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간 인생의 희노애락이 담긴 공연 예술로 사랑받아온 뮤지컬. 뮤지컬의 본고장 영국에서 시작하여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뮤지컬의 가치를 국내에서도 만끽할 수 있도록 사명감을 갖고 뮤지컬에 미쳐, 뮤지컬만을 위해 살아온 설도윤 대표. '벼랑 끝에 선 고난과 좌절이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하는 그의 뮤지컬뿐인 인생을 소개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길거리. 매일 사람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브로드웨이에서는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 청춘 남녀, 멋쟁이 노부부까지 줄을 서서 뮤지컬 티켓을 구한다. 미국인들에게 뮤지컬은 세대 간에 소통하고 즐기는 문화 아이콘으로 이미 자리를 잡았다. 끼와 재능, 개성이 넘치는 배우와 스태프 등 수백 명의 사람이 공동 작업을 거쳐야 하는 뮤지컬 무대를 보면서 20대 중반 설도윤도 심한 문화충격을 받았다. 대한민국 국민에게도 그 환희와 감격의 순간을 선물하고자 뮤지컬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오페라의 유령>,
<캣츠>, <미녀와 야수>, <에비타>, <뷰티풀 게임> 등 브로드웨이 명품 라이선스 공연을 설도윤 대표가 한국에 처음 선보였다. 그 과정에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프로듀서로 불리는 것이 너무도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가 설도윤 대표다. 

뮤지컬은 산업이다
대형 문화 공연을 이끄는 프로듀서가 멋진 직업임이 틀림없지만, 수백 명의 사람을 조율해내야 하는 고된 직업 중 하나인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영화와 달리 매일 무대에 완성된 작품을 올려야 하는 프로듀서의 긴장감과 압박감을 느낄 수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과거에는 경험도 없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어서 프로듀서가 무슨 일을 하는지, 온몸으로 부딪혀서 터득해냈다.
프로듀서는 스태프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갖고 작품의 응집력을 높인다. 또한 최고의 팀워크를 만들어내야 탄탄한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 스태프를 하나로 조율해야 하는 어머니의 역할, 제작비를 조달해야 하는 아버지의 역할까지 해내야 하는 프로듀서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연출, 안내, 제작진, 모델, 음향, 조명, 특수효과 등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을 알아야 하는 프로듀서는, 그래서 누구나 쉽게 해낼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다. 오직 한 가지, 뮤지컬만 생각하고 달려온 설도윤 대표는 ‘그래서 미쳐야만 이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뮤지컬을 ‘산업’으로 표현하는 설 대표는 한 편의 뮤지컬에서 다양하게 파생되는 직업군과 투자되는 자본이 어마어마하다고 말한다. 조력자요 그의 아내인 정회진 대표(블루스테이지)는 실제로 설 대표가 자기 하나만의 이익을 위하지 않고, 다른 많은 사람과 협력을 이뤄내는 기업가라고 표현했다. 설도윤 대표의 설앤컴퍼니 회사는 직원 10명 이내로만 작업을 하고, 전문성을 요하는 기술적인 부분은
외부의 전문기업에 아웃소싱하여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자리 창출까지 이뤄내고 있다.  

뮤지컬에 미치고, 뮤지컬을 사랑하기까지
지난 40년을 되돌아가 음악과 무대를 사랑한 그의 청춘을 들여다보면 사람의 변화가 얼마나 무궁무진한가를 느낄 수 있다. 청년 설도윤이 처음부터 음악을 사랑한 것은 아니다. 사업에 꽤 성공한 부친이 불량배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었다. 설 부친은 아들만은 그런 부당한 대우를 당하지 않게 하려고 태권도를 배우게 했다. 운동을 좋아했던 설도윤은 불량배들과 맞서 싸우다가 사고뭉치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음악과는 상관없던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교정에서 흘러나온 음악 소리에 이끌리어
음악실로 찾아가서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태권도 부서에서 설도윤을 재목으로 키우려고 했던 체육 교사는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그를 매질한 후에 놓아주었지만, 음악의 아름다움에 꽂힌(?) 설도윤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음악의 길로 들어서서 음악에 몰입하게 된 그는 영남대학교 음대에 입학한 후 성악을 전공하였다. 특히 불멸의 목소리로 세기의 사랑을 받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슈베르트 가곡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LP 음반을 듣고 또 들었던 그였다. 그런 그의 심장을 다시금 뜨겁게 만든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관람한 이후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다. 학과에서는 연극에 빠진 설도윤을 이단아 취급했고 시험 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그는 연극에 더욱 몰입했다.
설 대표는 언제나 머리로 반응하기보다 가슴으로 부딪혀서 세상을 알아갔다. 그 이후에 뮤지컬의 세계로 다시금 이끌리어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에도 너무 늦어버린 나이에 시작한 발레는 고통이었다. 육체를 단련시키며 발레를 하기엔 무리였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그는 4년간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범사에 ‘극진한 마음으로 극진의 상태까지 가보자’고 생각했던 설 대표가 결국 배우로 무대에 설 기회를 얻는다. 1982년 최고 작품인 <빠담빠담빠담>의 이브 몽땅 역으로 캐스팅된 설도윤을 어린 새내기로 느껴 눈도 마주치지 않던 가수 윤복희 씨에게 그는 자신의 모자람을 고백하고 공연을 빛낼 영광스런 기회를 달라고 표현하여 윤복희 씨의 마음을 얻었다.
그는 안무에도 관심을 가져 무용수에서 안무가로 성장했고, 1986년 27살 어린 나이에 KBS 상임 안무가가 되었다. 학연과 인맥이 만연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에는 논란이 일었다. 인신공격과 음해성 이야기도 있었지만 가르침을 주었던 한익평 선생님은 누구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그에게 참 가르침을 남겨주었다. 1988년 29살에는 올림픽 조직위원회 최연소 지도위원이 되어 안무를 만들었다. 1988년 그렇게 서울올림픽 마무리를 ‘손에 손잡고’의 노랫가락에 맞춰 안무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1992년에는 처음으로 <재즈>라는 뮤지컬 작품에 제작비 3억 원을 들여서 작품을 만들었다. 열정을 쏟았고 언론의 관심도 있었지만, 결론은 참패. 실패의 원인을 설 대표는 항상 외부에서 찾지 않고, ‘무엇이 부족했는가’를 내면에서 찾아냈다. 그런 절실함이 그를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게 만들었다. 1995년에 무대에 올려진 <사랑은 비를 타고>는 방송국에서 일한 퇴직금까지 다 제작에 쏟아 부은 그의 분신과 같은 작품이었다. 신인 배우 남경주와 채정원 두 배우가 라이브 무대를 위해 6개월간 혹독한 연습을 거쳤던 첫 창작뮤지컬 작품으로, 대성공이었다. 프로듀서, 연출, 배우의 노력이 저작권이라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었던 게 아쉬울 정도였다.

 
 

꼬리 9개 달린 고양이
설도윤 대표 역시 지난날 청춘의 간절함으로 한국 뮤지컬 산업을 일으키고, 뮤지컬 시장의 판을 바꿔왔지만, 목표와 꿈이 느닷없이 산산조각이 난 적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부산 해운대에 태풍 매미가 상륙한 2003년 9월 12일.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미 설치와 이동이 간편해 해외에서 오래 전부터 인기를 누려온 대형천막 공연을 준비하던 설도윤 대표는 빅탑<캣츠>
공연을 위해 1,800석에 이르는 야외 대형 텐트의 마지막 안전을 정비하고 있었다. 20년간의 기상 데이터를 샅샅이 분석하고 냉난방 시설까지 꼼꼼히 갖춰서 최첨단 시스템을 자랑했지만, 태풍 앞에서는 빅탑의 위력을 잃고 말았다. 태풍이 상륙하기 직전까지 철거할 때 발생할 손실금을 두고 스태프들과 논쟁이 있었고, 결국 철거하지 못하고 그대로 태풍을 맞게 된 사건이었다. 그는 그 사건으로 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꼬리 9개 달린 고양이’란 별명이 그때 생긴 겁니다. 120억 원의 어마어마한 돈이 눈앞에서 날아갔어요. 텐트 철거가 이틀이 걸리는데 태풍이 방향을 바꿔서 우리 텐트로 왔죠. 큰 웃음거리가 됐지만 재미있는 주요뉴스가 됐어요. 태풍의 방향을 바꿀 수 없었던 것이라 그 사건은 숙명이었죠. 전 세계 프로듀서가 그때 사진을 다 가지고 있고, 제가 굉장히 유명해졌어요. (하하하)”
그는 유독 천재지변을 많이 겪었다. 그리고 여러 차례 생명의 위협까지 느낀 사연을 덧붙여주었다.
“비행기 사고를 당한 어떤 사람은 공포심을 느껴 다시는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겁니다. 저 또한 그런 사고가 있었어요. 태평양 상공에서 비행기가 고장났다는 설명이 방송에서 나오더니, 가장 가까운 알래스카까지 4시간 동안 날아가는 겁니다. 알래스카 근처에 가니까 하얀 눈밭의 장관이 보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웠어요. 그러다가 돌풍으로 비행기가 꽝 떨어져서 사람들이 난리가 났어요. 토하고…. 저 역시 비행기에 관한 트라우마가 생겼지만 깊이 생각하게 됐어요. 비행기 사고 영상을 모두 찾아보기 시작했고, 비행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보았어요. 그런데 오히려 비행기가 얼마나 안전한지, 사고가 날 확률이 없는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비행기 사고를 극복하게 됐죠. 지금까지 비행기를 타면 아주 편안합니다.”
겨울이 없으면 봄도 없듯이, 인생길을 걷다 만나는 시련이 사람을 성장하게 하는 축복이란 말이 있다. 때때로 인생이 예기치 못한 슬픔과 상처로 점철됐을 때, 어떤 이는 그 슬픔과 고통에 빠져 있고, 어떤 이는 시련과 상처를 극복하고 비가 온 뒤 더욱 단단한 마음과 사고력을 갖고 인생을 살아간다. 몹시 옭아매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는 힘은 예기치 못한 외부의 상처에 빠져서만 살지 않고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갖는 것에서 생겨난다.
세월호 사건으로 온 국민이 실의에 빠졌고, 가슴 아파했던 시간을 돌아보며 설도윤 대표는 입을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폐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애든버러 국제페스티벌이 생겨났죠. 문화 공연이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됐어요. 미국에서도 그러했죠. 2011년 9월 11일, 미국 JK 공황은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연일 CNN에서는 생방송으로 9.11 테러의 대참사를 알렸고,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어요. 테러가 어디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매우 급한 상황이라 하루 만에 공연들이 중단됐고 극장가에도 찬바람이 불었어요. 그런 암울함 속에서도 ‘시카고’, ‘맘마미아’와 같은 공연은 무대 위에 올려져서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습니다.”

9.11 대참사 당시 뉴욕에 있었던 설도윤 대표는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아픔이 있지만 문화 공연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해왔다. 지난 100년간 뮤지컬이 우리와 함께 공존해있는 이유가 설도윤 대표가 발견해낸 뮤지컬의 가치와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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