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stern Europe_내 인생의 꿈을 만난 대륙에서! (1)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들이 모인 곳, 서부 유럽! 하지만 그곳에도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붐을 일으키고 있는 한국 문화를 배우고 싶어하는 젊은이들부터 인생의 노년을 쓸쓸하게 보내고 있는 노인들까지…. 진심을 담아 봉사하는 동안 인생의 꿈도 찾은 세 청년의 이야기!

 
 

내 귀를 솔깃하게 한 굿뉴스코 해외봉사
2010년 대학에 갓 들어온 내 삶은 특별한 목표나 꿈도 없이 망망대해를 이리저리 떠다니며 표류하는 나뭇조각과도 같았다.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복무하는 동안 틈틈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나의 꿈은 무엇인가?’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을 고민했다. 내가 보기에도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정말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회에 나가면 여태까지 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경험하리라 다짐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들 이른바 ‘버킷리스트’를 수첩에 적기 시작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빵이랑 우유 같이 먹어보기(이게 뭐 대단한 거냐고 웃을지 모르지만, 군대에서는 계급이 낮으면 먹는 것도 맘대로 할 수 없다)
- 나만의 노래 만들어 부르기
- 마추픽추 올라가기
- 버뮤다 삼각지대 탐험하기
내 버킷리스트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끊임없이 배우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제대 후 사회에 나와 보니, 그동안 내가 모르고 살았던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벗어나 해외에 가면 얼마나 더 배울 게 많을까?’ 해외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도 점점 커져갔다. 그러던 중 사촌들이 굿뉴스코 프로그램을 통해 유럽과 아프리카로 해외봉사를 다녀왔다는 소식에 귀가 솔깃했다.
‘이건 놓쳐선 안 될 기회야. 지금 아니면 언제 또 해외를 체험할 수 있겠어?’
다른 나라에서 지내다 보면 군대에서 고민하던 주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평소 뚜렷한 주관도 없는 성격이라 이제는 내가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삶을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치열한 경쟁사회, 취업사회라는 흐름에 남들과 똑같이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굿뉴스코 지원은 그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열정의 표현이기도 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2013년 1월 14일, 제대한 지 사흘 만에 굿뉴스코 워크숍에 참석하면서 나와 굿뉴스코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내 삶에 이렇게 가슴 떨린 순간이 있었을까?
“네 뜻이 그렇다면 다녀오도록 해라.” 처음에는 해외봉사 나가는 것을 반대하시던 아버지의 입에서 드디어 허락이 떨어지던 순간의 짜릿함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평생 이렇게 떨렸던 적이 있었을까?
‘와, 내가 드디어 해외로 나가다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가기로 한 나라는 오스트리아였다. 오스트리아가 어떤 나라인지 사전조사를 해 보지도 않았고, 심지어 무슨 언어를 쓰는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워낙 어렵사리 부모님의 승낙을 받았기에 해외봉사라는 기회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을 뿐! 물론 기대 또한 컸다.
도쿄를 거쳐 오스트리아까지는 13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하는 먼 여정이었다. 저가항공을 이용하느라 가져갈 수 있는 짐의 무게에 제한이 있어 나와 두 명의 동료 단원들은 짐과 옷을 겹겹이 껴입다시피 하며 출입국 수속을 마쳤다. 오스트리아에 도착해 공항에서 매니저님과 슬로베니아인 친구 토마스를 만났을 땐 기분이 얼떨떨했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그제야 오스트리아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어렸을 때부터 봉사정신의 중요성에 대해 자주 들어왔고, 봉사활동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도 있다. 해외봉사단으로 오스트리아에 오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한국보다 선진국인 유럽에서 과연 내가 봉사할 게 있을지 의문도 많이 들었다. 단지 오스트리아 땅을 밟으며 현지 사람들과 마주하는 삶 자체가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선생님 & 민간외교 사절단이 되어
오스트리아에서 우리가 한 봉사활동은 크게 교육봉사와 근로봉사로 나뉘어진다. 우선 교육봉사! 우리 단원들은 한 달에 한번씩 오스트리아 현지 초등학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매니저님 부부와 함께 알프스 끝자락에 있는 젬머링Semmering이라는 마을에 몬테소리 사립학교가 있었다. 2012년 말부터 오스트리아 굿뉴스코와 교류하게 된 학교인데, 우리는 그곳에 며칠간 머물며 한국어, 한국전통놀이, 태권도·태껸, 민요·동요, 붓글씨, 역사 속 인물소개 등 한국문화 수업을 진행했다. 학교 규모가 작아 학생들이 많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그 한국문화 수업 시간은 우리에게 더 소중하게 다가왔다. 레안델-발리 형제와 그 어머니이자 교사인 베로니카 선생님, 라우지, 루벤 등…. 이들은 실력도 부족한 우리에게 항상 마음을 열고 수업에 임했고, 한국에 대해 배우려는 학구열도 대단했다. 지금도 그들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최근 아쉽게도 학교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너무 아쉬웠고 그들이 그리워졌다.
유럽지역 굿뉴스코 단원들이 연합해 ‘코리안 캠프’도 진행했다. 기획, 제작, 홍보 등으로 팀을 나누어 준비한 이 캠프는 오스트리아 외에도 독일, 체코, 헝가리, 포르투갈, 루마니아 등에서도 개최된, 말 그대로 다국적 캠프였다. 유럽에까지 K팝, 가수 싸이, 한국드라마 등 한류 붐이 일면서 우리나라를 보다 실질적으로 알리자는 것이 캠프의 취지였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강남스타일> 춤을 선보이며 전단지도 나눠줬고, K팝, 붓글씨, 태권도, 드라마로 배우는 사투리 등 다양한 아카데미도 진행했다. 캠프 일정 사흘 동안의 프로그램 스케줄을 우리 단원들이 직접 준비하고 추진했던, 이색적인 봉사활동이었다. 작은 소품 하나도 직접 만드는 등 정성을 기울인 만큼 캠프를 마쳤을 때의 뿌듯함도 참으로 큰,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 중 하나였다. 굿뉴스코의 주체인 IYF가 설립된 목적과 청소년들에게 함양해 주고 싶은 마인드 등을 한국의 문화를 통해 쉽고 친근하게 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던 알프스 농장에서의 농활
두 번째로 근로봉사! 양로원을 방문해 오스트리아의 할아버지 할머니들께 건전댄스, 아카펠라, <아리랑> 등의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공연 중간에는 우리 소개도 하고 오스트리아에 와서 느낀 현지인들의 사랑 등을 이야기하며 마음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공연이 끝나면 그분들은 정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내줬고, 우리는 너무 뿌듯했다. 그렇게 알게 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찾아가 소소한 이야기도 나누는 등 말벗이 되어 드렸다. 독일어에 능숙하지 않아 소통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뜨거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살아온 환경이나 문화도 달랐지만, 오스트리아인 할아버지와 한국인 청년은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위해 서로의 말, 눈빛, 표정, 제스처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공연봉사는 경청하는 자세를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알프스 농장 체험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다. 한국에서도 하지 않던 농활을 오스트리아까지 가서 한 셈이다. 처음 알프스의 농장으로 봉사를 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뭔가 파란 하늘과 푸른 벌판, 요들송이 울려퍼지는 낭만적인 풍경을 떠올렸다. 하지만 현실은…! 다 익은 과일을 따고,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들을 치우는 일이 우리의 주 임무였다. 나뭇가지를 그대로 두면 해충이 생겨 나무에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소나 양, 닭 등 가축의 배설물을 치우는 일도 했다. 하루종일 외양간에 쌓인 소 배설물을 치운 적도 있는데, 거짓말 안 보태고 사흘 동안이나 몸에 밴 냄새가 사라지지 않았다.

▲ 알프스 농장 체험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과일을 따고 나뭇가지를 줍고 하루종일 가축들의 배설물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 알프스 농장 체험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과일을 따고 나뭇가지를 줍고 하루종일 가축들의 배설물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의 높은 의식수준을 경험한 뜨거웠던 10분
한국의 경제규모는 세계 13위로 선진국에 속한다. 부강한 나라가 많은 유럽과도 비슷한 수준에 오른 한국을 보며, 이제 우리도 물질적으로뿐 아니라 정신적·의식적으로 유럽과 견줄 만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유럽인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시민의식이나, 인간에 대한 존중, 적극적인 감사의 표현 등은 아직 우리와 많은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처음 비엔나에 갔을 때 지리에 익숙지 않아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을 때가 많았다. 10명 중
7명은 정말 친절하게 내가 외국인임을 감안해 길을 알려주었다. 나머지 3명은 내가 가려는 장소까지 직접 데려다 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삶의 목적에 있어 돈보다는 가족을 우선시한다는 사실도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주 5일 근무제로 절대 시간외 근무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상점은 오후 7시가 되면 의무적으로 문을 닫아야 한다. 밤이 되면 중심가나 몇몇 상점을 제외하면 가로등 불빛밖에 없고, 9시가 넘어가면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저녁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낸다는 의식이 뿌리내려 있기 때문이다.
또 음악회, 연극, 오페라, 발레, 축제 등을 자주 관람하는 것을 보며 문화생활을 즐기는 수준 역시 남다른 것을 보았다. 한번은 오페라 <카르멘>을 맨 뒷좌석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의 막이 내려가자 모든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야말로 손바닥에 불이 날 정도로 10여 분 동안 열렬하고 격렬한 박수로 가수들에 대한 찬사를 표현했다. 가수들은 몇 번이나 무대로 나와 인사하고 들어가고를 반복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의 수준 높은 공연문화와 의식수준을 보여주는 그 뜨거운 10여 분의 박수는 내게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내 마음의 견인차가 되어준 굿뉴스코
오스트리아에서 탄댐(자기 언어를 외국인에게 가르치고 그 외국인의 말을 배우며 사귀는 친구)을 하고 캠프를 치르며 친구들을 사귀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저마다 자유분방한 꿈을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뭔가 관심이 생기면 주저 없이 뛰어들고, 설령 그 길이 주변 사람들이 가는 길과 다를지라도 자신이 좋아하면 열정을 다해 배우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문득 언어가 달라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에서의 지난 반년을 떠올렸다. 양로원이나 대학에서 경청의 중요성을 깨달으면서 나는 독일어를 들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들은 것을 말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독일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매력을 느끼면서 내가 열정을 할 수 있는 일, 인생의 목표를 찾았다. 바로 독일어 통역이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도 틈틈이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독일어 동화책을 읽고, 독일어 뉴스 사이트에 들어가는 등 감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공부하는 중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나는 내 인생을 끌어갈 마음의 견인차를 얻었다.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으면 내가 만나는 사람이나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소중히 여기면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주의를 기울이면 열정을 쏟고 온 마음을 다하게 된다.
11개월 간의 오스트리아 생활은 나를 한층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누구를 만나도 해외봉사를 가서 겪고 느끼고 깨달았던 것들을 이야기하며, 꼭 해외봉사를 다녀오라고 권하고 싶다. 나 역시 한 번 더 기회가 되면 변화의 땅 오스트리아에 한 번 더 다녀오고 싶다.


글 | 권순범(인제대학교 보건행정학과 2학년)
일러스트 | 김진복, 이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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