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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의 교류
고은비 기자 | 승인 2022.11.17 10:23

오래전부터 인류는 유익한 것을 외부로부터 받아들이고, 때론 널리 전하며 ‘교류’를 해왔다. 상품 교역을 통해 ‘의식주’를 비롯한 삶의 전반이 풍요로워졌으며, 학문과 기술의 교류를 통해 의학‧과학 등에 큰 발전을 이뤄 일상을 더욱 편리하게 바꿔놓았다. 이외에도 환경 보존 및 인권 보호와 같은 공공선公共善을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인 단체가 결성되는 등 오늘날까지 다양한 형태의 교류가 이어오고 있다. 어제와 오늘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교류해왔는지, 이모저모를 살핀다.

교류, 주고 받는 기쁨 - ② 어제와 오늘의 교류

목화씨 한 알

고려 시대 학자이자 문신이었던 문익점은 중국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문익점은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3년간 목화 재배를 시도한 끝에 목화 대량 재배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원나라 승려 홍원의 도움을 받아가며 솜에서 씨앗을 빼는 씨아와 실을 잣는 물레를 만들어 일반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문익점이 한반도에 목화씨를 들이기 전에도 삼국시대에 면직물이 생산된 기록이 있기에 ‘문익점이 목화를 최초로 도입했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목화를 이 땅에 정착시키고 재배법과 면직물 생산기술을 널리 보급시킨 그의 공은 여전히 크다. 당시, 목면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고려 사람들은 대부분 베옷으로 사시사철을 지내야 했다. 백성들의 삶을 나타내는 표현 중 ‘헐벗고 굶주린다’는 것은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지내야 하는 고통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면이 일반화되면서 백성들의 의생활은 크게 변했다. 또한, 문익점으로 시작된 목면 생산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농가 경제를 두텁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목화 재배와 목면 생산을 적극 장려했던 세종은 문익점을 ‘부민후’ 즉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라는 작위를 하사하기도 했다. 

실크로드

고대 시절, 중국에서 만든 비단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상품이었다. 때문에, 이는 교역품이나 귀한 선물로 주위 여러 나라에 수출되었고, 먼 로마까지 팔려나갔다. 중국의 비단이 로마까지 간 길을 흔히 ‘비단길(실크로드)’이라 부른다. 이 길을 통해 동방에서 서방으로 다양한 물품이 오갔는데, 실크로드는 단순한 상품의 교역로를 넘어 정치, 경제, 문화를 이어 준 교통로의 총칭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의 기린, 사자와 같은 진귀한 동물과 호두, 후추, 깨 등이 전해졌고, 유리 만드는 기술도 전해졌다. 중국에서 비단, 칠기, 도자기 같은 물품과 양잠, 화약 기술, 제지 기술 등이 서방으로 건너갔는데, 특히 종이 만드는 기술은 중세 유럽의 암흑기를 밝혀 인쇄술 발달과 지식 보급의 원동력이 되었다. 

총길이 6,400㎞에 달하는 실크로드. 이 명칭은 독일인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처음 사용했다. (사진 Newspaper Yale Tribune)

상업적인 면뿐만 아니라 동서 문화의 교류라는 면에서 실크로드는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다. 이 길을 따라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으로 전파되었고 인도의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다. 그밖에 인도의 수학과 아랍의 화학, 수학, 천문학, 점성술 등도 실크로드를 따라 전 세계로 퍼져갔다. 

향신료 때문에?

음식의 맛을 돋우는 ‘향신료’. 요즘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고가의 귀한 물건이었다. 유럽인들은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항로를 개척하며 신대륙을 활발히 발견했는데, 이를 ‘대항해시대’라고 말한다. 세계사의 흐름 속에 소금‧모피‧석유 등과 함께 세상을 움직인 물건 중 하나로 꼽히는 향신료는 ‘대항해시대’를 촉발한 주요인이 되기도 했다. 

왜 유럽인들은 그토록 향신료에 열광했을까? 당시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었고, 주로 애용되는 식재료는 빵과 감자, 소금에 절인 저장육과 생선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음식에 향료를 넣으면 풍미가 훨씬 좋아져서 식욕을 돋울 수 있었다. 특히, 인도 남부에서 주로 생산되는 후추는 유럽 귀족의 입맛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또한, 향신료가 전염병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부유층들은 앞다투어 구매했다. 특히 후추, 정향, 육두구 3대 향신료는 유럽에서 재배가 어려워 동서무역을 중개하는 상인들로부터 비싼 값에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오는 동안, 향신료의 가격은 생산지보다 몇백 배로 껑충 뛰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배를 타고 나가 상인들을 거치지 않고 인도 현지에서 직접 향신료를 사 오는 모험을 강행했다. 그런 모험의 대표적인 나라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다. 

세 사람의 노벨상

2015년, 노벨 생리의학상은 천연물에서 기생충 퇴치약과 말라리아 치료제를 찾아낸 연구자들에게 돌아갔다. 그 주인공은 아일랜드 출신의 미국 드류대 윌리엄 캠벨 교수, 중국 전통의학연구원 투 유유 교수, 일본 가타사토대 오무라 사토시 명예교수였다. 이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독립적으로 연구를 진행했지만, 그들의 연구가 모여 기생충으로 고통받던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일본 오무라 교수는 45년간 토양 속에서 항균 성분을 만드는 미생물을 찾고, 이를 배양하는 데에 몰두했다. 결국, 연구에 성공한 그는 항생제 후보 물질로 사용할 수 있는 50여 종의 균주를 추렸다. 미국 캠벨 교수는 오무라 교수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기생충 감염에 매우 강력한 효과를 나타내는 신물질, 아버멕틴을 개발했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감염 시 실명까지 일으켰던 기생충 ‘회선사상충’ 치료 약물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왼쪽부터 윌리엄 캠벨, 오무라 사토시, 투 유유.©Nobel Media AB. Photo: A. Mahmoud

한편, 중국의 투 유유 교수는 한 해 6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했다. 말라리아 또한 모기에 의한 기생충이 원인인 질병이다. 투 유유 교수는 개똥쑥 추출물에서 ‘아르테미시닌’이라는 활성 성분을 발견했는데 이는 지난 15년간 말라리아 치사율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는 획기적인 신약 개발로 이어졌다.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이들처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 간 장벽을 넘어 활발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만리 길을 떠나는 사람들

교육부 통계 자료에 따르면, 현재 국외로 떠나 있는 한국인 유학생은 약 20만 명이라고 한다. 그중, 절반 이상이 선택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한국의 최초 미국 유학생은 누구였을까? 그 주인공은 19세기 인물 유길준이다. 1880년대 초반, 조선은 개화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그때 유길준은 최초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과 미국으로 떠난 사람이었다. 당시, 일본 유학은 도쿄의 게이오대학에서 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거버넌스 아카데미를 등록했다. 당시, 아카데미 수료 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의 여파로 공부를 끝마치지 못하고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그는 바로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유럽을 돌며 견문을 넓히고 동남아시아, 일본을 거쳐 돌아왔다. 이후, 유길준은 유학 생활과 유럽 탐방기, 그리고 자신의 경세관을 담은 책 <서유견문>을 집필해 많은 사람에게 근대문명을 소개했다. 그 당시 유학은, 민족이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필사적인 선택이었다. 

지금은 학문을 더 넓고 깊게 배우기 위해 많은 이들이 유학을 떠난다. 인종을 불문하고 전 세계인들이 해외 곳곳을 누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세상을 넘어 더 넓은 세계, 나와 다른 문화, 삶의 양식,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얻는 것이 가치있기에, 낯선 환경 속으로 기꺼이 뛰어드는 것이다.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유길준의 <서유견문>

초연결 사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인터넷과 통신 기술 등이 발달하면서 네트워크로 전 세계 사람, 데이터, 사물 등 모든 걸 연결할 수 있는 이른바 ‘초연결 사회’이다.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과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앱으로 택시를 호출하고, 동시에 송금도 가능하다.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해외에 있는 제품을 앉은 자리에서 구매할 수 있고, 컴퓨터나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해외 거주자와 소통이 가능하다. 

재택근무 일수를 늘리는 회사, 오직 재택으로만 운영되는 회사도 등장한다. 이처럼 ‘초연결 사회’는 육로나 항로를 통해서만 교류하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편리함과 효율성을 가지고 왔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발전할수록 새로운 윤리와 질서, 규범 정립과 같은 문제들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앞으로 우리는 또 어떤 ‘통로’를 통해, 어떤 형태로 ‘교류’를 이어가게 될까? 

고은비 기자  press49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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