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정부학자금지원 수기공모전 우수상

최근에 k-pop이 세계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데 나 역시도 k-pop애청자로서 뿌듯하다. 그중 내가 가장 자주 듣는 곡은 윤도현 밴드의 나는 나비란 곳이다. 이곡을 들으면 어릴 적 힘들었던 생각도 많이 나고 이런 시련들을 극복하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작은 애벌레
살다보면 누구나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성취를 할 수 있는 반면에 더 깊은 곳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나락에 빠져 좌절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평가해보라면 많은 기쁨과 좌절이 있었지만 아마 후자에 가까운 상태일 것이다. 부잣집도 아닌 그렇다고 가난하다고 말할 수도 없는 집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나 형과 함께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뛰어다니기도 했으며 온 몸에 흙을 묻혀와 어머니한테 꾸중도 받고 남들처럼 한두 번씩 가족끼리 외식도 하고 가끔씩 여행도 가는 평범하지만 화목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런 화목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한 다음이다. 자신만 한번 믿어보라며 호기 있게 시작한 사업이 IMF의 여파 때문이었는지 한 순간에 실패해버렸고 그 뒤 아버지는 항상 술에 빠져 살았으며 부모님이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한창 고민 없이 뛰어놀던 초등학생 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함께 어머니와 형 그리고 나는 부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상처 많은 번데기
가진 것 하나 없이 부산으로 내려온 우리가족은 막막했다.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이모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대학진학을 양보하고 뒷바라지를 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직장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주변의 도움으로 인해 작은 가게를 시작할 수 있었고 최선을 다해 장사를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우리 형제를 아버지 없는 아이로 만들었다는 생각에 항상 미안하다는 말만 하셨고 죄송스러울 정도로 아들을 위해 헌신하셨다. 하지만 당시 어린 나는 이런 어머니의 심정도 모르고 투정도 부리고 심술도 부렸다. 게다가 돈이 없어서 남들 다니는 학원 한 번 다닐 수 없었고 괜한 자격지심에 성격 역시 소심하게 바뀌어 친구를 사귀는 게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어울릴 수 없을 거란 자괴감에도 빠져있었다. 물론 어려운 가정형편이 우리 가족을 더욱 돈독하게 해준 면 역시 있다. 이혼 후 어머니가 가게를 하시면서 형과 내가 일을 도와드렸고 이로 인해 가족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으며 서로가 힘들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행복했던 시간이 지나고 나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큰 버팀목이었던 형의 군 입대와 내가 목표했던 대학에 떨어지게 되어 재수를 하게 된 것이다.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의 경우 합격을 하였지만 가정형편상 어려움으로 인해 입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또다시 입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재수를 하는 동안 힘들었던 점은 무엇보다도 외로움이 컸다. 주변 친구들은 자기 나름대로 재미있는 대학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에 나는 힘들었던 수험생 시절을 다시 한 번 더 해야 된다는 생각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하나 둘 씩 끊겨가는 친구들의 연락에 더욱 더 씁쓸해졌다. 하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노력하였고 목표했던 부경대학교 기계공학과에 합격하였다. 그 뒤 남들처럼 1학년을 마친 뒤 군대를 다녀온 뒤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연히 찾아온 행운-국가장학금
군대를 제대한 뒤 나는 복학 전 4개월가량의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그 이유로는 당연히 대학 등록금 및 생활비를 어머니께 받지 않고 스스로 벌어 쓰고 조금이라도 미리 사회를 경험해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4개월가량의 시간이 지나고 대학교에 복학을 하여 2학년이 시작되었다. 복학 전 많은 고민이 있었다. “학점을 잘 받을 수 있을까?”부터 시작하여 친구를 사귀는 것, 군대를 다녀온 뒤 집중력이 저하된 것 등이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고민은 바로 돈에 관한 것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미리 모아둔 돈으로 인해 부담이 크게 줄었지만 학기가 시작하고 나니 수입은 없고 교재비, 식비, 교통비 등 지출만 있어 학기도중 고민이 많았다. 그러던 도중,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복학생처럼 등록금을 사전에 납부한 학생 역시 국가장학금의 혜택을 받아 일정 금액을 돌려받은 것이다. 나 역시도 꽤나 많은 돈을 국가장학금으로 받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잡생각 없이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으며 어머니 역시 나 못지않게 좋아하셨다. 그 뒤 매 학기 국가장학금을 통해 등록금을 면제받으면서 다양한 변화가 생겼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로는 성적에 대한 부담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원래 학교에서 시행하는 교내장학금은 학점과 토익성적 기타 자격증 점수를 합산하여 장학금을 주다보니 받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하더라도 사람일이다보니 시험도중 긴장을 해서 실수도 하다 보니 생각했던 대로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국가장학금이 있기 때문에 성적에 대한 큰 부담 없이 내 자신이 만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공부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공부를 하였고 성적에 대한 부담이 없어지다 보니 오히려 매학기 성적이 향상되는 결과까지 얻을 수 있었다.

우연히 찾아온 행운-국가근로 장학생
복학 후 한학기가 끝나고 하계방학이 다가옴에 따라 많은 고민이 있었다. 남들처럼 영어공부를 해야 할지, 아니면 미리 아르바이트를 하여 학기 때 쓸 수 있는 용돈을 마련할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학교 공학교육혁신센터에서 전화가 와서 국가근로를 할 수 있냐는 것이다. 마침 취업한 4학년이 생겨 공석이 생겼고 그렇게 방학 때 우연찮게 국가근로 장학생으로 선정되었고 지금까지도 같은 곳에서 국가근로를 하고 있다. 국가근로 장학생을 통해 나는 두 가지를 얻었다. 첫 번째는 국가근로에 의한 효율적인 공강 시간의 사용이다. 대학생 대부분은 시간 활용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다. 나 역시도 평소 공강시간에 당구를 치거나 잠시 쪽잠을 자는 등의 시간을 보냈으며 시간표 만들 때도 원하는 과목을 신청하면서 공강을 줄이는 게 여간 힘들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가근로에 선정되면서 시간표는 원하는 과목만 신청하면 되었고 국가근로 역시 힘들 일이 아니라서 학업에 크게 부담이 없었고 틈틈이 책을 읽는 등의 시간효율이 좋아졌다. 두 번째는 매달 들어오는 30만원의 월급이다. 국가장학금을 받더라도 식비, 교통비, 교재비 등 학기에 써야 되는 돈이 필요하였다. 그러던 도중 국가근로가 되면서 월급 30만원을 받게 되었고 이 돈은 용돈으로 쓸 수 있어 금전적으로 부족하지 않는 대학생활을 하는 등 일석이조가 되었다. 게다가 국가근로를 하면서 만난 조교선생님들과 근로학생들은 나에게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였다.

 
 
우연히 찾아온 행운-지식봉사 멘토링
그리고 이번 동계 방학 때 시작한 멘토링. 멘토링의 취지는 초심으로 돌아가기였다. 그 이유는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나 역시도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이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신청하게 되었다. 나는 지식봉사 멘토링을 희망하는 곳으로 화명샘물아동센터를 선택하였다. 그렇게 첫 만남이 다가왔고 나에게는 중학교2학년의 4명의 제자가 생겼다. 수업시간 마다 뺀질대는 정훈이, 개그코드가 특이하지만 최선을 다해 수업을 듣는 지훈이, 똑똑하고 독서도 많이 하는 욱준이, 마지막으로 홍일점 민지까지 다양한 개성을 가진 우리들이 만나 수업을 하였다. 내가 맡은 과목은 수학이었지만 나의 목표는 성적 향상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진로를 정해는 것에 도움을 주고 고민을 해결해주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군대에 있을 시절 군 장병 상담 병을 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고 마음을 터놓고 서로 얘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게 2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내가 사온 닭강정과 아이들이 마련해준 초코파이 케이크를 먹으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끝난 나의 멘토링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아이들이 알아듣도록 쉽게 설명하다보니 생각했던 보다 진도도 늦었고 가지고 있던 고민 역시 잘 해결해줬는지도 아쉬웠다. 한편으로는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것을 하려고 했던 나의 욕심이 과했으며 이러한 과정이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을 상담해 주며 나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해본 적도 있고 멘티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몇 년 전에 배웠던 수학을 공부하느라 전공서적 대신 중2수학책을 펴기도 했으며 비속어나 은어를 끊기 위해 노력도 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지식봉사 멘토링은 서로가 성장해가는 과정이 되었으며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을 많이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자유로운 나비
이처럼 장학재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고 국가장학금, 국가근로 장학금, 지식봉사 멘토링을 하면서 얻은 것이 있다.
첫째는 자신감이다. 앞에서 언급한 듯이 어려운 가정형편에 괜한 자격지심으로 인해 성격도 내성적으로 바뀌고 수동적인 사람이 되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부담도 많이 덜어버려서 모든 일에 앞장서고 주위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자신감과 리더십이 생겼다. 그리고 대인관계에 있어서 먼저 인사하는 습관을 하려 노력했고 결국엔 1년이 지난 지금은 주위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많은 친구가 생겼다.
둘째는 긍정적 사고이다. 흔히 “물이 반이나 남았다.”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부정과 긍정의 차이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말이다. 나 역시도 후자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대부분 하였다. 그러다 한국장학재단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게 되면서 긍정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고 하는 모든 일마다 웃으며 최선을 다하게 되었으며 비록 실패를 하거나 힘든 상황에 봉착하더라도 낙담보다는 내 자신을 다독이고 다음기회를 기약하는 모습으로 내 자신이 변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내 자신에 대한 미래설계이다. 여타 부담감이 벗어지다보니 이번 동계방학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었는데 지식봉사 멘토링 뿐만 아니라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동들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했고 성균관대에서 주관한 GCTI글로벌 인턴십 캠프에 학교대표로 참가하여 중국의 여러 유수기업들을 방문하고 문화를 체험하는 등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봉사활동은 부산광역시 자원봉사센터로부터 최우수상을, GCTI 체험 수기는 동상을 받게 되었고 내가 재학 중인 부경대학교에서는 자랑스러운 공대인 상에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장학재단은 나에게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를 통해 내 미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누구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만한 성취를 이루었다. 최근에 가장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인 “박경철의 자기혁명”에서 이런 내용이 있다. “천재란 2000번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며, 창의성은 2000번 실패한 뒤에 얻을 수 있는 빛과 같은 것이다.” 이란 내용이다. 사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는 데 있어서 호기심과 기대보다는 실패에 대한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이 나에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감을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앞에 언급한 노래의 가사처럼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나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감사의 인사
마지막으로 전국의 많은 대학생들의 걱정을 덜고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게 도와주시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그 중 한국장학재단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리고 매번 궁금한 것이 많아 이것저것 상담을 하였는데 그 때마다 친절하게 얘기를 들어주고 도와준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고 앞으로도 나뿐만 아니라 많은 대학생들의 희망이 되는 한국장학재단이 되길 희망합니다.

정영_부경대학교 기계공학과 3학년
한국장학재단을 통해 장학금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긍정적인 사고를 얻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됐다는 그는 앞으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 없이 세상을 자유롭게 날고자 희망한다.

담당 | 배효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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