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삼국지>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제갈량(제갈공명)이란 이름은 들어 봤을 것이다. 그 만큼 그는 지혜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런 제갈량이 후계자로 점찍은 젊은 인재가 있었으니 바로 마속馬謖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뜻을 채 펼쳐보지도 못하고 30대의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촉망받는 인재였던 그가 왜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 했는가?
 

 
 
마 씨 집안의 다섯 째, 마속
2세기 말의 중국은 그야말로 변화와 격동의 시대였다. 400년을 이어오던 한漢나라의 국력이 쇠하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천하를 제패할 야심을 가진 제후들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북쪽으로는 조조의 위魏나라, 동쪽으로는 손권의 오吳나라가 단연 막강했다. 한 황실의 후예인 유비가 이들 사이에서 힘을 키워 촉蜀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삼국지>의 기본 줄거리다.
사실 변변한 영토도, 제대로 훈련받은 군사도 없는 유비가 두 나라에 맞선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그런 유비를 도와 촉의 건국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 바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감동받아 영입된 제갈량이다.
유비의 군사(軍師, 작전참모)가 된 제갈량은 불과 3천 명의 군사로 조조의 10만 대군을 무찌르는가 하면, 적벽대전에서는 오나라의 힘을 빌려 조조의 백만 대군을 쳐부수는 대승을 거둔다. 그 여세를 몰아 세력을 넓히려 한 유비가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을 때, 부하 이적이 말했다.
“이 고을에 마馬 씨 성을 가진 5형제가 있는데, 모두 재주가 뛰어나다고 합니다. 특히 넷째인 마량은 인망이 높고, 다섯째인 마속馬謖은 병서에 밝으니 등용해 보심이 어떨지요?”
유비가 마량, 마속 형제를 불러 써 보니 과연 재주가 뛰어났다. 특히 마속은 꾀가 많고 임기응변에도 능해 유비의 참모가 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임종이 가까워진 유비의 부름을 받고 제갈량이 찾아왔을 때 마속은 유비 곁에 있었다. 마속이 잠깐 나간 사이에 유비는 제갈량에게 마속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예, 당대의 영재로 봅니다.”
“그렇지 않소. 내가 보기에 마속은 언과기실(言過其實, 실제보다는 말이 앞섬)한 듯하오. 승상께서는 마땅히 잘 살펴서 써야 할 것이오.”
그러나 제갈량은 유비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마속을 가까이 두고 총애했다.

사마의를 누가 막을 것인가?
유비가 세상을 떠난 뒤, 제갈량은 무너진 나라에 대한 애끓는 충정과 간언을 담은 출사표를 유비의 뒤를 이은 장남 유선에게 올리고 위나라 정벌에 나섰다.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찌르며 한중漢中을 석권하고 기산祁山으로 진출했다. 이에 놀란 위나라 황제 조예(조조의 손자)가 급파한 명장 사마의司馬懿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로 진을 치고 촉군과 대치했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진을 깰 계책을 이미 세워놓고 있었는데, 문제는 가정街亭이었다. 한중 동쪽에 있는 가정은 전략적 요충지로, 위와 촉 모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이자 군량 수송로였다. 만약 가정을 잃으면 북벌의 웅대한 계획은 모두 끝장이 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중책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때 39세의 마속이 그 중책을 자원하고 나섰다.
“가정에는 성곽도 없고 지형도 그리 험하지 않아 수비하기 매우 어렵다. 그래도 가겠는가?”
“소장은 어려서부터 온갖 병서를 탐독했습니다. 가정 한 곳쯤 지켜내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마속은 이론에 밝고 공명의 참모로 활약했지만, 실전 경험은 전혀 없었다.
“사마의를 결코 얕봐선 안 된다. 게다가 선봉장 장합은 위나라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다.”
마속은 자신의 지식을 믿는 마음이 강했고, 이 기회에 자신이 이론에만 밝은 사람이 아니라 실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한번 보여줄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갈량이 볼 때 비범한 사마의에게 마속은 상대가 안 되는 사람이었다. 제갈량이 주저하자, 그는 거듭 간청했다.
“사마의나 장합은 물론, 설령 조예가 친히 온다 한들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번 싸움에서 패한다면 소장은 물론, 제 가족들까지 참형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군중에선 농담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유비의 각별한 유언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마속을 보내며 가정 확보가 이번 전쟁의 관건임을 강조하고, 가정에 가면 요긴한 길목에 진채를 세워 적이 쉽게 지나가지 못하게 하되, 높은 곳에 진 치는 것은 피하라고 지시했다. 그래도 못 미더워 고상에게 군사를 주어 가정 동편 열류성으로 보내고,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뒤이어 위연을 보내고, 또 마속의 부장副將으로 왕평을 딸려 보냈다.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현장 지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갈량이 일러준 병력 배치가 전술상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등히 우세한 사마의의 군대를 상대로 싸우는데, 제갈량이 일러 준 방책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할 수 없는 방책이라고 판단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도로를 사수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자기 편에 유리한 것은 오직 지형뿐이라는 생각에 적을 유인해서 역공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치려했다. 부장 왕평은 만일 적이 산을 에워싸면 아주 위험하다며, 제갈량이 말한 대로 중요한 길목에 토성을 쌓고 영채를 세워 지키자고 여러 번 간하였으나 마속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파죽지세’라는 병법의 이론을 들먹이며 자기 생각대로 산꼭대기에 병력을 배치했다. 왕평은 마속에게 여러 번 간청해도 듣지 않자 제갈량의 말을 따라 5천의 군사를 따로 거느리고 산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영채를 세웠다.

 
 
마속, 그는 유능한 장수였지만
며칠 후, 드디어 사마의가 이끄는 위군이 나타났고, 사마의는 촉군이 산 위에 진을 친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선봉장 장합을 시켜 산을 겹겹이 포위하고 물길을 끊게 했다. 한나절이나 지났을까, 대군에게 포위되어 산 아래로 통하는 길이 끊겨 식수를 구하지 못한 촉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보급로까지 차단되어 급기야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친 촉군 중 일부는 산에서 내려가 위군에게 항복해 버렸다. 사마의는 산 둘레에 쭈욱 불을 지르게 했고, 불길이 산 위로 덮쳐오자 촉군은 꼼짝없이 산꼭대기에 갇혀 우왕좌왕하다 대부분 불에 타죽거나 위군에게 쫓겨 도망치기에 바빴다.
결국 가정은 위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고 패배한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하며 전군을 철수시켜야 했다. 마속은 스스로 온 몸을 굵은 밧줄로 몸을 결박한 채 제갈량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공명이 말하였다.
“너는 어려서부터 병서를 많이 읽어 전법에도 밝은 사람이 아니더냐? 가정은 우리 군의 가장 근본 되는 곳이라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더니 너는 가족들의 목숨까지 걸고 이번 중임을 맡았다. 네가 만일 왕평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화는 입지 않았을 터. 이번에 군사들이 패하고 가정을 빼앗긴 것은 모두 네 잘못이다. 어떤 큰 벌을 내리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마라.”
“승상께서는 저를 자식처럼 대하셨고, 저 또한 승상을 어버이처럼 섬겼습니다. 저의 죄 실로 죽음을 면키 어렵습니다만, 남은 가족들을 돌보아 주신다면 비록 죽어 구천에 가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네가 죽은 뒤에는 내가 너희 가족을 거두어 다달이 녹미를 줄 것이니 너는 조금도 근심하지 말라.”
제갈량은 말을 마치자마자 “당장 마속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고 명령했다. 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이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설득했으나 제갈량은 듣지 않았다.
“마속이 아까운 장수인 것만은 틀림없소.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군율을 저버린다면 이는 마속의 죄보다 더 큰 죄가 될 것이오. 그럴수록 오히려 가차 없이 벌을 내려 대의를 바로잡아야만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있소.”
마속은 형장으로 끌려갔고, 제갈량은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땅에 엎드려 목놓아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장완이 그 이유를 묻자 “내가 우는 건 마속 때문이 아니오. 지난 날 선제先帝(유비)께서 백제성에서 승하하시면서 내게 ‘마속은 말이 앞서는 인물이니 중용하지 말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요. 내 오늘에야 선제의 선견지명을 깨달은 어리석음이 원망스러워서 이렇듯 애통해하는 것이오.”

 
 
자기 과신이 빚은 잘못
마속의 자기 과신過信은 본인만 망하게 할 뿐 아니라 무고한 수만 명의 군사들을 비참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또 그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큰 애통을 안겨주었는가? 나아가 제갈량과 촉나라에 얼마나 큰 해를 끼쳤는가? 마속이 자신의 경험 부재를 알고 제갈량의 말을 청종했더라면 삼국의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면서 가장 위험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마속처럼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과신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못된 생각의 결과로 나타나는 범죄는 악한 것으로 여기지만, 자기 과신을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때로는 자기 과신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도 하고, 어떤 조직이나 한 나라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불행의 원인을 잘 분석해보면 대부분 자기 과신에서 온 결과일 때가 대부분이다. 마속은 제갈량보다 자신의 지혜를 더 믿었고, 제갈량 역시 유비의 말보다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했다.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존재를 못 만나 본 사람이 자기가 가장 지혜로운 줄 안다’는 말이 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겸손한 마음을 갖는다. 그런 사람은 자기주변 사람의 말을 청종할 줄 아는 마음의 귀를 지녔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그럴 때 자신을 유익하게 하고 주변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울면서 마속을 베었다’는 뜻의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고사성어의 연원이 된 삼국지의 이야기는 자신을 믿는 마음이 무서운 결과를 빚어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글쓴이 이한규
대구대학교에서 국어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대안학교인 링컨스쿨 교장으로 재직하며,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마인드 강연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번 호에서는 삼국지 인물 속에 담긴 마인드 세계에 대해 기고해 주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