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정부학자금지원 수기공모전 최우수상

 
 
봄이 오다
바람에서 살짝 온기가 느껴진다. 어느새 봄이 왔나보다. 봉오리 진 꽃들도 만개할 준비를 마치고 서서히 꽃망울을 터뜨린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만 있던 캠퍼스는 형형색색의 꽃으로 생기가 돋기 시작했다. 차가운 겨울동안 웅크려있던 꽃들이 고개를 들어 캠퍼스 곳곳에 향기를 전달하고, 길 가는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캠퍼스의 봄, 어느새 4번째 학교에서 봄을 맞는 나에게 이번 봄이 오는 소리는 유독 유쾌하게 들리는 듯하다. 완연한 봄 향기에 취해 캠퍼스를 거닐며 내가 피우고 있는 꽃을 생각한다. 꿈과 희망 속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내 청춘의 꽃은 이제 막 겨울을 지나고, 그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낼 봄을 환영하고 있다.

이룰 수 없었던 가훈
우리 집 가훈은 가화만사성이다. ‘가족이 행복해야 만사가 잘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가훈이 원하는 충분조건은 우리 가족이 이루기에 너무 먼 곳에 있었다. 일용직 노동자인 아버지의 불안정한 수입으로 다섯 가족이 생활하기는 부족함이 많았다. 부족한 살림을 어떻게라도 늘려보려 한 시도들은 오히려 더 큰 손해만 가져왔다. 더구나 땀 흘려 일한 아버지의 노동의 대가는 항상 정당하게 받지 못하였다. 부모님께서는 돈 문제로 자주 다투셨다. 나는 아버지에게 정당하게 돈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 싫었고, 아버지 대신 돈을 벌 수 없는 내가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돈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훈의 역으로 가정이 행복하지 않으니 모든 일이 틀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여동생은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더니 엇나가기 시작했고, 남동생은 방에 틀어박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니 부모님은 나만 바라보셨다. 그 무거운 중압감은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내가 생각할 수 있었던 유일한 해결책은 학업을 빨리 마치고 내 스스로 돈을 버는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 꿈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말문이 막혔다. 돈을 버는 것이 내 꿈의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너의 꿈은 무엇이니?
우리 다섯 가족은 작은 임대아파트에 살았다. 이웃들은 거의 한 부모 가정이나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다. 그 아파트에서 나는 이웃들의 죽음을 많이 목격하였다. 삶이 억울하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 부양하는 가족 없이 쓸쓸히 돌아가신 독거노인 분들이 바로 나의 이웃이었다. 이웃들의 영향 때문인지 부모님도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죽고 싶다’고 하셨다. 나에게 내 삶이 소중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모두 소중한 것인데 이 사실을 잊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삶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가 더 우선인 이 사회가 더 안타까웠다. 이런 사회에서 나는 사람들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고 싶은 꿈을 꾸게 되었다. 마음이 아픈 이웃들이 다시 웃음을 찾을 수 있도록 생명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싶었다.
내가 학교에서 가장 흥미롭게 배웠던 과목은 생물이었다. 생명에 대해 배울수록 더 탐구하고 싶고, 우리 몸이 유지되고 움직이는 기전에 대해서 더욱 연구하고 싶었다. 내가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집안 형편상 과외나 학원은 꿈도 못 꾸었지만, EBS 강의나 담임선생님께서 주신 문제집으로 다른 친구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래서 내가 오고 싶은 학교, 내가 공부하고 싶은 전공에 합격할 수 있었다. ‘생체의공학’, 생물, 의학지식 뿐만 아니라 공학적 사고력도 필요한 융합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이 전공으로 나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부모님께 합격증을 보여드렸다. 부모님도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나 합격 다음날부터 부모님의 어깨는 더 내려가 있었다. 대학 공부를 위해서 1년에 천만 원에 이르는 등록금이 필요하다는 것을  합격의 즐거움과 동시에 난 깨달았다. 등록금은 우리 가족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겨울이면 아버지의 일자리는 더욱 구하기 힘들어 1년 내내 지출 없이 일한다 해도 나의 1년 등록금을 벌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의 대학 입학을 위해 우리 집은 더 작은 집으로 이사 가야 했다. 그 다음 학기 등록금은 보장하지 못했지만 일단 입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버지의 학력은 중학교 자퇴이시다. 집안 형편상 아버지는 학업을 포기하시고 큰아버지의 학비를 뒷바라지 하셨다. 아버지는 항상 배우지 못한 서러움이 있었다. 그것을 자식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나의 대학 입학금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부모님의 간절한 소망과 주변의 도움으로 나는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수능의 높은 문턱을 넘어왔더니, 등록금이라는 거대한 산이 대학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입학식이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설렘보다는 부모님께 무거운 짐을 안겨 드렸다는 부담감이 더욱 컸다.
 
마트 아르바이트생에서 근로장학생이 되다
대학교에 오니 돈이 여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더 극명히 들어나는 듯 했다. 동기들은 명품 옷, 가방으로 한껏 뽐내며 캠퍼스를 돌아다녔지만 나는 당장 전공 서적을 구입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등록금 마련으로 힘들어하셨던 부모님께 더 이상 부담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다. 대학생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아르바이트였다. 책값, 밥값, 학생회비, 기숙사비 등 돈이 필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내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당시 최저시급 4,000원 안 되는 급여로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배우는 것은 좋았다. 그러나 아직 대학교 생활도 적응하지 못한 내게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힘들었다. 대학교 첫 중간고사가 다가왔다. 대학에서 배우는 양은 고등학교 때보다 더욱 많고, 배움의 깊이도 달랐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늘 피곤하고 학습 의욕이 떨어졌다. 그 결과 대학교 첫 학기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돈과 학업, 두 가지를 모두 얻고 싶었지만 그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해 방학, 한국장학재단 홈페이지에서 국가근로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공지사항을 보았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교내 부서에서 일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는 ‘근로장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나는 바로 필요한 서류를 준비해 국가근로에 지원하였다. 다행히도 교내 증명발급 센터에 자리가 있었고, 나는 마트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근로장학생이 되었다. 국가근로는 일반 아르바이트보다 일하는 환경도 좋았으며 시급도 높았다. 나는 국가근로를 하며 행정과 관련된 업무를 배울 수 있었고, 실무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행정실 선생님들의 따뜻한 배려로 바쁘지 않은 시간에는 전공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아르바이트라는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니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 나는 1학기 때의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치열하게 공부했고, 그 결과 2학기 성적이 많이 올랐다. 학과 수석이었다. 나는 내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큰 성취감을 얻었고, 앞으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부모님께 가장 먼저 사실을 알렸다. 내가 아르바이트 때문에 공부를 힘들어 했다는 것을 아셨던 부모님은 이 소식에 눈물을 보이셨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에 집중 못했던 것이 마음에 짐이셨는지, 계속 미안하다고만 하셨다. 
 
전환점을 돌아 더 큰 꿈을 꾸다
학과수석은 나에게 큰 전환점이었다. 내 스스로 돈을 벌어 생활할 수 있다는 자립심, 행정 업무로 학우들의 학교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봉사심, 학교에 더욱 애착을 갖게 된 애교심, 그리고 공부에 대한 성취감을 얻었다. 돈에 대한 부담감, 두려움에 억눌려있던 내 꿈이 다시 뛰었다. 더 큰 성취감을 얻고 싶었다. 미래에 내 꿈을 멋지게 이루어 내는 모습을 계속 상상하며 나는 더욱 학업에 집중하였다.
2학년에 올라와서도 근로장학생으로 계속 일하며 전공 공부도 더 열심히 하였다. 그러니 학과 교수님들께서도 나를 눈여겨보셨다. 나는 그 해 단과대학에서 우수 학생 대상으로 선발하는 해외전공연수 장학에 합격하였다. 해외에 나가는 것은 나에게 먼 미래의 일인 줄만 알았는데 나는 너무나 기뻤다. 그 전공 연수를 통해 나는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탐방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반도체 박람회 참관기회를 얻었다. 또한 방학 한 달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 San Jose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며 전공에 대한 심화 학습을 할 수 있었고,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창업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나도 더 큰 꿈을 그릴 수 있었다. 학교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나에게 동기부여가 되었다.
나는 학과 공부뿐만 아니라 기회가 주어지는 곳에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학교 연구실에서 학부연구생으로 일할 기회도 얻게 되어 지도교수님과 함께 연구에 참여하며 열심히 배웠다. 나만의 스토리로 전국 학생포트폴리오대회에 나가 금상을 수상하고, 직접 설계한 전공 프로젝트로 우수상도 받았다. 교내/교외의 멘토링 봉사활동, 국제학생 도우미 봉사활동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는 곳에 찾아갔다. 나의 작은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행복이 되는 것을 알고 나는 더 큰 행복을 느꼈다. 미래에는 더 크게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또 다시 위기, 한국장학재단의 따뜻한 손길
어느 날 동생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아빠가... 아빠가 쓰러지셨어.”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셨다는 것이다. 나는 너무 놀라고 겁이 났다. 아버지의 따뜻한 미소를 보지 못하게 될까봐 겁이나 우는 동생을 달래면서 나도 같이 울었다. 다행히도 그 지하철에 같이 타고 계시던 한 의사분이 응급조치를 빠르게 취해주신 덕분에 아버지는 다시 우리에게 미소를 지어주실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고혈압과 간염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많으셨던 아버지는 더 이상 일을 하실 수 없었다. 그 후 어머니는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셨다. 한 달에 백만 원 남짓 하는 어머니의 월급으로 다섯 가족이 살아야 했다. 나의 등록금은 사치로만 느껴졌다.
게다가 여동생도 대학교에 입학했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동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돈 때문에 동생의 꿈을 포기하게 할 수는 없었다. 미술 대학 합격증을 받고 기뻐하는 동생은 아직 경제적인 부담감을 잘 모르는 듯 해맑았다. 나는 동생의 입학을 위해서 학교를 쉬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내가 전액 장학금 받지 않는다면 휴학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 후에는 남동생도 대학교에 진학하게 될 텐데, 앞으로 내야 할 3명의 대학 등록금을 계산하면 내가 졸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전공 공부에 흥미를 가진 지금, 학업을 쉬지 않고 계속 하고 싶었다.
나는 저소득층에게 확대 되었다는 국가장학금에 희망을 걸고 신청하였다. 국가장학금은 신청절차가 편리하게 되어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신청할 수 있었다. 장학금 신청 후 나는 마음을 졸이며 고지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방학 동안 나는 한국한의학 연구원에서 인턴십을 하며 전공에 대한 심화학습과 더불어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찾았다. 뇌가 우리 신체와 마음에 작용하는 기전을 밝혀내어 많은 정신질환에 도움이 되는 연구를 하고 싶다는 꿈이 하나 더 생겼다. 꿈이 점점 구체적으로 그려지니 학교를 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기다렸던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는 날,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실 납부액 : 0원’, 고지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다시 확인 해봐도 납부해야 할 금액이 ‘0원’이라고 적혀있었다. 국가장학금과 교내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 전액이 감면된 것이다. 더 기뻤던 사실은 내가 소개하여 같이 국가장학금을 신청했던 여동생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두 명의 대학등록금을 걱정하시던 부모님은 오랜만에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딸이 된 것 같아 기뻤다. 한국장학재단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이 혜택을 받은 것은 나의 꿈을 꼭 이루라는 메시지 인 것 같았다. “Dreams come true” 흐릿하게 보였던 나의 꿈이 좀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다.
 
 
한국장학재단은 나의 꽃망울을 터뜨려준 봄바람이다
봄바람이 겨우내 얼어붙어있던 대지를 녹이듯이 한국장학재단은 어려운 상황의 나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었으며, 미래를 그리게 해주었다. 한국장학재단이 그랬듯이 나도 미래에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장학 수기를 쓰는 이유는 이 글이 미래를 꿈꾸고 있는 많은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데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역경을 겪는다. 그 역경을 혼자 헤쳐 나가는 것은 외롭고 힘든 길이다. 세상은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 수많은 기회를 준다. 나의 꿈을 믿어주신 부모님, 그 꿈을 키워준 학교, 그리고 나에게 희망의 징검다리가 되어준 한국장학재단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담당 Ⅰ 배효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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