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은행 여자농구단 위성우 감독

공은 언제나 둥글다! 어제의 패자가 오늘의 승자가 되는, 누구도 예측 못한 짜릿한 반전이 있기에 더 재미있는 것이 스포츠다. 우리은행 여자농구단이 바로 그렇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네 시즌 연속 여자프로농구WKBL 최하위에 머물던 팀이 불과 1년 만에 정상에 등극한 것. 올 2013-2014 시즌에도 한층 더 강해진 모습으로 시즌 내내 독주를 펼치며 WKBL 통합우승을 달성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꼴찌 팀이 어떻게 1위로 거듭난 걸까? 그 해답을 손에 쥔 남자, 위성우 감독을 만나 보았다.

 
 
리더의 힘 유감없이 보여준 ‘춘천 히딩크’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세계인의 축구잔치 월드컵이 성큼 다가왔다. 월드컵 때면 스포츠팬들뿐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리더가 한 사람 있다. 2002 월드컵 대표팀을 지휘한 거스 히딩크 감독이다. ‘16강만 올라도 대단한 것’이라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는 축구 변방 대한민국을 세계 축구의 중심에 올려놓았다. 박지성·이을용·송종국 등 무명선수들을 발탁해 톱클래스로 키워낸 지도력, 스타플레이어도 단박에 휘어잡는 카리스마, 승부처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대처하는 경기운영 능력까지…. 그러면서도 선수들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마지막 1%의 투쟁심까지 발휘하게 한 히딩크는 리더 한 사람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유감없이 보여주는 사례다.
요즘 농구팬들로부터 그 히딩크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 지도자가 한 사람 있다. 우리은행 한새 여자농구단의 위성우 감독이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히딩크처럼 무명에 가까운 선수시절을 보냈다. 우리 나이로 마흔둘에 감독 자리에 올라 부임 1년 만에 정상에 올랐다는 것까지 공통분모다. 그래서일까? 팬들이 팀의 연고지를 따 붙여준 ‘춘천 히딩크’란 애칭이 전혀 무색하지 않을 만큼 그는 스포츠인으로서의 이력뿐 아니라 지도철학과 훈련방식까지 철저히 히딩크를 닮아 있었다.

패배 DNA를 잘라내는 도전이 시작되다
잠시 시계바늘을 2년 전인 2012년 4월 10일로 돌려보자. 우리은행이 신한은행 여자농구단 코치로 있던 위성우를 신임 감독으로 영입했다고 발표했을 때 팬들의 반응은 크게 둘로 엇갈렸다. 우선 의외라는 반응이 첫째였다. 당시 신한은행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여섯 시즌 연속으로 리그와 챔피언 결정전을 모두 석권하는 등 WKBL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2011-2012 시즌 동안 신한은행이 올린 승수는 무려 29승, 반면 우리은행은 7승에 불과했다. 우리은행의 팀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충분히 짐작된다. 여기에 전임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불화까지 겹쳐 팀 분위기는 ‘최악’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팀에서 지도자로 첫발을 떼기로 한 것이야말로 도전을 즐기는 위성우다운 선택’이라고 보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코치로서 신한은행의 통합 6연패에 일조하며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는 ‘이기는 농구를 하고 싶다’며 새 팀에 대한 애정과 의욕을 내비쳤다. 한국 여자농구의 레전드 전주원 코치와 박성배 코치도 가세했다. 그러나 꼴찌 팀을 재건하기란 결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뭔가 해 봐야지’ 하는 비전과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대가 하나씩 무너질 때의 심정이란…. 어느 경기에나 ‘여기서 계속 치고 나가 이기느냐, 지키지 못해 무너지느냐’ 하는 분수령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은행은 매번 그 고비를 넘지 못했어요. 경기 종료 5분 전, 심지어 2분 전까지 다 이기고 있다가도 어이없는 실수를 연발하며 스스로 무너지곤 했으니까요.”
지고 나면 ‘다음엔 꼭 이겨야지’ 하고 투지가 솟아야 하건만, 패배가 일상사가 된 선수들은 어느덧 패배에 대해 무감각해진 지 오래였다. 이렇다 할 스타선수가 없어 도망가는 플레이로 일관하는 것도 문제였다. 그 패배의 DNA를 잘라내기 위해 위성우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 조치란 다름 아닌 지독한 훈련이었다.
“스포츠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자신을 뛰어넘으려고 노력하고 또 넘어봐야 상대를 넘을 수 있습니다. 지도자란 어떤 이론이나 스킬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본인도 모르는 한계점까지 선수들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게 지도자의 역할입니다.”
위성우 감독은 자신의 지도비결이 ‘마음의 싸움’에 있다고 털어놓았다. 가령 어떤 선수가 아령을 10회 들어올릴 수 있는데, 5회밖에 하지 않는다면 이는 퇴보나 다름없다. 그 선수를 때로는 혼내고 또 다독이면서 11개, 12개를 하도록 이끄는 것, 실전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그 싸움이다. ‘자신도 믿지 말고 동료도 믿지 말고 연습만 믿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농구에 대해서만큼은 타협하지 않는다!
특히 2012년 7월의 여수 전지훈련은 그 절정이었다. 위성우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선수들을 혹독하게 조련했다. 이글대는 남도의 태양이 내리쬐는 가운데 오전 9시부터 산악마라톤, 계단 오르내리기, 트랙과 코트 달리기 등을 반복해서 실시했다.
“산꼭대기까지 뛰어올라갔더니 강아지가 한 마리 앉아 있었어요. 훈련이 하도 힘들다 보니 순간 ‘차라리 저 강아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지난 시즌 MVP 박혜진 선수의 소감이다.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뼈가 부러지는 부상이 아닌 한 열외는 있을 수 없었다. 고질적인 득점력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매일 1,000번씩 슛 연습도 거르지 않았다. ‘내 한계는 이것밖에 안 돼!’라는 선수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려는 위 감독의 노력은 집요하기까지 했다.
“각자의 한계를 깨기까지는 길고도 지루한 마음의 싸움을 거쳐야 합니다. 가령 A라는 선수가 400m 트랙 한 바퀴를 80초 만에 뛴다고 합시다. 그럼 저는 A에게 ‘이번에 75초 안에 들어오면 오늘은 더 이상 트랙을 돌지 않아도 된다’고 제안합니다. 그럼 A는 얼씨구나 하고 악착같이 뛰어 75초 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A는 이미 저한테 낚인 거예요.
다음날 체력훈련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A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어제 해 봐서 알겠지만, 너는 75초 안에 충분히 한 바퀴를 뛸 수 있어. 그러니 오늘은 75초에 한 바퀴씩 두 번 연속으로 뛰어보자.’ 뙤약볕 아래 몇 시간이나 뛰고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에서 한 바퀴를 더 뛰라면 당연히 못 뛰죠. 저는 그걸 알지만 ‘어? 어제는 분명히 75초 안에 뛰었잖아?’ 하고 될 때까지 뛰게 하는 거예요. 그러다 결국 제가 ‘그럼 77초 안에 뛰어 봐’ 하고 양보를 합니다. 그럼 77초 안에 들어와요. A의 한계는 더 이상 80초가 아닌 75~77초가 된 거죠. 그렇게 단축해 가다 보면 어느 새 70초 안에도 한 바퀴를 뛸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선수들이 모두 위성우 감독의 뜻대로 움직여준 것은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꼭 한두 명은 노새처럼 고집스레 뻗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전지훈련이 막바지에 이른 2주차 오전 시간, 끝까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제한시간 80초 내에 들어오지 않는 한 선수가 있었다. ‘농구는 단체경기다. 한 명이 게으름을 부리면 나머지 네 명이 그만큼 더 뛰어야 한다.’ 그 마인드를 심어주기 위해 벌칙으로 다른 선수들도 함께 뛰게 했다. 그만 하면 동료들 보기 미안해서라도 제시간에 들어와야 하건만 웬일인지 그녀는 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번에 제대로 하면 마무리하고 점심 먹으러 가는 거야.”
그러나 당근은 통하지 않았다. 위 감독의 심정은 착잡했다.
‘여기서 물러서면 이런 무의미한 싸움이 계속될 텐데. 점심을 건너뛰고 계속 돌게 할까?’
훈련이 성과가 없다 싶으면 그는 식사도 건너뛴 채 훈련을 계속하기 일쑤였다. 식당 아줌마들이 ‘밥은 언제 먹을 셈이냐?’며 한소리씩 할 때면 ‘선수가 운동을 해야지, 밥 먹는 게 중요해요?’라며 응수하던 그가 아닌가. 혼자서 트랙을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위 감독의 입에서 드디어 한 마디가 떨어졌다.
“내가 졌다. 나는 그래도 네가 팀을 위해서 어떻게든 제시간에 들어올 줄 알았는데…. 이제 그만 점심 먹으러 가자.”
그러나 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후에 다시 하자. 그래도 안 되면 내일 오전, 그래도 안 되면 내일 오후까지 계속 하자.”
그날 오후, 그 선수는 무려 100바퀴를 뛰는 실랑이 끝에 80초 안에 결승점을 통과했다. 그 뒤로 감독의 속을 썩이는 일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젠 우리가 흘린 땀의 힘을 믿어 보자”
전지훈련 기간에 하루하루 사점死點을 넘는 훈련을 소화해내며 어느 팀보다 많은 땀을 흘린 우리은행 선수들. 한계를 넘으며 자신감도 붙었지만, 그래도 가슴 한 편에는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우리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맞이한 2012-2013 시즌, 10월 12일 개막전을 앞두고 위 감독은 선수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그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 중에 그동안 훈련하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 안 해 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 봐.”
선수들은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만하면 우리 할 일은 다 했다. 이젠 우리가 흘린 땀의 힘을 믿어 보자.”
“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파이팅을 외치며 코트로 들어섰다. 개막전 상대는 KDB생명. 우리은행인지라 어느 팀 하나 부담스럽지 않은 상대가 없었지만, KDB생명은 유독 껄끄러운 상대였다. 지난해 준우승팀이었고 원정경기였다. 더구나 KDB생명이 시즌 스폰서를 맡으면서 고위 임원진과 대규모 응원단이 총출동해 관중석을 가득 메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리은행은 더 이상 약팀이 아니었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압박수비와 빠른 공수전환으로 KDB생명을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누가 봐도 ‘저거 정말 우리은행 맞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한 경기였다. 심지어 우리은행 선수들 스스로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경기시간 40분이 지난 뒤, 전광판에는 ‘65-56’이란 스코어가 찍혀 있었다. 관중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언론은 이날 경기를 ‘이변’이라는 한 마디로 전했다.
그러나 농구팬들이 ‘이변’이 이변이 아닌, 돌풍임을 알아차리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라운드에서는 무적함대 신한은행을 무려 22점 차로 물리치며 리그 선두로 치고 나갔다. 2012-2013 시즌 우리은행의 리그 최종성적은 24승 11패, 신한은행과 동률이었다. 하지만 리그 우승은 우리은행에게 돌아갔다. 상대전적에서 우리은행이 4승 3패로 앞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의 드라마틱한 우승이었다.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우리은행은 삼성생명을 3연승으로 가볍게 제압하며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우리은행 한새는 다음 시즌 더 화려하게 비상했다. 시즌 초반부터 9연승을 질주하며 선두를 달렸고, 시즌 내내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으며 네 경기를 남겨놓은 상태에서 일찌감치 우승을 확정지었다. 신한은행과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도 3승 1패로 승리했다. 제대로 된 전력보강도 없는 상황에서 사령탑의 교체만으로 이뤄낸 2년 연속 통합우승! 순전히 ‘위성우 매직’의 결과물이라고 봐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한번은 우리 선수 중 하나가 페이스북을 보여주더군요. 다른 팀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 친구의 페이스북이었는데, 산악훈련을 마치고 정상에서 동료들과 셀카를 찍은 걸 올려놨더군요. 우리 선수들이 그걸 보고 막 웃었어요. ‘세상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해야 진짜 훈련인데, 사진 찍을 정신이 어디 있어?’ 하고요. 그걸 보면서 선수들도 ‘우리만큼 열심히 하는 팀은 없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지요.”

▲ 1. 지난 3월 29일 치러진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이 확정되자 우리은행 선수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2. 승부처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선수들을 지휘한다. 3. “얘들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위성우 감독에게 격한 우승 헹가래를 선사하는 우리은행 선수들. 이후 선수들은 감독을 바닥에 내려놓고 사뿐히 즈려밟는(?) 세리머니까지 펼쳤다. 그동안 지옥훈련을 실시한 데 대한 작은 응징이었다. 4. 울산 모비스 선수 시절의 위성우 감독
▲ 1. 지난 3월 29일 치러진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이 확정되자 우리은행 선수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쁨을 만끽했다. 2. 승부처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선수들을 지휘한다. 3. “얘들아,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위성우 감독에게 격한 우승 헹가래를 선사하는 우리은행 선수들. 이후 선수들은 감독을 바닥에 내려놓고 사뿐히 즈려밟는(?) 세리머니까지 펼쳤다. 그동안 지옥훈련을 실시한 데 대한 작은 응징이었다. 4. 울산 모비스 선수 시절의 위성우 감독

프로팀에서는 후보였지만 늘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오늘의 내가 있다
선수 시절의 위성우는 스타플레이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웬만한 농구팬도 ‘위성우가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존재감 없는 선수였다. 우승경험이라곤 대구 동양 시절 한 차례가 전부. 6년 동안의 결코 길지 않은 선수생활, 그마저도 벤치를 지킬 때가 많았다고.
“농구에서 한 팀당 뛰는 선수는 다섯 명인데, 그 중 두 자리는 용병들의 차지였습니다. 나머지 세 자리를 놓고 국내선수들이 경쟁을 해야 했죠. 주전경쟁에서 밀리다 보니 늘 식스맨sixth man, 만년후보 신세였어요, 하하하.”
일대일로 상대 수비를 뚫고 득점할 실력은 못 되었지만, 완벽한 노마크 득점찬스는 절대로 놓치지 않게 끈질기게 연습을 반복했다. ‘결코 스타는 아니었지만, 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수가 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식스맨 생활이 오늘날 지도자로 대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언제든 경기에 투입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게 식스맨이다. 몸은 벤치에 있어도 마음은 늘 동료들과 코트에서 뛰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발짝 물러나서 경기를 지켜보다 보니 코트 위에서는 안 보이던, 경기의 흐름을 읽는 눈이 생겼다. 그가 지도자로서 대성할 가능성은 그때부터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슬럼프와 징크스, 부딪히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위성우 감독은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리그 최강자이자 디펜딩 챔피언으로 1위를 수성할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게다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여자농구팀 감독까지 맡게 되었다. 이번 아시안게임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는 일본이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지만 ‘홈에서 열리는 대회인 만큼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게 위성우 감독의 각오다.
“한번은 모임에 가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쉴 시간도 없고 힘들다’고 이야기했더니, 어느 농구인 선배께서 혼을 내시더라고요. ‘자네가 언제부터 감독 되고 우승하고 했다고 불평이냐?’라고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게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스포츠감독으로 있다 보면 본인이나 선수들에게도 슬럼프나 징크스 등 어려움이 닥치기 마련이다. 명 지도자인 그는 그런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까?
“저는 개인적으로 선수들이 ‘슬럼프가 왔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러면 코치나 트레이너들에게 ‘저 선수, 더 혹독하게 훈련시켜라’고 합니다. 선수가 한창 시즌 중인데 슬럼프가 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운동 쉬고 여행이라도 가야 할까요? 그럴 수 없잖아요. 먼저 마음에서 슬럼프를 용납해 주지 말고 부딪혀서 뛰어넘어야죠. 그 상황을 극복하는 것은 본인의 힘밖에 없습니다.
징크스도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징크스가 없다는 것은 경기에 임하는 성의가 없다는 겁니다. 실제 경기를 뛰는 것은 선수들이지만, 팀에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마음으로 경기를 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제 아내도 징크스가 있어요. 흔히 징크스는 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경기 당일 입고 나오는 옷 색깔 등 세부적인 것까지 신경 쓰고 조율하기 때문에 징크스가 생기는 거죠.”
선수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승부사다운 답변이다. 오는 9월 아시안게임에서 그의 리더십이 어떤 기적을 일궈낼지 절로 기대가 되었다.


인물사진 | 홍수정 기자, 경기사진 | (주)제이앤제이미디어 제공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