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한국에서 꼬박 30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야 도착하는 곳, 아르헨티나에서 1년간 해외봉사를 마치고 돌아온 한나 로오치 씨. 귀국하던 날, 공항에서부터 집에 와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아르헨티나에서 느낀 감동과 사랑을 가족들에게 말하느라 쉴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아르헨티나에서 보낸 316일간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남미식 인사, 볼뽀뽀

‘아르헨티나’가 해외봉사 파견지로 확정되었을 때,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지낼 환경, 전혀 다른 문화를 생각하며 가슴이 뛰었다. 열정 넘치고, 쿨한 남미 문화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첫날, ‘나는 딱 여기가 체질이네!’ 하고 외쳤다. 날씨도, 음식도, 사람도 다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며칠 가지 못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어느 대학교에 굿뉴스코 프로그램 홍보를 하러 갔을 때였다. 우리 봉사단을 발견한 현지 남학생이 다가왔다. 막 손을 들어 인사하려는데, 순식간에 볼뽀뽀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남미에선 볼뽀뽀로 인사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한국에선 남학생들과 말도 잘 섞지 않던 나였기에 화들짝 놀랐다. 괜히 그 현지 학생을 무안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역시 실제로 부딪히는 건 달랐다. 그래도 1년이 다 되어 갈 때쯤에는 볼뽀뽀가 익숙해졌다. 나와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굿뉴스코 선배들의 체험담에 늘 등장하는 ‘오픈 마인드’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

한국에선 절대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던 나였지만, 처음 본 사람에게도 거리낌 없이 볼뽀뽀로 인사를 건네고, 하루에도 같은 사람에게 5번씩 ‘안녕!’을 외치는 아르헨티나에서 지내며 조금씩 변해갔다. 귀국한 뒤로는 날 만나는 사람마다 “한나야, 너 정말 밝아진 것 같아!”라고 이야기했다. 아르헨티나의 문화가 내게 스며들어서인 것 같다.

#2 힘을 빼면 느낄 수 있는 것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했던 활동이 ‘한국어 아카데미’와 ‘영어 아카데미’였다. 말 그대로 한국어 및 영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였다. 첫 수업을 앞둔 날 저녁, 나는 쉬이 잠이 들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서툰 스페인어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다니….’ ‘수업을 잘못 준비한 건 아닐까?’ ‘학생들이 내 스페인어 실력에 실망하거나 놀리진 않을까?’ 오만 가지 걱정이 몰려왔고,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막상 아카데미를 시작하니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학생들은 집중해 내 수업을 들었고, 더듬거리는 내 스페인어를 지적하기는커녕 인내를 가지고 나를 도와주었다.

어린이 아카데미에 참석한 아이들과 함께 아르헨티나 유명지인 ‘라보카La Boca’에 소풍을 다녀왔다.
어린이 아카데미에 참석한 아이들과 함께 아르헨티나 유명지인 ‘라보카La Boca’에 소풍을 다녀왔다.

미국인인 아빠와 한국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부터 남다른 생김새에 늘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난 늘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했다. 부족하거나 초라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철저히 노력했다. 부족한 모습을 들키기 싫어, 새로운 사람들과는 늘 거리를 두곤 했었다.

이 때문인지 나는 아르헨티나에서 늘 같은 싸움을 반복했다. 내 생각에 나는 나름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봉사활동 기간 동안엔 내 한계를 뛰어넘어야만 하는 일들이 많았다. 그때마다 실수가 드러나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처음엔 떳떳한 봉사자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에 속상해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괜찮다는 것을 알았다. 어깨에 들어간 불필요한 힘을 빼자 비로소 현지인들과 친구, 가족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부족한 사람이 될수록, 따뜻한 현지인들을 향한 감사도 더 커졌다.

#3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만난 사람들

아르헨티나 해외봉사자는 남극 우수아이아, 산티아고 델 에스테로, 피에드라 부에나 등 다양한 지역을 다니며 활동을 한다. 나의 봉사활동 종착지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그곳에선 청소년센터 건축이 한창이었고, 우리도 이를 도왔다. 힘들다고 불평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현지인 봉사자들이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 온 사람들이었다. 3개월간 그들과 함께 지내며 많은 것들을 배웠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청소년 센터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쓰다 남은 세라믹타일을 재활용해서 부엌에 깔 타일을 만들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청소년 센터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 쓰다 남은 세라믹타일을 재활용해서 부엌에 깔 타일을 만들고 있다.

당시 아르헨티나 물가상승률은 점점 높아져 50%를 넘어서고 있었다. 내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지내던 당시에도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부의 세탁기가 고장나 있었지만 수리할 여유가 없어 손빨래를 해야 했고, 한국에선 7만 원이면 살 수 있는 전자레인지가 고장난 지 오래지만 새로 살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외부 후원을 받으며, 오직 센터 건립에만 마음을 쏟고 있었다.

귀국을 앞두고 현지 친구들과 시내 여행을 다녀왔다. 먹는 것부터 이동수단까지 늘 나를 배려하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귀국을 앞두고 현지 친구들과 시내 여행을 다녀왔다. 먹는 것부터 이동수단까지 늘 나를 배려하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자신의 삶을 챙기기보다 청소년들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현지인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에서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며 살아왔던 내 삶이 부끄러웠다.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마무리하며, 한국에 가서도 어떻게 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젠 한국으로 돌아왔기에 센터 건축을 직접 도울 수는 없지만, 센터 건립에 사용될 자재를 마련하거나 후원금을 마련할 프로젝트를 진행해 아르헨티나에서 받아온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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