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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닦기 시작한 제자[스승의 날 특집]④선생님, 다시 만났습니다
김소리 기자 | 승인 2018.05.09 11:03

제자 | 안경훈 은사 | 서인보 선생님(고3 담임)

그림을 혼자서 그리기 시작한 지 어느새 8년이 지났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업을 뒤로하고 무작정 그림을 그렸는데, 선생님들이 나에게 그림을 그리더라도 공부는 꼭 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그림만 잘 그리면 성공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배우지 않았고 선생님들이 하시는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선생님들은 때때로 나를 교무실로 불러서 진로에 대해 물으시며 조언을 해주시려 하셨다. 그러면 나는 나름대로 배워 쌓은 지식을 동원해 선생님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한 번 두 번 대화를 나누다 보니 생각지 못한 선생님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선생님들은 내가 가려는 길을 막거나 틀렸다고 지적하는 게 아니었다. 걱정하며 같이 생각해주려 하시는 거였다. 잘못해서 꾸중을 들으러 갔든 단순히 여쭤볼 일이 있어서 갔든 교무실을 들락날락하며 선생님들과 짧은 대화라도 나누면 선생님의 진심을 알게 되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선생님들의 허락을 받고 수업시간에도 그림을 그렸다. 선생님들이 수업 진도를 나간 뒤 가끔씩 삶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러면 그리던 것을 멈추고 들었다. 그런 시간이 가장 집중이 잘 되었던 것 같다. 선생님들은 주로 인생 선배로서 경험담을 이야기해 주셨는데, 모범적인 사례들도 있었지만 주로 살면서 아쉽고 후회스러웠던 경험들을 들려주시며 예로 들어 제자들은 좀 다르게 살길 바란다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지금까지 기억 나는 것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고3 때 담임 선생님이셨던 서인보 선생님이 해주신 ‘공부는 인생길에 고속도로를 내는 일과 같다. 뚜렷한 목표가 없는 사람은 일단 고속도로부터 닦아라. 언젠가 꿈과 목표가 생기면 그 도로를 사용할 때가 온다. 길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며 나에게 “경훈이는 목표가 있다고 했지? 그러면 앞으로 죽 달리자”라고 하셨다.

이후 졸업을 하고도 몇 년 동안 계속해서 미술 교재와 인터넷 동영상 등을 이용해 혼자 그림 실력을 쌓아갔다. 열심히 한 덕분에 그림은 잘 그리게 되었고 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림을 왜 그려야 하는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이 생겼고 방향을 잡지 못해 갈수록 답답해졌다.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표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보니 내 그림은 상업적인 용도 외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해 보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서양미술사를 배우기 위해 역사 공부를 했고, 빛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 과학 공부도 했다. 좋아하는 외국 작가들과 소통하기 위해 영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고, 결국 모든 것이 사람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는 생각에 인문학을 공부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는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점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게 절실히 느껴졌고, ‘함께 의논하고 방향을 제시해주고 조언해 줄 선생님이 계셨다면…’ 하는 아쉬움이 간절해졌다.

그럴 즈음에 서인보 선생님이 말씀하신 고속도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림 세계에도 길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되자 ‘고속도로를 내라’ ‘앞으로 달려가라’는 선생님의 조언이 이해가 갔다. 나는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는 좁은 생각으로 선생님이 먼저 경험한 것들을 하찮게 여겼는데,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것들이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선생님이 해주신 말씀이 기억나자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졌다. 얼마 전 친구들에게 선생님 전화번호를 물어 떨리는 마음으로 연락을 드렸는데 선생님이 “어쩐 일이냐?” 하시며 무척 반가워하셨다. 선생님 목소리를 들으니 순간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쭈꾸미볶음 식당을 약속 장소로 정하고 선생님을 만났다.

무슨 말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하다가 같은 반 친구들 중에 선생님을 찾아온 학생이 있는지 여쭤보았는데, 이름을 들어보니 자주 말썽을 부린 친구들이었다. 문제아가 선생님을 더 잘 찾아오는 것 같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웃으시며 “너도 그림 그린다며 자퇴한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하셨다. 잊고 있었는데 자퇴하겠다고 고집부리던 나를 선생님이 어르고 달래면서 그림을 그리더라도 학교에 다니면서 하라고 당부하셨던 기억이 났다.

수업시간에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해 주셨던 것과 끝까지 학교를 다니고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걸 생각하니 새삼 감사해 “선생님, 가르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졸업하고 선생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생각날 때가 많았어요.”라고 말씀을 드렸다. 회사를 다니다 그만두고 교직에 몸담게 되신 선생님은 “회사 안 다니고 교사 되길 잘한 것 같다. 학생들한테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거 같아 이야기를 하지 않곤 했는데, 내일 학교에 가서 다시 열심히 이야기해줘야겠네” 하시며 웃으셨다. 선생님 이야기와 선생님 마음을 나중에야 기억하고 이해하게 될 학생들을 가르치러 매일 발걸음을 옮기실 선생님을 생각하니 존경스럽고 또 마음이 따뜻해졌다.

학교도 가지 않고 그림 공부만 하려고 했던 안경훈 씨. 서인보 선생님이 타이르고 기다려주신 덕분에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서 선생님은 아직도 017 번호에 모토로라 폴더 휴대폰을 쓰고, 승용차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시는 분입니다. 안경훈 씨는 소중하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며 사시는 선생님의 마음가짐을 본받고 싶다고 합니다. 위의 그림은 안경훈 씨가 직접 그렸습니다.

김소리 기자  sori35@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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