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으로 유럽을 석권한 그라시아스의 젊은이들_테너 훌리오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테너 파트에는 한국인이 아닌 한 멕시코 청년이 노래하고 있다. 그가 부르는 한국노래는 여느 한국 사람보다 더 정확한 발음과 메시지를 전달한다. 유럽합창대회 우승 비결 중에 하나도 바로 이것이다.

한국에 온 지 7년째인 훌리오 곤살레스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악보를 읽지 못해 자신이 성악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2007년 여름 처음 방문한 한국은 참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다양한 국가에서 온 외국인 대학생들이 참여한 캠프에서 치러진 한국어 노래자랑. 훌리오도 이 대회에 참가했다.
“내가 만일 하늘이라면 너의 얼굴에 물들고 싶어. 붉게 물든 저녁 저 노을처럼 나 그대 뺨에 물들고 싶어….”
그의 맑고 잔잔한 목소리는 더위 때문에 올라오는 짜증을 시원하게 날려버릴 만큼 감동적이었다. 이 노래로 대상을 받은 그는 그러나 이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180도로 바뀔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의 노래솜씨는 듣는 이의 귀를 의심하게 할 만큼 한국어 발음이 정확하다고 평가받았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반한 그라시아스 관계자가 그라시아스 합창단’의 오디션 참가를 권했다. 소년같이 맑은 감수성, 노래에 담긴 풍부한 감정적 표현들을 잘해낸 그는 그라시아스에 신입단원으로 입단하게 된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악보조차 읽지 못했다는 그가 합창단의 테너 솔리스트로 전세계 다양한 무대에 서서 노래부른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인지 묻곤 하는데, 그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다는 그 사실만이 행복하다고.

 
 
합창단이라는 선물
“전공인 컴퓨터공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학업을 그만둔 상태였어요. 집안 사정도 좋지 않아 더 공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인생에서 큰 실패를 경험하던 때에 그라시아스 합창단 합격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선물과 같았죠.”
수습단원이 되어 악보를 읽는 법부터 호흡, 발성 등 성악의 기본부터 익혀나갔다. 세계적인 바리톤 최현수 교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의 아나똘리 교수 등에게 레슨을 받을 때면 “이건 왜 더 연습 안 했어? 이렇게 더 생각했어야지!” 하고 혼날 때도 많았지만 배워가는 즐거움이 상당했다. 무대에 입장하는 법, 관중을 보고 서는 법, 인사하는 법 등 무대매너도 짬짬이 익혀나갔다. 매일 공부하고 연습하고 적응해야 하는 것들이 산재해 있었지만 성악의 기본기를 배울 때만큼 힘든 적은 없었다고 한다.
세계 각국으로 공연하러 다니는 만큼 다양한 언어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것은 필수였다. 열심히 가사를 듣고 스페인어로 발음을 받아 적어 외웠지만 한국어 노래는 가장 넘기 힘든 산이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어는 참으로 넘기 어려운 언어라고 말한다. 3년 동안 단원들과 지내다보니 한국어가 조금씩 익숙해지고 뜻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어에만 있는 발음인 ‘으’, 비슷하지만 차이가 큰 ‘어’나 ‘오’ 등의 발음 때문에 노래 부르기가 힘들었다.
“발음이 서툴러 ‘음악’을 ‘움악’으로, ‘어머니’를 ‘오모니’로 발음한다면 한국인 관객에게 노래의 원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정확하게 발음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멕시코인처럼 멕시코 노래를 부르는 합창단
그가 말하는 그라시아스의 매력은 ‘외국곡을 부를 때도 그 나라 사람이 부르듯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며 현지인들의 마음을 터치하는 노래를’ 한다는 점이다. 그라시아스는 매년 남미를 비롯해 동남아, 아프리카, 미국, 유럽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자선공연을 펼친다. 공연하는 나라의 대표 노래나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등 그들의 진정성 있는 공연에 감동받는 팬들이 전세계적으로 많다.
“지난 7년간 합창단 공연으로 멕시코에 세 번 다녀왔어요.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던 가족들을 만나서 즐거웠고, 멕시코인들이 ‘그라시아스 단원 중 멕시코인도 있다’고 자부심을 갖는 걸 보며 무척 기뻤어요. 무엇보다도 그라시아스의 노래에 저는 놀랐어요. 단원들에게 멕시코 노래를 가르치고 가사의 발음들을 고쳐줬을 때 우리 합창단은 정말 멕시코인처럼 멕시코 특유의 열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그 중에서도 특히 <라쿠카라차>는 멕시코 혁명 당시에 혁명군인 농민들이 부르면서 힘을 얻은 노래다. 그라시아스는 농민들의 애잔한 마음과 희망을 바라는 마음을 정확히 표현해내 멕시코인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라시아스는 새로운 곡을 부르기 전에는 항상 작곡가와 작사가가 곡을 만들었을 때의 마음상태와 그들이 살았던 가정환경과 시대적 상황 등을 모두 공부한다. 그래야 곡을 완벽히 이해하고 온 마음으로 곡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어서다. 멕시코 노래를 부를 때는 온전히 멕시코인의 마음으로, 아프리카 노래를 부를 때는 아프리카인의 마음으로 부른다고 한다.

▲ 스위스 몽트뢰 국제합창제 무대에 올라 열창하는 그라시아스 합창단
▲ 스위스 몽트뢰 국제합창제 무대에 올라 열창하는 그라시아스 합창단

힘들어도 즐거웠던 유럽 합창제 준비
리바 델 가르다 합창제와 몽트뢰 합창제를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출전했던 합창제보다 몇 단계 더 수준 높은 곡들을 불러야 했다. 게다가 러시아 노래들은 후렴구도 없어 뜻도 모른 채 이어지는 가사와 음악들을 모두 외우는 것은 큰 숙제였다. 단원들끼리 토론하면서 작곡자가 당시 곡을 만들었을 때의 상황과 마음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자신의 이야기로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미국의 마하나임 음악원에서 연습이 시작됐다. 춥고 혹한 날씨 때문에 실내에서도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지만, 노래를 향한 뜨거운 열기는 시간이 갈수록 불타올랐다.
“테너는 빛이 환하게 퍼지는 듯한 소리를 내야 한다고 합니다. 소리를 내기도 어렵지만 다른 테너 단원들과 한소리를 만들어야 했어요. 옆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꾸준히 제 소리의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다시 교정합니다. 목표한 만큼 소리를 내지 못하면 벌칙도 있었어요. 혹독한 연습 기간이었지만 즐거웠고, 실력도 많이 향상되었습니다.”
5개월 간의 준비기간을 마친 합창단은 유럽으로 이동하여 4월 14일 이탈리아 리바 델 가르다 합창제를 맞았다. 그 중 한국에서 온 합창단은 그라시아스가 유일했다. 클래식의 본고장 유럽 합창단 사이에서 까만 머리와 작은 키의 동양인들이 대부분인 그라시아스는 혼성합창 부문 예선에서 첫 번째로 무대에 올랐다. 단원들은 긴장했지만, 지휘자 보리스 아발랸의 지휘가 시작되자 러시아 민요에 담긴 슬라브 민족의 애환을 잔잔한 음색으로 표현해 냈고 관객들은 큰 박수로 화답했다. 두 번째 성가곡 부문에서는 합창단 개인의 신앙적 경험과 작곡자의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져 다른 합창단이 표현할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결과는 두 부문에서 모두 1위. 어느 심사위원은 ‘태어나서 한 번도 이런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다’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이 합창제에서 그라시아스는 대상의 영광을 차지했으며, 곧이어 참가한 스위스 몽트뢰 합창제에서도 혼성부문 1등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다.

평생 그라시아스의 테너로 남고 싶다
이제는 ‘세계적인 합창단’이 된 그라시아스 합창단에서 노래하는 훌리오. 멕시코에서 살면서 그는 방황하며 10대 시절을 보낸 적이 있다. ‘만약 합창단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 것 같느냐?’는 물음에 ‘아마도 계속 방황하며 살고 있었을 것’이라며 웃는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한국에 오게 됐고, 생각지도 못하게 그라시아스 합창단과 함께하게 된 것을 인생의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방황하던 스무 살 시절의 저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멋진 턱시도를 입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한다는 게 아직도 저한테 어울리지 않다고 여겨질 때가 있어요. 항상 자신의 기분을 바로바로 표현하는 멕시코인과 달리, 한국인들에게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가슴 속에 담아두는 한恨의 정서가 있더군요. <남촌>이나 <그리운 금강산> 등 한국 가곡을 부르다 보면 한국의 슬픈 역사와 한국인들의 정서를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6.25 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가족을 그리워하는 아픔들이 제 이야기처럼 느껴져요. 저도 가족들이 보고 싶어도 맘대로 가서 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니까요. 이제는 그런 한국인의 심정이 더 잘 이해되고 한국 노래도 더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어요.”
공연스케줄이 없을 때 각자 집으로 가는 동료 단원들을 볼 때면 자신도 멕시코에 있는 집과 가족들이 그리워진다는 훌리오. 하지만 그라시아스에서 노래하며 얻는 즐거움으로 그런 그리움을 순간순간 떨쳐버린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준비하느라 행복하고, 2~4월 미국 뉴욕 마하나임 음악원에서 공부할 때는 음악적 역량이 쑥쑥 자라기 때문에 때문에 행복하단다. 합창제를 준비하면서 틀린 부분을 지적받고 연일 혹독한 연습을 해도 그는 행복했다. 노래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저는 노래 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아요. 청중들에게 노래로 소망과 기쁨을 주는 가수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무대에 설 때면 ‘어떻게 하면 이 노래에 담긴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음악을 100% 제 마음에 담아내서 표현하면 표정도 제스처도 가장 자연스럽고 극적이게 나오더라고요. 우리 합창단이 이탈리아 합창제에서 대상을 탄 것도 그래서였어요. 다른 합창단들은 노래는 완벽하게 잘 불렀고 성량도 뛰어났지만, 우리만큼 작곡자의 마음을 깊이 표현해낸 합창단은 없었거든요. 그것이 그라시아스의 강점이며 그렇게 노래할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껴요. 평생 그라시아스의 테너로 있고 싶습니다.”
테너 훌리오가 부르는 한국 노래나 멕시코 노래, 그리고 전 세계 어느 노래든 곡에 담긴 작곡자의 마음과 그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한데 모아 그대로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는 이도, 노래를 듣는 이도 함께 행복한 음악을 하고 있다.

인물사진 | 홍수정 기자
공연사진 제공 | 그라시아스 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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