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캐나다 원주민 그들에게 희망을 제2편 ①

지난호에서는 캐나다 원주민 마을로 가서 캠프를 하고 온 해외봉사단원 조영진 씨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가 소개한 원주민들의 모습은 그동안 우리가 알던 원주민들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광활한 대륙을 누비며 살던 용맹한 전사, 자연에서 배운 예지叡智로 부족들을 다스리던 추장들의 삶은 과연 어땠을까. 그리고 그 후손들은 조상의 기상과 지혜를 언제부터 잃은 걸까.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북미 대륙에서 살아가던 원주민 부족들의 삶은 한 마디로 ‘교류와 연합’이었다. 원주민들은 추장과 어른들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 생활했다. 이웃에는 양식이 없는데 우리 집만 배불리 먹는 것은 원주민 마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양식이나 담요가 남으면 다른 마을사람에게 나눠주고, 부족하면 얻어다썼다. 양식이 떨어지면 다 같이 굶었으며, 어쩌다 들소 떼를 만나면 사냥해 모두가 모여 잔치를 벌였다. 아기에게 새 이름을 지어주는 등 기쁜 일이 있을 때면 함께 축하했다. 자기 전에는 모닥불 곁에 둘러 앉아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피로를 풀었다. 서로서로 이어진 드림캐처의 그물처럼, 원주민 부족들의 삶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의 마음 또한 한가족처럼 촘촘히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마음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원주민들의 꿈과 행복도 산산이 깨지기 시작했다.

원주민들, 이렇게 살았다.
용맹, 민첩함, 호연지기浩然之氣…. 우리가 어려서부터 본 책, 영화, 다큐멘터리에 나타난 미국과 캐나다 원주민의 모습들이다. 각종 사료와 문헌에 남아 있는 그들의 생활상을 하나씩 살펴보자.

의식주
원주민들은 야생에서 의식주를 해결했기에 늘 생명을 위협받는 처지에 있었다. 언제 어디서 맹수나 외적이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밤에는 절대로 소리를 내서는 안 되었다. 아이들도 밤에는 절대로 울지 않았다. 또 아침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났다. 새벽녘이 사냥감을 발견하기 가장 쉬운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외적들도 주로 아침에 습격을 해왔다.

원주민들은 들소가죽 옷을 입고, 들소가죽으로 만든 ‘티피’라는 텐트에서 기거했다. 그 텐트에서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는 한여름과 칼바람이 살을 에는 한겨울을 났다. 원주민 출신 작가 ‘오히예사’에 따르면, 사흘간 눈이 내리는 바람에 땔감도 구하지 못한 채 텐트 안에서 지내면서 사흘 내내 눈보라를 맞은 적도 있다고 한다.

원주민의 주식은 직접 사냥한 짐승과 물고기, 야생에서 채취한 쌀, 뿌리, 들딸기, 과일 등이었다. 양식을 매일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추장과 어른들은 어떻게 해야 적은 양식으로 부족원 모두가 지낼 수 있을지 치열하게 고민했다. 하루 한두끼를 먹는 것은 예사였으며, 작은 새의 날개 하나로 하루를 버틸 때도 있었지만, 불평하기보다 오히려 감사해 했다.

춘궁기春窮期가 되면 어른들은 양식을 노약자에게 양보하고 자신들은 굶었다. 먹을 것이 풍족할 때도 원주민들은 금식을 했다. 위기상황에서 버틸 체력과 정신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교육
원주민 아이들에게 학교나 정규수업, 교과서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집안 어른이나 마을 노인들이 선생님이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과거 부족의 역사를 빛냈던 위대한 추장이나 조상들의 이야기, 부족의 역사나 전설을 들려준 뒤 똑같이 외우게 했다. 또 맹수를 사냥하거나 큰 강을 헤엄쳐 건너는 등 야생에서 맞닥뜨린 고난과 부딪혀 싸우면서 마음의 힘을 키웠다.

위계질서
노인들은 늘 공경을 받았으며, 젊은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호된 꾸중을 했다. 젊은이들은 그 꾸중을 달게 듣고 마음에 새겼다. 농사나 사냥 경험이 풍부한 어른들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었다. 특히 할머니들은 어느 계절에는 어느 지역에 가면 어떤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지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을 정도였다. 노인의 죽음은 곧 그 마을의 지식을 집대성한 마을도 서관이 불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친화
‘땅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땅은 그 자식들인 동물과 새, 물고기, 그리고 모든 인간을 먹여 살린다.’ 미국 원주민 파카노켓족의 추장 마사소이트의 말이다. 원주민들에게 땅은 의식주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자, 훌륭한 학교였다. 원주민 아이들은 동물들이 새끼를 보살피는 것을 관찰하며 가족애와 헌신을 배웠고, 폭풍과 천둥의 무서움을 목격하며 대자연의 위대함 앞에 겸손해지는 법을 배웠다. 물이나 음식을 먹기 전 그 일부를 땅에 떨어트림으로써 자연에 감사를 표했다. 또 생전 처음 본 약초는 함부로 캐지 않았다. 혹시 그 약초가 멸종되지는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이웃 부족들과의 관계
원주민들은 용감했지만 잔인하지는 않았다. 다른 부족과 싸워도 오늘날 축구를 하다 뒤엉켜 입는 정도의 부상을 당할 뿐이었다. 서로를 죽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전사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머리를 산발한 채 30일 동안 애도를 표하며 지냈다.

원주민의 리더이자 멘토였던 추장들
추장은 원주민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연결고리였다. 그들의 말과 글에는 민족을 걱정하고 자연을 사랑한 순수한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 듣는 이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그중 세 추장을 소개한다.

원주민 역사상 가장 유명한 추장
시애틀, 1786~1866
수콰미시족 추장이었던 아버지와 두와 미시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시애틀 추장은 지금까지 알려진 원주민 추장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1854년 백인 관리가 수콰미시족과 두와미시족 사람들을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내몰기 위해 그를 찾아 왔을 때 그는 장문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이 바로 오늘날까지 책, 다큐멘터리, 동화 등으로 수 없이 각색되었던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다. 시애틀의 백인 친구였던 헨리 스미스에 따르면 시애틀은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그 이상 훌륭한 전사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기품 있고 당당했다고 한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생명의 근원과도 같은 땅이 백인들에게 넘어가는 슬픔을 그는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연설에 표현해냈다. 1866년 세상을 떠난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수콰미시족 땅에 묻혔다. 미국의 대도시인 ‘시애틀’도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아카데미상 후보에까지 올랐던 추장
댄 조지, 1899~1981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태어난 댄 조지는 생의 대부분을 가난하고 힘들게 보내야 했다. 그런데 나이 60대이던 1960년대의 어느 날,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 눈에 띄어 뒤늦게 배우로 발탁된다. 그의 매력적인 은발과 뚜렷한 이목구비, 깊이 패인 주름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영화 ‘작은 거인Little Big Man’ 출연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오르면서 그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이 주는 부와 명예는 애초에 그의 관심 밖이었다. 수많은 영화와 연극에 출연했지만 원주민을 비하하는 내용을 담은 배역은 결코 맡지 않았다.

한번은 원주민 운동가들이 그에게 ‘옛날에 백인들 손에 학살당한 원주민 형제들의 원수를 갚자’고 제안했으나, 그는 “우리는 오래 전 손도끼를 땅에 묻었다. 백인들이 수 없이 우리와 약속을 어겼지만 우리는 손도끼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며 거절했다. 그는 캐나다 원주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1981년 세상을 떠났다.

용감한 원주민 전사의 대명사
시팅 불, 1831~1890

그의 아버지 점핑 불Jumping Bull(뛰는 소)은 훙크파파 라코타족의 유명한 전사였는데,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주로 말을 타고 다녀 걸음걸이가 느렸기에 사람들은 그를 ‘느림보’라고 불렀다. 어린시절, 그는 친구들과 함께 암소를 데리고 들소사냥 놀이를 한 적이 있었다. 암소 한 마리가 사납게 달려드는 바람에 그는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암소의 두 귀를 붙잡고 웅덩이에 주저앉혔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시팅 불Sitting Bull(소를 앉히다)’이라고 불렀다. 전투를 할 때면 늘 앞장서서 싸웠지만, 여자와 아이들은 해치지 않았다.

한번은 다른 부족과의 싸움에서 일대일로 싸우던 중 상대가 총알이 떨어지자 그도 총을 버리고 창만을 갖고 싸운 적도 있다. 백인들과 갈등이 심해지자 그는 부족을 이끌고 캐나다로 넘어갔지만,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들어 진 탓에 부족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백인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용감한 전사’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백인과 원주민, 친구에서 적으로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상륙 시작

1492년,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지금의 바하마 인근에 상륙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처음 유럽인들에게 알려졌다. 이후 1513년, ‘정복자’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스페인 탐험가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 본토(지금의 플로리다 인근)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이 지역에는 스페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정착촌이 형성되었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이민의 시작이었다.

백인과 원주민, 친구에서 적으로
유럽인들의 이민 초기, 원주민들과 유럽인들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낯선 땅에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농사법을 가르쳐주었고, 낯선 곳에 갈 때는 안내인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차츰 정착촌의 규모와 인구가 늘어나면서 백인들은 점점 더 많은 땅과 자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등 다른 나라의 경우에서도 보듯, 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들과의 대결은 이미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싸움
특히 1800년대 중반부터는 백인들의 서부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하지만 총으로 무장한 백인들과 활로 무장한 원주민의 대결은 시작 전부터 그 결과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전투마다 패배를 거듭하던 원주민은 결국 백인들과 조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자신들이 살던 땅을 백인들에게 넘겨주는 대신 총, 담요, 가축 등 생활 용품을 받기로 한 것이다. 또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보호구역에서 지내는 조건으로 정기적인 연금을 지급하는 등 각종 복지혜택을 제공할 것을 약속했다.

보호구역으로 가는 원주민들
1868년 미국 연방정부와 그랜트 대통령은 원주민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평화정책을 펼치는 등 원주민들을 보호구역에 이주시키는 일을 명문화했다. 1887년에는 토지할당법이 제정되어 원주민 소유의 땅이 백인들에게 부당하게 팔리는 것을 저지하는 조치도 이뤄졌다.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곳에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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