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더 빛나는 군인 리더십(2)


 
 

솔선수범   매사에 앞장선 스파게티 리더십!
조지 S. 패튼(1885~1945)

패튼은 제2차 세계대전시 북아프리카와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독일·이태리 동맹군을 물리친 미국의 명장이다. 그는 부하들을 아주 혹독하고 엄격하게 훈련시키기로 이름난 지휘관이었다. 그가 아프리카 사막에서 부대를 지휘할 때의 일이다. 30도가 넘는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그는 병사들에게 참호를 파고 지뢰를 설치하는 등 독일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 나갔다. 그렇게 고된 작업을 시키면서도 수통 한 병 이상의 식수는 절대 주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런 패튼에게 원망 어린 시선을 보냈다.
당시 패튼의 병사들은 매일 1.6km씩을 뛰며 체력을 단련했는데, 패튼은 그보다 긴 2km를 달렸다. 그 사실이 부대 내에 알려지면서 병사들의 불만은 사그러들었다. 타고 가던 트럭이 진흙탕에 빠지면 병사들과 힘을 합쳐 끌어올렸고, 타고 가던 전차가 퍼지면 직접 밑으로 기어들어가 기름을 뒤집어써가며 수리했다. 이렇게 혹독한 훈련을 거친 덕에 패튼과 부하들은 훗날 아프리카의 무더위 속에서 여러 차례 싸움을 치르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패튼은 스파게티를 예로 들어 자신의 리더십을 설명하곤 했다. 잘 익은 스파게티 국수 한 가닥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뒤에서 밀면 스파게티 국수는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구부러지고 만다. 하지만 국수 가닥을 앞에서 당기면 국수는 딸려오게 된다. 이처럼 지휘관이 뒤에서 밀면 구부러지지만, 지휘관이 먼저 앞에서 달려가면 부하들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이 그의 리더십 원리다.
또 패튼은 군대의 생명은 군기軍紀이며, 깔끔하고 단정하지 못한 병사야말로 군기가 빠진 병사라고 여겼다. 언제나 빳빳하게 다림질된 군복 차림이었던 그는 어깨 위의 계급장과 가슴팍의 훈장 역시 빛날 정도로 손질하고 다녔으며, 그의 군화는 거울처럼 반짝였다. 부하들에게도 늘 단정한 옷차림과 예절을 강조했는데, 빛이 바랜 군복은 아예 입고 다니지 못하도록 집으로 부치게 할 정도였다.
이는 단순히 외모를 꾸미는 데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부하들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된 분대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 (왼쪽부터) 조지 S. 패튼(1885~1945), 최영(1316~1388)
▲ (왼쪽부터) 조지 S. 패튼(1885~1945), 최영(1316~1388)


청렴강직   장군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은 이유는?
최영(1316~1388)

고려 말기의 장군인 최영은 전투에서는 늘 선봉에 서서 죽음을 무릅쓰고 적과 싸운 맹장이었다. 부하를 다스리는 데도 지극히 엄격하여 후퇴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도망가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 엄한 벌을 내렸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라는 명언으로도 유명한 최영 장군. 그러나 사실 이 말은 최영 본인이 아닌,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그는 이 말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며 철저히 지켰다. 우왕의 신임을 얻는 등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청빈한 삶을 살았다. 집도 아주 보잘것없었으며, 옷과 음식 또한 사치를 부리지 않아 오히려 굶는 날도 있을 정도였다.
왜구와 홍건적, 원나라 군대와 싸워 승리하면서 상으로 금은보화와 토지를 하사받았지만, 금은보화는 부하들에게 토지는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유일한 수입이라고는 나라에서 주는 녹봉(벼슬아치에게 주는 곡식과 베, 돈 등)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남으면 군량미로 보탰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무덤에는 풀이 한 포기도 나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욕심 없이 청빈하게 살아온 그의 삶을 닮았다며 칭송했다.

포부   ‘미래의 해군 대장’을 꿈꾼 별 중의 별
체스터 W. 니미츠(1885~1966)

육군에 맥아더 원수가 있다면 해군에는 니미츠 원수가 있다! 군인으로서는 최고계급인 원수에까지 오른 니미츠이지만, 그의 출생은 불우했다. 니미츠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가정형편에 보탬이 되기 위해 8살 때부터 주급 1달러씩을 받고 외삼촌의 식육점에서 배달 일을 해야 했다. 고등학교 때는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에는 호텔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하며 지냈다. 그럼에도 성적은 1등을 놓치는 법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일하던 호텔에 육사 출신의 소위 두 명이 묵게 되었다. 그들의 멋진 제복과 늠름한 모습에 매료된 니미츠는 장교가 되기로 결심하고 추천서를 받기 위해 슬레이든 하원의원을 찾아갔다. 하지만 육사는 인원이 마감되는 바람에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해사 졸업 후 소위로 항공모함에서 복무하던 어느 날, 해군 참모총장이 그 배를 방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총장의 대장大將 계급장이 망가져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바다 한가운데 계급장이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심정으로 ‘대장 계급장이 있는 사람은 함장실로 가져오라’는 기내방송을 내보냈다. 얼마 후 어느 소위가 대장 계급장을 갖고 헐레벌떡 함장실로 달려왔다. 니미츠였다. ‘소위가 대장 계급장을?’ 호기심이 발동한 총장이 물었다.
“자네 계급은 소위인데 어떻게 대장 계급장을 갖고 있나?”
“네, 입대 전 여자친구가 미국 최고의 해군 대장이 되라며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래서 늘 품 안에 갖고 다니던 것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자네는 꼭 대장이 될 거야. 그러니 내가 따로 보답을 안 해도 되겠구만.”
그로부터 36년 뒤인 1941년, 니미츠는 대장 진급과 동시에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던 태평양 함대를 재정비해 미드웨이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1944년, 그는 원수에 올랐다. 군인으로서 최고계급인 별 중의 별이 된 것이다.


▲ (왼쪽부터) 체스터 W. 니미츠(1885~1966), 콜린 파월(1937~)
▲ (왼쪽부터) 체스터 W. 니미츠(1885~1966), 콜린 파월(1937~)


성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콜린 파월(1937~)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군인이자 정치인인 콜린 파월의 이력은 그야말로 입지전立志傳이다. 뉴욕 맨해튼의 할렘가 출신인 그는 뉴욕시립대를 졸업하고 ROTC로 임관해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89년 10월 파월은 역대 최연소(52세)로 합참의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흑인이자 비非 사관학교 출신으로는 최초의 기록이기도 했다.
이후 파나마 전쟁과 걸프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국민들로부터 높은 인기를 얻었으며, 2001년에는 흑인 최초로 국무장관에까지 올랐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콜린 파월의 실전 리더십It Worked for Me: In Life and Leadership>에서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지난 날 내게 무리한 임무를 준 상관도, 쉬운 임무를 준 상관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따지지 않았다. 그냥 최선을 다했다. 절대로 투덜대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나를 평가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남이다.”

애국심   “내 아들이라고 특별대우를 할 수는 없다”
마오쩌동(1893~1976)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킨 북한은 UN군의 참전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중국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주석 마오쩌동은 당시 신혼이던 장남 마오안잉에게 참전을 권유했다. 측근들이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마오쩌동은 다음 한 마디로 측근들의 반발을 잠재웠다.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우리 중국 인민들은 누구도 거기에 가려 하지 않을 거야.”
마오안잉은 중공군 총사령부로 배치받았다. 1950년 11월 24일 밤, 미군 정찰기가 총사령부가 있던 평안북도 회창군 상공을 지나갔다. 정찰기가 지나갔다는 것은 다음날 미군의 폭격이 있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정오에 미군기가 중공군 총사령부에 폭격을 가했고, 그 중 한 발이 마오안잉이 있던 사무실에 떨어졌다. 마오안잉은 시신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탄 채로 전사하고 말았다.
총사령관인 펑더화이는 눈앞이 캄캄했다. 딴에는 주석의 아들을 배려하기 위해 비교적 안전한 사령부에서 지내게 한 것인데 이런 참변이 일어나다니…. 펑더화이는 본국의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친필로 편지를 써서 마오안잉의 전사소식을 알렸다. 하지만 저우언라이 총리 역시 이를 차마 알리지 못하고, 석 달이 지난 뒤에야 마오쩌동에게 보고를 올렸다. 마오쩌동은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라며 애써 덤덤해 했지만, 그 역시 아버지인지라 눈시울을 붉히며 비통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며느리가 남편의 시신을 수습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마오쩌동은 단호하게 “내 아들이라고 특별대우를 할 수는 없다. 다른 병사들과 함께 현장에 묻어라”고 말했다. 마오안잉의 묘지는 지금도 평안북도 회창군에 남아 있는데, 북한을 방문한 중국 외교사절단이나 유학생은 이곳을 꼭 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 (왼쪽부터) 마오쩌동(1893~1976), 칭기즈 칸(1162?~1227)
▲ (왼쪽부터) 마오쩌동(1893~1976), 칭기즈 칸(1162?~1227)

 
포용 & 신뢰   뛰어난 인재라면 적도 우리 편으로…
칭기즈 칸(1162?~1227)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정복자들 가운데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군주는 단연 칭기즈 칸이었다. 그가 싸워 얻은 영토는 알렉산더 대왕의 약 4배에 이른다고 한다. ‘몽골의 작은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어떻게 중국을 통일하고 유럽까지 정복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까?’는 오랫동안 역사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의 연구대상이었다.
전문가들은 그의 리더십 비결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인재의 출신성분을 가리지 않고 철저히 능력 위주로 선발해 등용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신武臣 제베와 문신文臣 야율초재였다. 원래 칭기즈 칸과 대립하던 타르쿠타이의 부하였던 제베는 전투 중 화살을 쏴 칭기즈 칸의 목을 꿰뚫었다. 그러나 극적으로 상처를 회복하고 일어선 칭기즈 칸은 곧바로 반격을 개시해 타르쿠타이를 쳐부수고 제베를 사로잡았다. 여느 사람 같으면 자신을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한 적장에게 보복했을지 모르나, 칭기즈 칸은 오히려 제베의 활솜씨와 무예를 칭찬하며 그를 선봉장으로 삼았다. 야율초재 또한 칭기즈 칸의 적국 금金나라 출신이다. 야율초재의 학식을 크게 여긴 칭기즈 칸은 그를 후대했고, 이후 야율초재는 이후 몽골제국의 법률과 문화·교육제도의 기틀을 확립하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두 번째, 전쟁터에 나가는 부하장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긴 권한위임empowerment에 능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이상, 리더가 모든 사안을 일일이 결정할 수 없다. 설령 능력이 된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모든 일에 관여한다면, 아랫사람은 자율적으로 일할 수 없다. ‘의심스러우면 쓰지 말고, 썼으면 믿고 맡긴다’는 것이 칭기즈 칸 용인술用人術의 핵심이라 하겠다.

도움말 | 권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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