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ia, 12억 인구 속에서 반짝였던 12달 (2)

 
 

내가 인도로 간 세 가지 이유
내가 해외봉사 파견국으로 인도를 선택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큰 나라’였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건축업을 하셔서 나는 중국에서 5년 정도 생활했고, 중학교도 중국에서 마쳤다. 내가 중국에서 지내면서 느낀 것은 ‘인구가 많은 나라는 대개 땅도 넓고 자원도 풍부해서 느리지만 꾸준히 발전을 계속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도의 문화와 언어를 배워두면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둘째는 영어다. 인도는 과거 영국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기에 적합한 나라였다. 셋째, 이왕 해외로 가서 현지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면 개발도상국에 가서 어려움도 경험하며 나 자신을 단련하고 싶었다.

초가집과 고층빌딩이 공존하는 도시 첸나이
내가 간 도시는 첸나이였다. 델리, 콜카타(옛 캘커타), 뭄바이(옛 봄베이)와 함께 인도의 4대 도시 중 하나다. 도심에는 쇼핑물, 상점가, 고급음식점 등이 즐비하지만 빈부격차가 심하다 보니 초가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첸나이는 굉장히 보수적인 분위기로 유명하다. 버스를 타면 여자가 앉는 좌석이 있는데 남자가 절대 앉을 수 없다. 계급·부족·종교 간의 구별 또한 엄격하다. 내가 첸나이에 가서 알게 된 어느 젊은 커플은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자 쪽 부모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여자 쪽 집안의 계급이 높았기 때문이다. 

▲ 왼쪽: YMCA가 운영하는 장애고아 교육시설에서 문화공연을 한 뒤 IYF를 홍보했다. 오른쪽: 첸나이 시골마을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 왼쪽: YMCA가 운영하는 장애고아 교육시설에서 문화공연을 한 뒤 IYF를 홍보했다. 오른쪽: 첸나이 시골마을에서 만난 아이들과 함께


첸나이에 대학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
별다른 관광명소가 없어 덜 알려졌지만, 사실 첸나이는 인도 남부에서도 행정·정치·경제의 중심도시다. 교육제도도 잘 갖춰져 있어 330여 개의 초·중·고등학교에서 14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자동차, 컴퓨터, IT 산업의 발달로 대규모 공장이 밀집해 있는 만큼 여기서 일할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학교가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첸나이에서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유난히 대학들이 자주 눈에 띈다. 대학이 세 개나 나란히 줄지어 있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도 대학은 꼭 하나씩 자리잡고 있었다.

부담과 몸으로 부딪히며 나를 성장시켰다
한국, 태국, 멕시코, 그리고 우크라이나 둘…. 첸나이로 파견된 5명의 굿뉴스코 단원들은 저마다 피부색도 언어도 달랐다. 서로 말도 잘 통하지 않아 서툰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지만, 마음만큼은 하나였다. 우리 단원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했던 활동은 9월에 있을 월드캠프 홍보와 준비였다. 캠프를 홍보하기 위해 내가 가 본 대학만 30곳이 넘는다. 인도는 하도 땅이 넓어 대학에 가려면 아침부터 적어도 2시간은 버스를 타고 가야했다. 덕분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종종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친 적도 있다.
캠프를 홍보하기 위해 매일 매일 인도 대학생들 틈바구니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인도의 문화를 몸소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기업체나 공장 등도 50여 곳 이상을 찾아다니며 후원도 요청했다. 물론 영어로! 그 전까지 영어 공부를 많이 한 편은 아니었지만 인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월드캠프 행사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하고 후원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영어실력이 부쩍 늘었다. 전문적인 영어 단어나 표현 등은 잘 모르지만 웬만한 말은 동시통역을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캠프 홍보를 하는 동안 영어 외에 얻은 소득이 하나 더 있다. 한국에서 내 전공은 경영학이었다. 아웃소싱, CSR, ERP 등 여러 가지 경영학 용어를 책으로 배웠지만 정확하게 어떤 개념이고 어떻게 응용되는 것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기업체를 상대로 부지런히 캠프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저절로 그런 경영학 용어의 개념을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인도에서는 인도 법을 따르라
첸나이 월드캠프를 3개월 앞두고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며 본격적으로 캠프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매주 3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워크숍을 열어 댄스를 가르치고 한국어·중국어 등 외국어 클래스도 운영했다. 캠프 기간 동안 진행할 미니 올림픽도 직접 치러보면서 실제 캠프 때 참가자들을 리드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실전감각을 익혀나갔다.
하지만 늘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 인도 학생들이 매번 늦는 바람에 한 번도 제시간에 워크숍을 시작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가령 워크숍 시간이 토요일 오후 1시라면 학생들이 1시에 모이는 게 아니라 1시 반부터 모이기 시작해서 2시가 되어야 시작할 수 있었다. 심지어 3시에 도착해서 ‘모임 끝났니?’ 하고 묻는 학생들도 있었다. 워크숍에 학생들이 몇 명이나 올지 파악해서 준비를 해 놓으면 꼭 3~4명, 많게는 5~6명씩 오지 않았다.
‘아, 인도 학생들은 너무 게을러. 시간 약속도 지키지 않고.’ 아쉬움은 불만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내 기준이 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IYF 운영위원을 맡고 계신 분과 약속이 있어 찾아뵈러 가던 중 차가 너무 많이 막히고 지리도 몰라 1시간 넘게 늦고 만 것이다. 죄송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 내게 그분은 “아, 괜찮아. 원래 인도는 차가 많이 막혀서 늦을 수밖에 없어. 난 1시간 뒤에 올 걸 다 알고 있었는걸” 하고 웃으시며 물을 건네주셨다.
워크숍에 오는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토요일 수업이 마치면 학생들은 대개 IYF 센터에서 1시간 반 거리에서 오기 때문에 배가 고파 점심을 먹고 오거나 버스가 막히는 바람에 늦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학생들 사정도 모른 채 내 관점으로만 그들을 바라본 게 부끄러워졌다. 자원봉사자 학생들에게도 사과의 말을 전한 나는, 그때부터 인도 사람 편에서 생각하는 넓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

별★ 5개짜리 리조트에서 펼쳐진 행복한 캠프
그렇게 발로 뛰며 월드캠프 홍보와 후원 요청에 열을 올리던 어느 날, 우연히 현대자동차 인도법인 임원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전 약속 없이 찾아갔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왔다. 두 번째로 전화했을 때는 “그래요. 어떤 행사인지 한 번 보기나 합시다” 하고 시간을 내 주었다.
그 임원과 의논한 끝에 월드캠프 기간에 사용되는 플래카드와 포스터, 팜플렛, T셔츠 등에 현대 로고를 넣어 홍보를 해 주는 조건으로 800만 원을 후원받을 수 있었다. 그 전까지 많은 회사를 찾아다녔고 어느 정도 후원이 성사될 것처럼 보이다가도 얻는 게 없어 실망이 컸다. 그런데 뜻밖의 후원을 얻게 된 것이다. 약 500여 명의 인도 학생들과 함께 별 5개짜리 리조트에서 캠프를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뻤다. 평소에는 오기 힘든 훌륭한 리조트에서 게임도 하고 공연도 관람하고 마인드 강연을 들으며 즐거워하는 학생들을 보니 나도 행복했다.

 
 

대화와 토론이 일상인 인도 사람들
인도 사람들은 이야기 나누거나 토론하기를 좋아한다. 길을 가다가 아무 집에나 들어가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자원봉사자입니다.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하면 누구나 환영하며 이야기상대가 되어 주었다. 순박한 인도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아픔과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상대에게 마음을 열며, 이야기를 마치고 일어설 때쯤이면 이미 마음이 통하는 친구 사이가 되어 있다.
인도 사람들은 토론하는 것도 좋아한다.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으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다가와 구경하다가 각자 자기의 의견을 제시한다. “난 이쪽 말이 맞는 것 같아.” “아냐, 그 상황에서는 누구도 어쩔 수 없었어.”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하면 좋겠는데….” “대체 무슨 일이에요?” 이렇게 절대 끝나지 않는 토론이 펼쳐진다. 법률안 하나가 국회를 통과하려면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그만큼 토론을 좋아하기 때문에 ‘인도에 정당政黨이 몇 개나 돼요?’라고 물으면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 인도에서 얻은 꿈
인도에서 오래 산 외국인들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내가 인도에서 1년을 살았을 때는 ‘인도는 이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년 넘게 산 지금은 ‘인도가 어떻다’고 말할 수 없다.”
인도는 넓기 때문에 지역마다 발전 정도와 분위기가 다 다르고 셀 수 없이 많은 언어가 존재한다. 수도인 델리는 지하철이 존재하는 등 체계적으로 잘 발달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교통체증이 심각하고 위생상태도 좋지 않다. 반면 오지인 오리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가난한 인도의 모습 그대로다. 시내 중심에서 벗어나면 숲이 울창하고, 지하수는 깨끗해서 바로 마실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호랑이가 나오는 지역도 있다고 한다. 또 한국인들과 비슷하게 생긴 외모에 된장과 비슷한 전통음식을 만들어 먹는 사람들이 사는 나갈랜드라는 도시도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실제 인도의 1000분의 1도 경험하지 못하고 온 것 같은 느낌이다. 도시마다 저마다의 색깔과 문화가 있고, 굉장히 신비스러운 한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다. 그렇게 다양한 인도의 문화에 대한 개방된 시각과 자세야말로 내가 인도에서 얻어온 가장 큰 재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도에 다녀온 후 나는 새 꿈이 생겼다. 청소년 지도자가 되어 인도에 돌아가 그곳의 청년들을 리더로 키우는 것이다. 인도는 12억 인구의 절반 이상이 25세 미만인, 세계에서 가장 젊은 나라다. 오늘날 청소년 문제는 세계 어느 나라나 심각한 문제이며 인도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올바른 마인드만 갖춘다면 인도는 앞으로 무한하게 발전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내가 키워낸 청년 리더들이 인도를 부강한 나라로 이끌어갈 그날을 꿈꾸어 본다.

첸나이(옛 마드라스)
별명: 남인도로 가는 관문, 인도의 디트로이트 (자동차산업이 중심산업)  위치: 인도 동쪽 벵골만 연안의 항구도시  개척년도: 1869년  면적: 181.1km2   인구: 468만 1087명  공용어: 타밀어   특징: 타밀 나두Tamil Nadu주의 주도

글 | 최유업(조선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굿뉴스코 인도 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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