 배워서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많은 사람이 지속 가능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도록 일하고 싶다던 나의 꿈을 다시 떠올렸다. ‘이 학생 말처럼, 언어는 더 많은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고마운 도구인데 언제부턴가 더 좋은 학점을 얻기 위한 도구로만 생각했던 건 아니었을까?’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배운 영어를 활용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럴 때면 나 또한 그들에게 스페인어를 한 마디 두 마디 하면서 가까워졌다. 그렇게 스페인어를 조금씩 익혀갔다. 오롯이 ‘매일 마주하는 그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말이다. 

처음 ‘멘도사’로 떠날 때는 새로운 환경을 경험한다는 기대와 그곳에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잘 해내고 싶은 의욕이 앞섰다면, 실제 그곳에서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내가 받는 것이 더 많아서, 고마운 사람들에게 더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아쉬웠던 날들이 더 많았다. 누군가를 이유 없이, 따뜻하게, 사랑으로 대하며 살아가는 삶이 있다는 것.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도구라는 것. 멘도사가 내게 알려준 것이었다.

함께하는 행복을 알려준, 우수아이아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곳은 ‘우수아이아’이다. 남극에서 가장 가까운 라틴 아메리카 최남단 도시로 ‘세상의 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여행자들에겐 성지나 마찬가지인 이곳을 나는 3월과 8월 두 번에 걸쳐 다녀왔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참석할 만큼 큰 규모의 정부 행사에 간 적이 있었다. ‘우수아이아에도 미래가 있다.’ 처음에는 플래카드에 적힌 행사 주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우수아이아 현지 지부장님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행사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우수아이아는 유명한 관광도시로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곳이지만, 동시에 작은 섬나라이기도 해요. 심리적인 고립을 느끼기 쉬운 환경이고, 많은 청년이 미래를 찾지 못해 이곳을 떠나려고 합니다. 정부에서도 이를 알고 이곳 청년들을 위한 다양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어요. 저희 또한 이곳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요. 교류하고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마음의 세계를 배우면서 많은 사람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3월과 8월, 우리는 우수아이아 청소년과 시민들을 위한 활동 중 하나로, 한국 문화를 다양한 형식으로 체험할 수 있는 코리아캠프를 개최했다. 3월에는 소규모로 행사를 진행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다. 그 덕분에 8월에 다시 우수아이아에서 코리아캠프를 좀 더 큰 규모로 열 수 있었다. 다시 찾은 우수아이아에서 더 많은 사람을 위해 행사를 연다고 생각하니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당시, 코리아캠프를 비롯해 다른 행사들을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인원과 시간 모두 빠듯했다. 내가 볼 때는 제 시간 안에 캠프 준비를 마치지 못할 것 같았다. 분명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함이 커졌다. 행사 일은 다가오는데, 풀어야 할 문제들은 잔뜩 쌓여 있었다. 코로나 시기, 잘 해내고 싶었던 일들이 어느 순간 모두 원점으로 돌아갔던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번에는 그 끝이 달랐다. 내 마음의 힘은 빠졌지만, 함께 했던 팀원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미흡해 보이더라도 끝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문제가 생기면 지부장님과 현지 분들에게 묻고, 지혜를 얻는 동료들이 있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누구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 친구들의 마음의 길을 따라가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혼자’가 아닌 ‘함께’였기에 나는 포기하지 않고 캠프를 끝까지 준비할 수 있었다. 

대망의 행사 당일, 겨울이었던 8월의 우수아이아에는 폭설이 내렸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올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캠프장 문을 열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코리아캠프에 참석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고마웠다. 우수아이아에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그 감동의 순간은 오래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봉사자로의 삶은 상상 그 이상으로 행복했다. 청소년 센터 건축 봉사를 하던 일, 영어나 중국어를 가르쳤던 일, 사람들에게 한국 문화를 소개하며 대화하던 일 뿐만 아니라 청소하는 작은 것도 내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아르헨티나에 오기 전, 나는 늘 ‘나 자신’만을 위해 삶을 계획하고 시간을 쏟아왔다.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했고 실패하면 나를 탓하고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보았고, 또 그 일을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해나가는 걸 경험했다. 신기한 건, 후자의 삶이 더 넓은 세계를 보고 느끼게 했으며, 훨씬 더 즐거웠다는 점이다.

나는 곧 길고도 짧았던 봉사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까?’ 물론, 대외활동이나 교환학생으로 해외에 나가 새로운 환경을 경험할 수는 있었겠지만, 여전히 나는 ‘나’만을 위해 공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좁은 세계 속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인생은 때론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다행인 건, 그 돌발성이 나에게 아픔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생각지 못한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는 점이 아닐까? 해외 봉사 기간의 끝자락에 마음의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이곳에서 느낀 행복, 함께하는 힘, 다시 찾은 꿈의 방향…. 빼곡했던 나의 계획이 비워진 그곳에 더 크고 값진 것들이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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