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도 전쟁중이다④_미 해병 한국전 참전용사회 박용주 회장

박용주 회장은 해병대 44기로 입대한 뒤, 부사관으로 임용되어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미국에서 거주하며 용사회를 결성하여 6.25에 참전한 미 해병대원들의 한국 방문 및 기념물 설치 등의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참전용사회를 결성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1979년 미국 소재 보훈병원에 위문을 갔다가 한 상이군인을 만났습니다. 인천상륙작전에도 참가한 참전용사였는데, 전쟁터에서 팔다리를 모두 잃어 혼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종일 누워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결혼도 하지 못했고, 부모님도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그사람 소원이 ‘내가 팔다리를 잃어가며 싸워 지킨 한국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때부터 6.25에 참전한 해병대원들 간에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방안을 찾기 위해 전우회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참전용사들의 한국 방문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전이 끝나고 1975년부터 미국에서 지내다가 1995년에야 참전용사들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으니, 정확히 20년 만에 조국을 찾은 셈이지요. 6.25 때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개최하고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대국이 된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참전용사들도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나라가 몰라보게 발전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자랑스러워 했고요. 초기에는 사비도 많이 들었고, 지금은 스폰서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참전용사들의 항공료와 체류비용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보람도 큽니다.

회장님 역시 6.25를 직접 겪은 세대입니다.
일제강점기이던 1939년에 태어나 우리말보다 일본어를 먼저 배우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안 있어 6.25가 터졌습니다. 완장을 두른 인민군들이 내려와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했고, 불러야만 목숨을 부지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열네 살이라 입대는 못했습니다만, 나중에 해병대로 입대해 베트남전에서 싸웠습니다. 지금도 기회가 된다면 나라를 위해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싸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6.25를 우리가 먼저 일으킨 전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안타깝습니다.

독자들을 위한 당부가 있다면?
6.25는 우리나라가 북한의 손에 넘어갈 뻔한 무서운 전쟁이었습니다. 미군을 비롯한 UN군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늘 간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지도층과 국민들 모두가 하나로 힘을 모아 시급히 처리해야 할 사안들이 많습니다. 여러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모을 미래의 지도자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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