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를 대표하는 국가 4곳-브라질, 페루, 칠레, 아르헨티나

안녕하세요? 저는 페루에서 2년 동안 해외봉사하고 온 이은지라고 합니다. 굿뉴스코는 봉사기간이 1년이지만 페루에서의 1년이 부족한 것 같아서 다시 한 해 동안 더 봉사하고 돌아왔습니다. 2013년 초, 제가 귀국했을 때 확연히 달라진 피부 색깔과 말투, 그리고 따뜻한 빛을 내는 눈빛과 생기 있는 행동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적잖이 놀랐죠. 페루가 저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주었는지 지금부터 소개할게요.

 
 

공대 예쁜 여학생
저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똑순이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야무진 학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KBS어린이합창단 오디션 제의를 받고 중학교 때 댄스그룹을 만들 정도로 노래와 춤도 곧잘 했지만 부모님은 공부를 하길 바라셨기 때문에 모두 그만두고 학업에만 전념했죠. 이후 입학한 대학은 건축공학과였습니다. 저는 그동안 눌러왔던 놀고 싶은 욕구를 다 쏟아냈어요. 남학생들만 북적대고 여학생들은 손에 꼽는 공대에서 예쁜 옷을 입고 화장하고 다니면 저와 친해지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많았죠.
대학에서 새롭게 사귄 친구들과 즐거운 20대 청춘을 시작하는 듯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밤늦게 돌아오는 저의 발걸음이 매우 공허해졌습니다. 체력이 다할 때까지 여러 아르바이트를 뛰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쁘니까 데리고 다니면 좋다는 뜻의 말들을 들을 뿐, 저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겉으로는 웃었지만 제 속에는 상처 입은 새 한 마리가 불쌍하게 울고 있었죠. 자연히 학과 공부와도 멀어졌습니다.

미소를 가지고 싶었다
이때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모집 포스터를 봤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봉사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사진 속 주인공들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나도 저기 가야겠다’ 하고 주저하지 않고 지원했어요. 처음에는 아프리카를 지원했고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훨씬 짧은 기간에 영어도 더 잘 배울 수 있는 나라를 두고 왜 굳이 아프리카로 일 년 동안 다녀오냐며 극구 말리셨어요. 하지만 이미 건조해질 대로 건조해져 갈라지기 시작한 제 마음은 촉촉한 봄비 같은 새 삶이 필요했어요. 포스터 속 미소를 저도 꼭 한 번 가지고 싶었기 때문에 울면서 부모님을 설득했어요. 이후 페루라는 생소한 나라로 지원국을 바꿨고 결국 2011년에 지구 반대편 잉카문명의 후예들이 사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못생긴 페루 사람들이 좋다
페루에는 어떤 언어와 기후가 있고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2박3일에 걸려 도착했습니다. 수도 리마는 해안에 위치하여 습도가 높았지만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사막성 기후라 흙만 있는 민둥산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시내에는 의외로 가로수와 수풀들이 많았는데 곳곳에 위치한 물탑들을 통해서 물을 공급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과거 잉카제국의 인디오들이 스페인 군대에 끝까지 항쟁했던 역사 때문에 다른 남미국가들에 비해서 인디오 비율이 높은 나라입니다. 인디오들은 우리와 같은 동양인 얼굴도 살짝 지녔고 피부도 까무잡잡하고 키도 작아서 못생겼다고 할 수 있지만 잘난 척하지 않고 낮은 마음으로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게다가 남미국가 중에 가장 한류가 심한 나라이기도 해서 한국인인 우리가 가면 아무 이유 없이 무척 반겨줬습니다.
그래서 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무료 클래스를 진행했습니다. 아직 스페인어가 서툴 때는 동료 단원들과 함께 의논해서 할 것이 많았지만 혼자 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잘될 것 같아서 혼자 일을 진행했죠. 그러다 보니 단원들과 소통이 잘 안되고 한국어클래스 수업도 점점 힘에 부치게 됐어요. 한국에서 온 봉사단원으로서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좀처럼 쉽지 않았어요. 똑순이처럼 일은 잘했지만 사회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죠.

아름다운 도시 라파스
안데스 산맥의 고산 도시도 자주 다녔습니다. 페루의 쎄로데빠스코 라는 해발 4600m에 위치한 도시에 갔을 때는 일주일에 딱 세 시간만 물이 나왔습니다. 각 가정에서는 물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 기다렸다가 겨우 받는 그 물조차 누리끼리하고 얼음장 같이 찼어요. 마을에 돈만 내면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 있는 시설이 있었지만 봉사단원으로서 차마 사치를 부릴 수 없었죠. 
2011년 하반기는 남쪽에 위치한 국가 볼리비아에서 5개월 동안 활동했어요. 안데스산맥을 따라 국경에 위치한 ‘하늘하고 가장 가까운 호수 티티카카’를 구경하고 볼리비아의 가장 높은 도시인 라파스로 이동했죠. 해발 4,000m에 달하는 고산지대는 산소가 부족하고 날씨는 추웠지만 하늘과 가까워서 햇볕은 더욱 뜨거웠어요. 때문에 사람들 피부가 매우 까무잡잡하고 찬바람과 건조한 기후 때문에 볼이 벌겋게 트더라고요. 우기에는 비가 내리거나 구슬 같은 우박이 내렸습니다. 우박이 내릴 때는 양철 지붕으로 유리구슬 같은 우박이 통통 튀어서 구르는 것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라파스를 지나 정글에 이르는 중간지점에 위치한 융가스라는 산골마을에서는우물물을 퍼서 사용하거나 계곡이나 강에 가서 씻곤 했는데, 노천에서 세수조차 해본 적 없던 저는 천막 하나만 두르고 샤워하는 것이 무척 어색했어요. 게다가 한국에 있을 때는 설거지 한 번도 안 하고 살다가 찬물로 설거지부터 손빨래, 청소 등을 했으니 뭐든지 처음인 저에게 무척 고생이었죠. 그런데 볼리비아 사람들이 저를 위해서 물을 떠다주기도 하고 물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등 많은 것들을 도와주더라고요. 산속 오지 활동에서 저를 도와주는 볼리비아 사람들을 통해서 상생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뭐든지 힘들어하고 생소해했던 저에게 볼리비아 사람들은 페루 사람들보다 느린 스페인어로 따뜻한 응원과 감사인사를 보내왔죠. 저도 서투른 스페인어로 제 속마음의 고민들을 꺼내놓으면서 깊은 대화를 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어요.
라파스는 사방이 산으로 둘렀고 시내를 중심으로 차곡차곡 집들이 세워져 있는 냄비모양의 도시입니다. 밤마다 집집마다 켜진 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밤하늘의 별과 함께 황홀한 기분을 느꼈어요. 달 또한 무척 가까워서 마치 어두운 무대 위의 뮤지컬 배우를 조명하듯이 달빛이 저에게 쏟아졌어요. 해외봉사 와서 처음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마음을 보다
그리고 페루로 돌아오니 어느새 귀국할 시간이 임박해 있었습니다. 이제야 조금씩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함께하는 법을 알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페루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은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봉사 연장 신청을 했고 페루에서 또 다른 일 년을 시작했죠. 하지만 잘해보겠다는 욕심이 생기자 나보다 일을 잘하는 동료단원들을 질투하던 저를 어느날 발견했어요. 그런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말하지 않고 꽁하게 시간을 보냈죠. 6개월 후에 우연히 페루 친구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저도 모르게 울면서 “나의 봉사는 실패했어. 빨리 한국에 돌아갔으면 좋겠어.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야” 하고 속마음을 토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우리는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 네가 말을 안 하니까 우리도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어”라고 하더라고요. 친구들의 마음이 무척 고마웠고 그때부터 친구들에게 제가 먼저 다가가서 솔직한 제 마음을 표현하고 함께 하고자 했어요.

가수가 된 봉사단원
노래와 춤을 좋아했지만 마음껏 끼를 발산해보지 못했던 저는 어느날 기타를 치는 따이고르와 함께 재미삼아 안드레아 보첼리의 <비보 뽀르 에야 Vivo por ella>를 부르고 있었죠. 마침 공연을 준비하던 주변 친구들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잘한다! 너 가수하면 되겠다’ 하면서 저를 공연총괄자에게 추천했어요. 이때부터 따이고르와 피아노 치는 라켈과 함께 그룹을 만들어서 다양한 행사나 봉사활동 가면 남미 전역에서 유행하는 노래들을 불렀어요. 가수만큼 훌륭한 노래실력이 아니었지만 제 노래를 듣고 감동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더 용기를 가졌고 제가 어렸을 때 포기했던 가수라는 꿈을 실컷 이뤄볼 수 있는 순간들이었어요. 초반에는 뜻도 모르고 부르던 스페인어 노래의 가사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면서 스페인어 실력도 빠르게 늘어갔어요.
그 외에도 빈민가를 방문해 다양한 캠프를 열고 고아원과 양로원 방문 공연을 했고 ‘뿌노puno’라는 고산지대 도시에서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한 성금 마련 마라톤도 주최했어요. 마추픽추에 갔을 때는 기차를 타고 가야 쉽게 오를 수 있는 산 길을 친구들과 10시간 동안 오르면서 자연의 경이로움을 경험했다. 볼리비아 시골마을에 가서는 전통춤 ‘띵꾸스’를 추기도 하면서 저는 어느새 안데스산맥의 까무잡잡한 피부에 벌건 볼을 가진 니냐niña(여자어린이, 키 작은 페루인들이 키 작은 나를 보고 놀린 말)가 돼 있더라고요. 비록 외모는 촌스러워졌을지 몰라도 제 눈빛은 산골마을에서 친근하게 봐왔던 반딧불처럼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이제는 꿈꾼다
해외봉사 2년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부모님은 저를 보고 무척 놀라셨습니다. 물론 외모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예전보다 무척 살가워진 제 태도 때문이었죠. 어머니는 집안일 하나도 하지 않던 딸이 청소기를 돌리는 모습에 놀라셨고 아버지는 ‘다녀오겠습니다’ 외에는 말이 없던 딸이 먼저 다가와서 말 거는 것에 놀라셨어요. 전에는 과묵한 아버지와의 대화가 어색해 웬만하면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을 피하려고 했지만 이제는 제가 먼저 다가가서 어색하지만 애교를 부리고 하루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해드리게 됐죠. 이렇게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해외봉사 동안에 배우고 왔기 때문입니다. 페루 봉사활동 가기 전의 저는 풍족한 부모님의 지원 아래서 공부하는 학생이었지만 얼굴에는 항상 생기가 없었고 슬퍼보였죠. 그런데 해외봉사를 하며 진정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우정을 나누면서 무엇이든지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긍정적인 마인드와 밝은 미소를 배웠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제3회 리더스컨퍼런스에 참여했습니다. 아동노동 해결방안에 대해서 팀끼리 의논한 내용을 아프리카 청소년부 장관님들에게 프레젠테이션 할 기회가 있었죠. 그런데 우리 팀에는 우연히 페루 교육부 담당 국회의원이 오셨고 제가 페루에서 보고 느낀 아동노동 문제에 대해서 스페인어로 직접 대화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돈이 없어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노동하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제가 한국에서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환경에 감사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공부와 대외활동, 다양한 경험을 통해 졸업 후에는 남미로 진출하여 청소년센터를 건축해 일하는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내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페루에서의 2년, 그 시간이 아직도 그립습니다.

갸스통 아꾸리오 Gastón Acurio
문화 대통령이라 불리는 스타 쉐프 갸스통 아꾸리오는 남미와 유럽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그는 페루의 요리를 세계인의 밥상으로 이끌었다. 페루 전통음식에 자신만의 기술을 더한 새로운 그의 요리에 세계 미식계가 관심을 갖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 그의 레스토랑이 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Mario Vargas Llosa
페루 작가이며, 소설가, 정치가, 언론인, 수필가이다. 대표작으로는 군사학교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도시와 개들》이 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비껴가지 않으면서 사회문제에 부단한 관심을 보이고 이를 작품으로 표현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의 대표적인 저항 작가로 꼽히며 201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을 혼용한 다양한 실험정신을 선보였으며, 유명한 미술작품을 삽입하여 소설 속의 인물과 상관관계를 갖게 하고 여러 사건을 번갈아 기술하는 등의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였다. 소설뿐만 아니라 희곡·평론·수필 등을 섭렵하면서 여러 장르에서 문학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에는 에스파냐어권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세르반테스 문학상을 받았다.

마추픽추
약 1만 명의 잉카인들이 살던 요새도시 마추픽추. 약 400년간 세속과 격리되어 그 문화가 잘 간직된 도시다. 높이 솟아있는 기암절벽들, 무성한 정글로 둘러싸인 이곳이 1911년 미국인 하이럼 빙엄에 의해 발견되
 
 
었을 때는 이미 폐허가 된 후였다. 그곳에 살다 사라진 잉카인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며 20톤이나 나가는 돌을 정교하게 쌓아올려 도시를 세운 잉카인들의 기술은 가히 경이롭다.

코카나무
고산지대에 사는 페루 사람들은 고산병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코카 잎을 씹어 먹거나 차로 끓여서 마신다. 페루와 볼리비아 사람들은 건조한 코카 잎을 씹으면 일시적으로 배고픔도 잊을 수 있고 피로도 회복된다고 믿고 있어 밭일이나 여행 시에 필수품이다. 마취약이나 마약 원료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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