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청소년들 중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 경험이 있는 10명 중 3명은 자살 충동을 느낀다고 조사된 바 있다. 또래에게 괴롭힘을 당한 피해 학생들이 자살하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왕따’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드러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학교 울타리 속  ‘왕따’ 사건은 피해 학생들에게 상당한 고립감을 맛보게 하여 자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한다. 친구들에게 ‘왕따’를 겪은 적이 있다는 유송이 씨 또한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 정상적인 마음을 갖기까지 톡톡히 치러내야만 했던 그녀의 분투기를 소개한다.
 

▲ 남서울 대학교 4학년.아프리카에서 자신이 가진 10의 능력으로 100의 일을, 1000의 일을 하면서 열등감과 부족함에서 벗어났다. 아프리카에서 오히려 생의 의미를 찾고 행복함을 가지게 된 그녀는 아프리카행을 다시 꿈꾼다.
▲ 남서울 대학교 4학년.아프리카에서 자신이 가진 10의 능력으로 100의 일을, 1000의 일을 하면서 열등감과 부족함에서 벗어났다. 아프리카에서 오히려 생의 의미를 찾고 행복함을 가지게 된 그녀는 아프리카행을 다시 꿈꾼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예민한 사춘기 중학교 3학년생 유송이는 그 시절을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가상의 세계가 현실에서 펼쳐져서 결코 잊을 수도, 지울 수도 없었던 때였다고 회상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인생의 소낙비와 같은 열병을 앓듯이 송이에게 닥친 친구들과의 불협화음이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어둠으로 파고들어 눈물짓게 했다. 마치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맑은 하늘에 먹구름만 끼듯, 당차고 밝았던 유송이는 ‘도대체 하루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할까? 왜 친구들이 나를 싫어하지?’ 하고 온종일 고민에 휩싸였다.
“저는 학교생활을 굉장히 잘하는 아이였어요. 학급 회장, 전교 학생 회장을 할 정도로 친구들과 활달하게 잘 지낸 편이었죠. 선생님 앞에서, 친구들 앞에서 솔선수범하고 열심이었지만 틀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궁금해 하는 엉뚱한 면도 있었죠. 제가 학교에 여자 축구부를 처음 만들고 공을 차고 뛰어놀았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왕따를 당하고 삶을 거의 포기했죠. 자살이 꿈일 만큼 힘든 시기였어요.”

점점 풀어갈 수 없던 현실
“문제가 된 사건은 지금 돌아보면 다소 유치하고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해요. 한 친구에게 정보를 얻어서 학생들이 다니는 식당이 아닌, 교직원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다른 친구들과도 같이 갔다가 선생님에게 걸렸어요. 선생님이 주동자가 누군지 물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모두 저를 지목했던 겁니다. 저는 제게 정보를 준 친구 이름을 썼는데 말이죠. 친구들 사이에서 제가 이상한 학생이 된 거예요. 일이 점점 꼬였고 엎치고 덮친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어요.”
학교 선거에 나가서 두루두루 다양한 친구들과 친했던 유송이는 하루아침에 퍼진 소문으로 친구들이 그녀와 말하지 않았고, 등을 돌렸다. 급기야 일진까지 합세하여 점점 무리에서 나누어졌다. 일진의 무리와 그녀의 친구들이 합세하여 서른 명 정도의 학생들이 유송이를 둘러싸고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는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갑작스럽게 친구들에게 버림받는 느낌이 무리에서 이탈되어 혼란스러운 감정을 정리하기도 전에 극심한 스트레스로 마비 증상까지 겹쳐서 근육이 굳어버렸다. 급히 양호실로 옮겨졌지만 그 이후에도 친구들에게 그녀는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 말을 걸면 모두 피하고, 같이 밥을 먹던 친구들도 끼리끼리 다니며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도 뒤에서 대놓고 욕을 해댔다.
“제가 운동을 하고 키도 컸는데, 놀리는 친구 하나를 못 때려서 화병이 났어요. 분노와 억울함으로 몸이 굳어버렸죠. 그 나이 땐 친구들이 중요한데,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 겁니다.”
아이들과 그녀 사이를 풀어주려던 담임선생님의 극약 처방도 효과가 없었다. 청소년 상담센터에 맡겨진 그녀였지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송이 그녀가 친구들과 다른 기준을 가졌다는 상담가의 이야기도 그녀에게 위로를 주지 못했다.
“세상이 저를 차버린 기분이었어요. 어느 것도 제 마음에 위로가 안 됐죠. 친한 친구도, 부모님과도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린 나이에 스스로 세상과 그렇게 단절된 거죠.”
“한창 사춘기 반항심까지 생길 때여서인지, 그 누구와도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 스스로 너무 어둡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도 닫고 살았죠. 그때부터 몇 개월, 그렇게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자 부모님이 알게 됐어요. 하지만 특별히 달라진 게 없었어요.”
누구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고, 다수 앞에서 겪었던 심판 또한 그녀가 견디기 어려웠다. 오히려 대인기피까지 생겨서 학교에 가지 않았다. 
“성악가나 해군 장교가 되는 것이 제 꿈이었지만 그 일이 벌어진 이후에는 머릿속이 까만 도화지가 됐어요. 자주 집 건물 15층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어요. 그런데 마지막으로 제 발목을 붙잡은 것은 부모님의 얼굴이었죠. 내가 죽으면 엄마가 슬퍼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파트 단지 정자에 앉아서
한없이 생각했어요. 학교는 너무 가기 싫었죠.”

 

▲ 베냉의 오지마을, 오토바이를 타고 숲속을 한참 달려서 도착한 마을. 온통 흙으로만 지어진 집들과 전기와 수도도 없던 곳에서 우물을 길러야만 했다. 우리를 연예인보듯 신기하게 보고, 가는 곳마다 쫓아다녔던 아이들. 우리를 향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잊혀지지 않는다
▲ 베냉의 오지마을, 오토바이를 타고 숲속을 한참 달려서 도착한 마을. 온통 흙으로만 지어진 집들과 전기와 수도도 없던 곳에서 우물을 길러야만 했다. 우리를 연예인보듯 신기하게 보고, 가는 곳마다 쫓아다녔던 아이들. 우리를 향한 아이들의 눈망울이 잊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 링컨 학교 입학
부모님이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된 후, 더는 학교로 가길 권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점점 더 고립됐다.
괴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면 그것을 이길 힘이 없어서 멍하니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렇게 집에서 지내다가 대안학교인 링컨학교를 소개받아서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었다. 처음엔 링컨 학교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창을 닫고 있다 보니, 그곳에서 만난 친절한 친구와 선생님의 관심도 부담스럽고 가식적으로 느껴졌던 것.
“다른 학생들은 굉장히 밝게 지내는데, 저는 너무도 어둡고 열등감에 사로잡혔어요. 나 자신과 스스로 싸움을 많이 했죠. 기분과 감정에 따라 좌우되었죠.”
대안학교 선생님들은 어린 유송이가 조금이라도 어두우면 하나하나 물어보시곤 했다.
“우울한 마음과 차분한 마음이 있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생각해보라는 상담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 연습을 조금씩 하게 됐지요. 하지만 누군가의 친절도 신뢰하지 못하고, 내 등 뒤에서 또 욕할 것이란 오해를 3년간 했어요.”
링컨 졸업식 날, 한 선생님이 화를 내셨는데, 유송이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유송이! 넌 왜 널 위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몰라!”
‘지금까지 선생님은 가식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정말 나를 위하고 계셨구나!’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마음이 이렇게 애절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사실 대안학교에는 불량한 학생들도 꽤 있었지만, 그곳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사고의 틀을 벗게 하는 의미있는 일을  했다. 사회에 분노와 불신으로 무관심해진 학생들을 붙들고 청소하는 작은 것에서부터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법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것이다. 

내가 받은 사랑,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2008년 해외봉사 초청 워크숍에서 그녀는 여러 나라를 다녀온 또래 친구,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치 딴 세상에 있는 것처럼 느꼈다. 특히 알래스카는 열 체질인 그녀에게 시원한 동경의 장소였다. 밤하늘에 펼쳐지는 오로라, 백야 현상, 강에서 연어 떼가 튀어 오르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더 강하게 끌어당긴 곳은 아프리카. 아프리카 베냉에서 희생적으로 삶을 사는 지부장님의 삶은 그녀를 아프리카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아프리카에서 오래 사셨던 그분의 정신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좋은 환경, 앞선 문명을 누리고 싶어 하는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분이 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해졌고,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전 그런 분을 만나서, 사람 냄새도 맡고, 정말 배우고 싶었어요.”
실제 아프리카에서 만난 지부장님은 참으로 무뚝뚝한 분이었다. 하지만 말보다 삶 속에서 그분의 존재가 더욱 깊이 있게 다가왔던 것. 누군가에게 마음을 다시 열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녀가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아프리카이다. 열등감 때문에 친구를 미워했던 그녀가 실제로 지부장님처럼 묵묵히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바쁘게 봉사하는 동안 더 이상의 열등감은 남아있지 않았다.
“한국은 발전해서 어느 거리를 다닐 때 조선시대 누가 다녔을 자리라고 상상하기 힘들잖아요. 아프리카는 수천 년이 흘렀어도 옛날 사람들이 밟았을 거리임이 상상이 돼요. 하루 종일 그 땅을 밟으며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인 사람들이 있는 곳을 다니니 생각도 단순해졌어요.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 하늘과 자연 바로 그 사이에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감격스러웠죠. 모래 위에 흙집을 짓고 신이 만든 자연에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 때문에 정말 신기했어요.”
아프리카에서는 더 이상 그녀의 무능력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프리카 시골 지방에서 무지하게 살아가는 여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녀는 자신이 배울 수 있었고, 풍요로운 가정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사실을 돌아보았다.
“초등학교 때 저는 이미 일회용 사진기를 소풍 갈 때마다 꼭 가지고 다녔어요. 첫째 딸이어서 아버지가 여름이면 래프팅에, 겨울이면 스키를 타러 데리고 다니셨는데, 돌아보니 아프리카란 곳은 저와 정말 맞지 않았죠. 하지만 땅콩 한 조각에도 배부름을 느낄 수 있는 아프리카! 그곳에 다녀올 수 있었다니 정말 신기해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검은 피부에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이들이, 불룩한 배로 하염없이 웃는 아이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도시는 도시대로 시골은 시골대로 운치 있게 흘러가는 강가도 두 눈에 선하다고.

▲ (왼쪽부터) 수상가옥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모래밭 위에 지어진 마을, 갑자기 흑돼지가 여기저기 길가에 나타나는 마을에서 한 컷, 아프리카 사람의 순수함을 지닌 쉐리와 함께.
▲ (왼쪽부터) 수상가옥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모래밭 위에 지어진 마을, 갑자기 흑돼지가 여기저기 길가에 나타나는 마을에서 한 컷, 아프리카 사람의 순수함을 지닌 쉐리와 함께.

부모님, 사랑합니다
“아프리카를 다녀온 후로 사춘기 반항의 시간 동안 부모님을 힘들게 했다는 사실에 크게 죄송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에게 너무 무례하게 한 것을 죄송하다고 표현했어요. 아버지는 멋쩍으셨는지 웃으셨어요. 이제 저는 심각한 스트레스와 고립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 생각하고 살피게 됐어요. 물론 여전히 부족하지만요.”
얼마 전 그녀의 어머니는 병원에서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병은 때론 가족 간에 근심과 불화를 남기고, 지치고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유송이는 병간호를 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더욱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고. 자신이 어머니를 향해 가졌던 사랑, 어머니가 그녀를 향해 가졌던 마음....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오히려 가족은 더욱 가까워지고,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찾아온 암 때문에 그녀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됐고 사람의 마음을 세밀하게 살피게 됐다. 가족을 더욱 돈독하게 만든 가치 있는 아픔이라 여긴 모녀는 누구보다 행복하다. 그리고 기적처럼 병이 다 나아서 가족에게 큰 기쁨이 되었다. 병으로 메마르고 척박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마음에 희망과 소망이 꽃피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이제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절망 속에서 더욱 희망을 품을 수 있기에!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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