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최초 세계 14좌 도전 산악인 김홍빈 대장

“반갑습니다. 김홍빈입니다.” 아웃도어 브랜드 트렉스타의 광주직영점에서 만난 산악인 김홍빈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함께 스스럼없이 뭉툭한 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현재 그는 트렉스타의 홍보이사이자 광주직영점의 명예점장을 맡고 있다. 매장 2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에서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산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저런 손으로 산에 오를 생각을 하다니?’ 하는 물음표는 어느 새 ‘그때 손가락을 앗아간 사고가 오늘의 그를 있게 했구나!’ 하는 느낌표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 주변에서 장애인을 만나기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기자의 기억에 그런 장애인을 만난 건 오토다케 히로타다 이후 처음이었다. 마음에서 장애라는 멍에를 훨훨 벗어던진 채 자유롭고 가볍게 사는 사람 말이다. <오체불만족>의 저자로 잘 알려진 오토다케는 선천적 장애로 팔다리가 없이 태어났다. 하지만 부모는 아들을 일반학교에 진학시켰다. ‘너는 장애인이 아니다. 따라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부모의 생각이었다. 그 덕에 오토다케는 농구, 야구, 수영 등의 스포츠에 두루 능하게 되었고, 글씨 또한 달필이다. 성적도 우수해 명문 와세다에 진학했다. 기자는 몇 해 전 도쿄의 와세다대 이공학부 앞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마침 방송국에 녹화를 하러 가던 중이라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게 고작이었음에도, 유난히 쾌활하고 겸손했던 그의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산악인 김홍빈 역시 그랬다. 1991년 북미 최고봉인 알래스카의 매킨리를 오르던 도중 조난 당한 그는 동상에 걸린 열 손가락을 모두 절단해야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손가락이라곤 손톱 끝만큼 흔적만 살짝 남아 있는 엄지가 전부. 하지만 그는 그런 손으로 스마트폰 잠금화면을 해제해 전화를 걸고 받고, 볼펜으로 글씨를 쓰고, 컴퓨터를 켜서 메일을 여는 등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을 어려움 없이 해내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앞으로 5년 안에 8천 미터가 넘는 전 세계의 최고봉 14곳에 오르는 게 목표란다. 그는 벌써 30년 넘은 자신의 산 이야기를 담담히 펼쳐 보였다.

산과 사랑에 빠진, 뼛속까지 산山사나이
전남 고흥이 고향인 김홍빈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산을 타고 다녔다. 그가 살던 동네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산을 무려 네 개나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제대로 산을 타 보자’고 결심한 것은 1983년 대학교에 진학해 산악부에 가입하면서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지상을 통해 소개되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산을 오르는 산악인들의 모습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산악부의 분위기는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산악부는 유난히 군기와 위계질서가 엄격했어요. 선배들은 말 그대로 하늘 같은 존재였고. 산에 오르는 날이면 동기들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텐트 설치와 장비 정리, 밥 짓기와 설거지 등 잔심부름을 했지요.”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등반횟수가 쌓이면서 점점 산을 오르는 재미가 붙었다. 대학생이라면 미팅과 데이트로 바쁜 시절이지만 그의 연애상대는 산이었다. 어느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던가. 김홍빈이라면 ‘나는 등반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를 악물고 숨을 헐떡이면서 온몸이 땀으로 범벅되어 산에 오르다 보면 온몸이 살아서 숨을 쉬는 듯한 희열이 느껴지곤 했으니까.
재학시절엔 마터호른(4,478m), 그랑드조라스(4,208m), 아이거(3,970m) 등 알프스 3대 북벽을 등반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기회가 없어 만년설에 목말라하던 차에 1989년 광주전남학생산악연맹에서 주최한 동계 에베레스트 등반대원으로 선발되었다. 생애 첫 원정등반이었던 셈. 이듬해인 1990년 대한산악연맹에서 주최한 낭가파르바트(8,125m) 등반까지 마치면서 ‘전 세계 14좌 등정’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14좌란 히말라야 산맥을 따라 늘어선 에베레스트, K2, 캉첸중가, 안나푸르나 등 세계에서 가장 높은 8천 미터급 봉우리 14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까지도 14좌 등정에 성공한 사람은 25명에 불과할 만큼 산악인들에게는 꿈같은 기록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는 일상의 모든 사이클을 등반에 맞췄다. 가까운 거리도 일부러 먼 길로 돌아갔다. 웬만큼 먼 거리가 아니면 절대 버스를 타지 않았고, 타더라도 절대 좌석에 앉지 않았다. 대신 까치발로 서서 버티며 다리 힘을 키웠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산행하기, 며칠 동안 빵만 먹는 훈련도 했다.
“외국 등반대는 간단히 빵과 치즈로 끼니를 때우니까요. 넉넉잡아 30분이면 식사를 마치고 산을 오를 수 있어요. 하지만 한국 등반대는 눈과 얼음을 녹인 물로 밥과 국을 끓여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2시간이 넘게 걸리죠. 그걸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8,000m급 봉우리에 오르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베레스트(8,848m)와 낭가파르바트(8,125m)에 연이어 도전했지만 정상 등정에 실패하고 말았다. 특히 낭가파르바트는 마지막 캠프에서 날씨 때문에 돌아서야 했던 터라 아쉬움은 더욱 컸다. 1991년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에 선발된 김홍빈은 시샤팡마(8,027m)와 초오유(8,201m) 연속등정을 목표로 잡고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중 함께 등반을 준비하던 친구 최병수(지금은 고인이 되었다)가 뜻밖의 제안을 해 왔다. 북미대륙에서 가장 높은 매킨리(6,194m)에 가 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 비자가 늦게 나오면서 친구 일행보다 2주 늦게 매킨리로 가게 되었다.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홀로 등반에 나서게 된 그는 ‘이왕 늦었으니, 이참에 평소 생각하던 경량등반을 시도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아이젠과 스틱 한 조, 카라비너 한 개 등 최소한의 장비와 일회용 단팥죽, 빵, 비스킷 등 행동식만 챙겨 산에 오른 것이었다.

뜻밖의 불행, 하지만 이겨내고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제대로 먹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5,700m 지점에서 두 번이나 정상에 도전했지만 먹는 게 부실한 탓에 다리에 맥이 풀렸다. ‘하루만 더 쉬고 내일 올라가면 되겠지’ 하며 텐트에서 쉬던 중 피로와 탈진, 고소증세까지 겹쳐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눈보라 치는 밤에 그를 발견한 구조대는 그의 몸을 썰매에 묶고 장장 16시간에 걸쳐 구조를 진행했다. 그런데 급경사에서 몸이 썰매에서 이탈되지 않도록 어깨를 너무 꽉 묶는 바람에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왼팔이 나무토막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 의식을 차린 그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끌어다가 가슴에 안으려 했지만 미끄러운 장갑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른쪽 장갑을 벗고 왼팔을 당기려다 오른손까지 동상에 걸렸다. ‘왼쪽 어깨를 풀어달라고 외쳤지만 전달이 안 된 것 같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급기야 시커멓게 말라버린 손을 잘라내야 할 지경이 되었다.
“해발 5,700m면 혼자 내려오기에도 힘든 높이입니다. 그런 곳에서 목숨 걸고 저를 구해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막상 두 손을 잘라내야 한다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어요. ‘구출하려면 제대로 해 줄 것이지.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든가’ 하고요.”
‘앞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려면 손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주치의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7번의 수술과 두 손을 3주 동안 뱃속에 넣어 조직을 재생시킨 뒤 뱃살을 이식하는 방법으로 가까스로 손을 되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을 넋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하루아침에 불구가 된 슬픔과 허무함을 어떻게 필설로 형용할 수 있을까. ‘한 번이라도 좋으니 고향으로 돌아와 이 어미가 지어준 밥을 한번만이라도 먹어달라’는 어머니의 연락을 받고 귀국한 것은 사고가 난 지 석 달 뒤. 그때부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장애를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요. 팬티도 내 손으로 입지 못하고 손가락이 없으니까 펜치를 사용하여 양말을 신어보려고 하다 찢어먹기도 하고. 동그란 문고리를 돌릴 수가 없어서 밖에 나갈 수도 없었어요. 버스를 타도 바지주머니에 동전이 들었지만 꺼낼 수가 없어 옆 사람에게 동전을 꺼내 차비를 내달라고 한 적도 있어요.”
어두운 방에서 그런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려 죽고 싶지만, 창문을 열지 못해 죽을 수도 없었던 울분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다행히 함께 산에 오르던 선후배들의 도움으로 그는 차차 새 삶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소변이 급해도 지퍼를 내리지 못해 바지에 실례를 한 적도 많았지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자동차 부품회사에 취직해 화물차를 몰기도 하고, 공사장과 골프장에서 포크레인 일도 했다. 틈틈이 등산학교에 가서 후배들에게 등반이론도 가르쳤다. 어느 날 무등산에 오른 그의 손가락을 본 한 중년 남성이 아들에게 말했다. ‘봐라. 저런 사람도 열심히 살잖아. 너도 열심히 살아야지.’ 그 한 마디가 김홍빈의 가슴을 꿰뚫었다.
“부끄러웠죠. ‘정말 열심히 살고 있나?’ 하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습니다. 아픔을 극복하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후배들에게 보여준다면, 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큰 용기를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5대륙 최고봉 등반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다시 등반에 나섰다. 1997년 유럽의 최고봉 엘부르즈(5,642m)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5,895m), 1998년에는 남미의 아콩카과(6,959m)와 북미의 매킨리(6,194m), 2007년에는 아시아의 에베레스트(8,848m)에 올라 5대륙 최고봉 등반에 성공했다. 같은 해 오세아니아의 코지어스코(2,228m)에 올랐고, 2009년에는 남극대륙의 빈슨 매시프(4,897m)에 오르면서 세계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오른 것이다. 가는 곳마다 손가락도 없이 산에 오르는 그를, 현지 사람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픔이 서린 매킨리도 어느 새 네 번이나 다녀올 정도로 가장 좋아하는 산이 되어 버렸다.

겸비, 신뢰, 인내, 희생… 산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들
김홍빈은 현재 세계 8위봉인 마나슬루(8,163m) 등반 준비에 매진 중이다. 앞서 말한 8,000m급 14좌 중 8좌에 오른 그는 앞으로 5년 내에 14좌 등정을 완료할 계획이란다. 그런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만약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을 잃지 않았다면 훨씬 더 빨리 수월하게 14좌에 오를 수 있지 않았을까?’ 기자의 물음에 그가 대답한다.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욕심을 부리다가 벌써 죽었을지도 모르지요, 하하하.”
그 넉살에 기자도 따라 웃었다. 그는 지난 2000년에도 마나슬루 등정에 도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상을 불과 100m 앞둔 지점에서 악천후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고 위험성이 있으니 하산하라’는 원정대장의 판단 앞에서 주저없이 마음을 비운 것이었다. 산을 제대로 알면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어느 산악인이 정상에 오르면 흔히 언론에서는 ‘○○○ 대장, 에베레스트 정복’ 식으로 표현하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정복은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을 때에나 쓸 수 있는 말이에요. 8,000m를 넘어가면 거기는 더 이상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제아무리 의지와 체력이 강하고 등반실력이 뛰어난 사람도 자연이 날씨와 조건 등을 허락해야 오를 수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진짜 산사람들은 정복이란 표현을 쓰지 않지요.”
<탈무드>에 보면 은그릇을 훔치고 금그릇을 두고 간 도둑이 나온다. 그 도둑을 도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산은 그의 손가락을 앗아간 대신 겸비라는 선물을 주었다. 그 불운을 불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등반 도중 등산화끈을 묶는 것 간단한 일조차 마음의 자세를 낮추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차를 마실 때도 누구 앞에서든 두 손으로 잔을 잡아야 한다.
그밖에도 산이 그에게 가르쳐 준 것들은 많다. 목숨을 걸고 수천 미터가 넘는 암벽을 오를 때 몸을 붙잡고 지탱해 주는 것은 굵기 5mm짜리 로프가 아닌 파트너를 향한 신뢰다. 한 발만 헛디뎌도 곧바로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크레바스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만년설. 그 만년설을 무사히 통과하려면 ‘최후의 상황이라도 파트너는 나를 붙잡은 로프를 놓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꼭 필요하다.
그렇게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며 인내와 희생을 배운다. 험한 산을 오르고 나면 온몸이 녹초가 되고 손 하나 까딱하기 싫어지는 것은 만인의 공통된 심리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움직이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생각으로 피곤을 이기고 텐트 밖으로 나와 밥을 짓고 일하는 솔선수범 정신이 리더를 만든다고 그는 말한다.
“요즘 우리 청년들을 보면 대기업이나 공무원 등 안주할 수 있는 직장에만 관심이 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등산을 하듯 넘어지고 부딪히고 깨지는 과정을 거치며 목표를 이루려 하지 않아요. 영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 유럽 강대국에는 해발 4,000m가 넘는 산들이 즐비합니다. 일본만 해도 자국인이 최초로 마나슬루(8,163m)에 올랐다는 자부심이 강합니다.”

 
 

어려서부터 산을 쉽게 접하고 오르는 동안 자연스레 한계를 이겨내는 마인드가 형성된다는 것.  ‘그런 마인드의 차이가 오늘날 선진국과 우리 사이의 국력차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무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성취를 이룰 기회를 놓치고 사는 것은 아닌지?

산을 오르는 데는 열정이나 의욕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적으로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는 최소 입산료만 1인당 1만 달러. 나머지 8,000m급 산들도 팀당 1만 달러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항공료나 식비 등 기타 경비를 포함하면 약 1억 5천만 원의 비용이 든단다. 직접 발로 뛰며 여러 뜻있는 사람들과 단체들의 후원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지만 그럼에도 장애인 단체에 후원을 요청한 적은 없단다. ‘장애인 단체의 예산은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그간 자신이 받은 상금도 모두 장애인 단체에 기부했을 정도다. 기자가 보기에 그는 마음에서 ‘장애’라는 두 글자를 이미 지워버린 듯했다. 흔히 장애란 스스로 마음에 한계를 긋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푼다. ‘정작 육체적으로 장애가 없는 우리야말로 마음에 한계를 긋고, 있지도 않은 장애를 끌어안고 사는 건 아닐까?’ 김홍빈 대장과 함께한 시간은 이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에 충분한 만남이었다.

인물사진 | 홍수정 기자  
등반사진 | 김홍빈 제공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