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뉴스코 해외봉사단 12, 13기 지선경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낸 적이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아픔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걸까요?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보낸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저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잊을 수 없는 인도 이야기, 그리고 아빠와 함께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550일을 여러분과 나눕니다.

 

초등학생 시절 내 생일 선물은 컴퓨터나 핸드폰, 유명 브랜드 의류 등 값비싼 것들이었다. 제법 큰 레스토랑을 운영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어려서부터 풍족하게 살았는데, 부모님이 사업을 확장하면서 수입이 증가해 우리 집 경제 사정은 훨씬 더 부유해졌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의 관계는 어느 시점부터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두 분이 서로 심하게 부딪히는 모습을 보다 보니 나는 매일 아침 안방에 부모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를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안방 문을 열었는데 엄마가 안 계셨다.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침대에서 많이 울었다.

엄마의 가출은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엄마도 떠나는데 누구든지 내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일이 있은 후 모든 사람들을 경계하게 됐고 사람을 사귀는 것조차 두려웠다.

 

오리사에서 열린 어린이캠프에서 학생들에게 태권도 동작을 시범 보였다.
오리사에서 열린 어린이캠프에서 학생들에게 태권도 동작을 시범 보였다.

누구도 붙잡아 줄 수 없었던 학창시절

부모님은 결국 이혼하셨고, 오빠와 나는 아빠와 살았다. 하지만 아빠는 우리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새벽에 퇴근하셔서 내가 학교에 가는 아침에는 주무시다가 하교하고 집에 오면 아빠는 이미 출근한 뒤였다. 얼굴 볼 시간도, 부딪힐 일도 없었다.

엄마가 떠난 지 일 년이 되던 해에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재혼을 한 엄마는 미안하고 보고 싶다는 말을 계속 하셨고, 우린 서로 하염없이 울었다. 항상 엄마가 그리웠던 나는 주말이면 엄마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엄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가 싶더니 내가 5학년이 되었을 때 또 다른 불행이 찾아왔다. 새 가정을 꾸린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엄마가 뇌종양 판정을 받은 것이다. 전화로 소식을 들은 나는 엄마가 돌아가신다는 생각에 하던 일을 멈추고 엉엉 울었다. 시간이 흘러 엄마는 기적적으로 회복됐지만 그때부터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나는 폭력적인 성향이 강했다. 특히 부모님이 이혼하신 직후부터는 여기저기서 싸우고 다녔는데, 6학년 언니 오빠들까지 나를 무서워하고 피할 정도였다. 나를 지키기 위해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싸움을 잘해서 모두 나를 인정해준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 더 독하게 싸웠다. 다른 사람의 상처나 아픔이 느껴지거나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날 혼내는 선생님이 이상해 보였다.

그러던 중, 엄마의 뇌종양이 재발했다. 엄마의 몸 상태는 병을 발견했을 당시보다 훨씬 더 안 좋았다. 오랜만에 엄마를 찾아가면 엄마는 얼굴이 퉁퉁 붓고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암 환자의 모습으로 누워 계셨다. 병 때문에 엄마는 재혼한 아저씨와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이혼을 했다.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그리고 엄마의 뇌종양과 회복, 재발 등 모든 일을 지켜보는데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웠다.

대학에 진학한 후 방학을 맞이하자마자 엄마가 계신 군산으로 갔다. 엄마는 입원실에 누워계셨는데 나를 보고도 반기지 못한 채 멍하게 누워 계시는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렇게 여름방학 세 달 동안 엄마를 간호했지만,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됐다. 결국 엄마는 2011년 8월 12일, 내가 보는 앞에서 임종하셨다. 엄마가 보고 싶어 거의 매일 밤 울었다. 나도 빨리 죽어서 엄마 곁으로 가고 싶었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이 사람 저 사람 사귀며 외로움을 채우려 했지만, 외로움엔 끝이 없었고 공허함만 남았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요즘도 종종 생각나는 인도 시골 풍경. 나의 또 다른 가족들이 사는 곳이다.
요즘도 종종 생각나는 인도 시골 풍경. 나의 또 다른 가족들이 사는 곳이다.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느 날, 내가 다닌 대안학교의 교장 선생님께 연락이 왔다.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셨다. ‘나 같은 사람이 무슨 해외봉사야’라는 생각에 단호히 거절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선생님은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워크숍에 참석할 차비와 회비까지 쥐어주시며 끈질기게 권유하셨다.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데 가기 싫다고 고집만 부리고 있을 수가 없어서 워크숍에 참석했다. 선배들의 체험담, 굿뉴스코 단원들의 변화 스토리가 담긴 연극,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 하면서 나도 해외봉사를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나홀로 다가오는 미래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해외봉사를 가면 이 공허한 마음이 채워질까?’ 내겐 탈출구가 필요했다. 해외봉사로 갈 나라를 선택하던 날, 엄마가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나눴던 대화가 생각났다.

“엄마, 있잖아. 엄마는 다 나으면 뭐가 제일 하고 싶어?”

“응, 선경아. 엄마는 인도로 여행가고 싶어.”

“그래, 엄마. 다 나으면 우리 꼭 인도로 여행가자. 그러니까 다 나아야 해. 알겠지?”

하지만 이후 엄마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고 결국 인도를 가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그때 나눴던 엄마와의 짧은 대화. ‘인도 가고 싶다’는 말과 동시에 설레어 하던 엄마의 표정이 내 가슴에서 잊혀 지지가 않았다. 인도를 가는 것이 엄마를 위한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인도를 선택했다. 하지만 인도에 처음 도착하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냄새나는 거리와 엄청난 쓰레기들, 우리를 쳐다보는 낯선 인도 사람들과 파리를 몰고 다니며 길거리를 활보하는 소들.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벌레를 무서워하는 내게 인도는 최악의 나라였다. 당시 숙소였던 오리사 지부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집 천장에 쳐진 거미줄과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도마뱀이었다. 이곳에서 어떻게 일 년을 보내나 싶어서, 처음 잠자리에 들었을 때 눈물이 찔끔 났다.

 

7명의 단원들과 한마음으로 엮어준 망고 사건

인도 오리사 지부장님은 나를 보자마자 처음부터 내게 ‘딸’이라고 하셨다. 이해할 수 없었다. 친딸을 대하듯 마음을 써주셨고 외출 후 돌아오시면 많은 단원들 중에서 나를 제일 먼저 찾으셨다.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작년 단원들에게도, 또 내년 단원들에게도 똑같이 딸이라고 하고 사랑을 주겠지.’ 그런 사랑이 싫었다. 그래서 그분의 진심을 많이 무시하고 짓밟았다.

하루는 나와 같이 지내는 단원과 다툼이 있었다. 어린이캠프 폐막식에서 선보일 태권무 공연 준비로 인도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바빴다. 그날도 공연준비로 밤늦게까지 연습하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내 가방 앞에 놓인 망고 한 개를 발견했다. 알고 보니 봉사단원들끼리 망고를 실컷 먹고 한 개만 남겨둔 것이었다. 바로 옆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던 나를 부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나를 제외하고 즐겁게 망고 한 박스를 먹은 모습을 상상하니 화가 났다. 사실 망고를 한 개만 남겨둔 것 보다는, 나도 같이 즐겁게 어울리고 싶은데 나만 소외 되는 것 같고 태권무를 가르치느라 힘들어하는 나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아서 더 서운했다.

‘망고 하나만 남겨두면 다야?’로 시작된 말다툼은 크게 번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해서 우습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타지에서 생활하며 예민한 상태여서 사소한 것에도 투정을 부리곤 했다. 결국 말다툼을 한 친구뿐만 아니라 모든 단원들이 나를 피하기 시작했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도 풀어지지 않자 지부장님과 상담을 했다.

“선경아, 네가 지금 친구들과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 거야. 너는 살면서 한 번이라도 자존심을 버린 적이 있니? 자존심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한 번 내려놓아 보면 새로운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네가 먼저 다른 단원들한테 다가가 보렴.”

친구들이 나를 신경쓰지 않을 것 같고, 다가가서 행여나 거절당하면 어떡하나,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지만, 다 내려놓고 먼저 다가갔다. 예상과 달리 단원들은 내가 먼저 말을 걸어서 기뻐해주었다. 우리는 서로 울면서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언니가 싫었던 게 아니라, 먼저 말을 걸고 싶었는데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어. 그 때 망고를 먹을 때도 언니가 싫거나, 언니에게 관심이 없어서 부르지 않은 게 아니었어.”하면서 시작된 이야기에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단원들은 나보다 나를 더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아졌고 7명의 단원들과 더 가까워졌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행복했다

그 후에는 굿뉴스코 오리사 센터 건축 봉사를 하며 지냈다. 아침 일찍 공사를 시작해 새벽 3시에 끝나는 날도 있었다. 비가 장대처럼 쏟아져도 우린 그냥 비를 맞으며 공사를 하기도 했다. 같이 간 단원들과 함께하니 즐겁기만 했다. ‘마음으로 산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신기한 것이, 일이 아무리 고돼도 하나도 짜증이 안 났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진짜 행복했다. 인도에 있으면서 이곳저곳을 많이 여행하기도 했다. 쥐가 나오는 소똥으로 지은 집에서 자보고, 3일 동안 무전여행으로 씻지 않은 채 하루 10시간 동안 걸어보기도 했다. 하루에 수십 번씩 일어나는 정전들이, 끔찍하게도 싫어했던 벌레들이 익숙해졌다. 행사를 준비하며 난생 처음 수많은 사람 앞에서 댄스도 했다. 단원들과 의견을 맞춰 가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가며 우린 마음이 더욱 가까워졌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신기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부유하게만 살았던 내가, 남의 아픔을 생각할 줄 모르는 내가, 술과 담배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보냈던 내가 인도에서 작은 것 하나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배웠다.

 

대학교 졸업식에 오신 사랑하는 아빠. 아빠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대학교 졸업식에 오신 사랑하는 아빠. 아빠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셨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550일

인도에서 아빠와 문자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우리 딸 사랑해’라는 아빠의 말에, 그동안 아빠가 내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나만의 오해였음을 알게 됐다. 그때부터 아빠에게 마음을 열었다. 인도에 다녀온 뒤 180도로 변한 내 모습을 보고 아빠는 행복해하셨다.

내가 인도에 한 번 더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아빠는 네가 하는 건 다 믿어. 네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다 해줄게. 아빠는 우리 딸 믿으니까.”라며 망설임 없이 인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셨다. 그런데 인도에서 일 년을 더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아빠는 암에 걸려 앓고계셨다. 엄마에 이어 아빠마저 암 때문에 투병생활을 하셔야 한다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것도 모른 채 인도에서 2년 동안 나 혼자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 같아 아빠께 너무 죄송했다.

인도에서 돌아온 뒤, 아빠와 함께 살며 태권도 사범 일과 사서직 일을 병행했다. 아빠는 당신이 암으로 아픈 상황에서도 내가 일하러 나갈 때면 새벽부터 일어나 밥을 차려주시고 늘 도시락을 싸주셨다. 바빠서 간혹 밥을 거르면 속상해하시며 내 건강을 걱정하셨다.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가끔 아빠와 둘이 오순도순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나는 아빠가 그렇게 말이 많고 재미있는 사람인줄 몰랐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생기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에 대해 고민 상담도 해주셨고,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기 보다 현명한 어른으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와 함께 매일 밤 수다를 떨며 TV를 보던 시간이 내겐 너무 꿈만 같다. 약 1년 반 뒤, 아빠는 병세가 악화되어 입원을 하셨다. 그리고 암을 이기지 못하시고 작년 여름에 엄마 곁으로 가셨다.

6년 전에 엄마를 먼저 보내드리고 이어서 아빠와 이별하면서 주변 사람들이 내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엄마를 잃었을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 이젠 슬픔에 대처하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인도에 처음 갔을 때 봉사단원들을 지도해 주시는 지부장님이, 엄마를 향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사는 나를 보고 해주신 말이 있었다.

“선경아, 엄마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지만, 자꾸 슬픔에 빠지는 건 네가 슬픈 생각만 붙잡고 있기 때문이야. 그 생각이 너를 약하게 만들고, 네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어. 슬프다는 생각을 한 번 내려놓아봐.”

내 마음 속 깊숙한 곳에 담아두었던 슬픔들을 지부장님께 털어 놓고 이야기 하면서 나를 괴롭히던 생각의 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선경이는 슬프고 불행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가 여전히 보고 싶고 그리웠지만, 그 슬픔에 나의 모든 것을 내주진 않았다. 내가 엄마를 더 사랑해서도, 아빠를 덜 사랑해서도 아니다. 다만 인도에 다녀오면서 내 마음을 감정적인 생각들에 내주지 않는 법을 배웠고, 나를 향한 아빠의 진심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덕분에 지난 20년 동안 겪은 아빠보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함께 보낸 일 년 반 동안 아빠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 하루하루 아빠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 550일은 내게는 잊지 못할, 하늘이 주신 기회이자 축복이었다. 인도에서 내 마음을 단련하는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부모님 두분을 모두 잃고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었을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성일이(오빠), 선경이는 세상이 힘들고 슬퍼도 아빠의 오뚜기 정신처럼 다시 일어서서 씩씩하게 살면 좋겠다.”

아빠가 우리 남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아빠의 사랑을 평생 모르고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인도에서 아빠를 향해 마음을 연 그 시간부터 나는 아빠를 정말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도를 절대 잊을 수 없다. 엄마에 대한 슬픔에서 나를 건져내주고 아빠의 사랑을 알게 해준 그 곳. 엄마와 아빠를 떠올리며, 언젠가 인도에 꼭 다시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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