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라가모, 지미 추 등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구두 브랜드들로, 디자이너의 이름을 따 브랜드를 지었다. 한국의 구두 디자이너 김효진 씨도 자신의 영문 이름을 딴 구두 브랜드 ‘지니 킴’을 28살에 론칭하여 7년 동안 구두 장인의 외길을 걸어왔다. 자기 이름 석 자를 걸고 시작한 브랜드에서 갖은 좌절과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젊은 날의 고생을 당연하게 여긴다며 달려왔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 따뜻한 그의 인상과 반대로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추진력을 발휘한다. 구두 사업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 때가 많았지만 아직도 구두 디자인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다. 회사 운영으로 스트레스가 무척 심할 때는 여행을 떠나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보면 마음 속 고민들이 정리된다고 한다.
▲ 따뜻한 그의 인상과 반대로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한 추진력을 발휘한다. 구두 사업을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 때가 많았지만 아직도 구두 디자인은 그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다. 회사 운영으로 스트레스가 무척 심할 때는 여행을 떠나 삶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다 보면 마음 속 고민들이 정리된다고 한다.
“안녕하세요? 지니 킴 김효진입니다.”
구두를 디자인하며 브랜드 지니 킴의 대표이사로 있는 김효진 씨가 서글서글한 외모와 목소리로 인사했다. 조금은 까탈스러울 것 같은 디자이너의 이미지와 달리 그는 의외로 즐겁게 이야기를 풀어놓고 상대방의 기분과 취향도 파악할 줄 아는 비즈니스우먼이었다.
“디자이너들은 감수성이 풍부해서 자신의 영역에 대한 프라이드와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고집하다 보니 실제 비즈니스를 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비즈니스란 불안정한 관계에서 상대방보다 항상 갑일 수만은 없어요. 상황에 따라서 타협을 하거나 손해도 볼 수 있는데, 다행히도 저는 20대에 잡지 기자 어시스턴트와 홍보대행사 일을 하면서 패션 사업이 흘러가는 방향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었죠.”

사랑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김효진 씨의 20대 목표는 ‘무엇이든 경험하고 즐기기, 사랑하는 일 찾기’였다. 성균관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사랑하는 일을 찾을 때까지 자신에게 다가오는 직업의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열정을 다해 일했던 것. 24살에 잡지사 <보그>에서 패션 어시스턴트로 바쁘게 일하다가 패션 홍보대행사의 업무에 매력을 느끼고 또 다른 세계로 뛰어든다. 그곳에서 그는 패션 비즈니스에 대한 감각을 깨우친다. 첫 업무는 당시 잘 알려져 있지 않던 덴마크의 명품 홈 엔터테인먼트 브랜드 ‘뱅앤올룹슨’ 홍보. 활기찬 업무 환경을 상상했던 그는 선배들의 냉랭한(?) 분위기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하지만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기로 하고 그는 당시 클라이언트들이 원하던 유명 일간지 홍보 기사 게재를 성사시킨다. 그는 선배들이 작성했던 보도자료를 모두 읽고 한 줄 한 줄 정성들여 ‘뱅앤올룹슨 라디오가 드라마의 잘사는 집에 꼭 하나씩 나오는 이유가 시대를 앞서가는 명품 디자인 때문’이라는 요지의 기사를 작성해 이를 주요매체에 게재시키는 데 성공한다. 갖은 아이디어와 노력을 짜내 언론사 기자들에게 “참신하고 충실하다”는 칭찬을 들을 만큼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이후 페라가모, 캘빈클라인 등 패션 브랜드 분야에서도 다양한 기획 기사를 제안해서 일간지 게재를 성사시킴으로써 클라이언트들에게 만족을 주는 것에 보람과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홍보의 벽이 높아 살벌한(?) 분위기 속에 하루하루 신경전을 벌이며 일했던 선배들의 속사정을 몰랐던 그는 점차 멋지고 우아하기만 할 것 같았던 홍보 관계자들이 물  속에선 세차게 발길질하는 백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이후 더 가슴 떨리는 일을 찾고 싶어 1년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세계 패션의 중심에서 만난 좌절과 기쁨
마침 친구들이 뉴욕으로 유학을 간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세계적인 패션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26살에 뉴욕주립대의 패션단과대 FIT에 1년 과정으로 입학했다. 1년 후 A가 가득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졸업하면서 세계적인 남성정장 브랜드 ‘에르메질도 제냐’에서 최고의 인턴이라는 칭찬을 들으며 인턴 생활도 마쳤다. 창창하게 앞날이 열릴 것 같은 자신감으로 100군데가 넘는 회사에 부지런히 지원했지만 그를 고용하겠다는 곳이 단 한곳도 없었다. 혼자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절망의 수렁에 빠졌을 때 극심한 허리 통증으로 응급실까지 실려 갔고 그는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그의 인생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라고 회상한다. 그동안 열심히 사랑하는 일을 찾았지만 결국 백수로 한국에 돌아왔던 것. 서서히 몸을 회복하면서 인터넷으로 다시 취업자리를 알아보며 그는 눈을 낮추기로 했다. 그리고 국내대기업의 뉴욕 원단회사에 취직해서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의 적성에 맞지 않은 따분한 일이었지만 100년이 지난 낡은 집에서 지내며 감사하게 일했다.
그때 우연히 그의 절친한 친구가 만든 하이힐을 봤다. 서툰 솜씨로 제작된 하이힐이지만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담겨 있었던 것. ‘구두 디자이너라니! 나도 정말 하고 싶다!’ 하고 가슴 떨림을 느낀 그는 며칠 후 FIT 구두 수업에 등록했다. 멀쩡한 구두를 뜯어서 패턴기술과 재단 상태, 못의 위치 등을 분석하고 친구들의 헌 구두까지 뜯어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구두를 만들고 공부하는 긴장과 기쁨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어요. 공장에서 구두 제작일을 더 배우고 싶어서 알아보는데 대소비 도시 뉴욕에는 생산공장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한국에 있는 구두 공장에도 뛰어난 장인들과 최신식 구두 자재들이 많았어요. 그 길로 미련 없이 한국으로 귀국했죠.”

구두 브랜드 지니 킴의 탄생
“서울 성수동의 작은 구두공장에 막내 디자이너로 들어갔어요. 월급이래 봐야 80만 원이 고작이었지만 구두를 디자인할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어요. 그런데 제가 디자인한 구두는 동기 디자이너가 만든 구두보다 팔리지 않았어요. 반품되는 구두를 보면서 사장님께 죄송해서 그만두고 싶었지만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면서 참았죠. 언젠가는 제 구두를 좋아해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상상하면서요. 백화점과 동대문, 지하철을 다니면서 어떤 구두가 잘 팔리는지, 여자들 신발만 보면서 연구하고 또 연구했어요.”
그런 그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하루는 압구정동을 걷는데 여러 매장에 자신의 구두가 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씩이라도 팔렸던 그의 구두는 알고보니 강남지역의 패셔니스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950년대의 할리우드 스타들이 신었던 구두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한 구두는 과감한 색과 디자인으로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의 구두는 특별한 날에 할리우드 스타나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충족시켰다. 점차 자신감이 붙은 그는 시장만 잘 조준해 구두를 판다면 승산이 있다는 기대에 찼다.
공장을 그만두고 한 달 동안 25가지의 구두 디자인 샘플을 직접 제작한 그는 2006년 2월에 초기 자본금 400만원으로 온라인 패션숍 ‘지니 킴JINNY KIM’을 시작했다. 온라인에서 구매자들이 주문하면 그때부터 공장에 의뢰해서 제작에 들어갔고 꼼꼼히 상품을 검품하고 발송했다. 이는 곧 순조로운 매출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해외로까지 무대를 넓히다

 
 
이후 할리우드 스타들이 주로 다니는 LA의 패션 편집 숍 MILK와 다른 신발 숍에서도 그의 구두가 팔리기 시작했고 미국의 디아볼리나와 노드스트롬 백화점에도 지니 킴이 입점했다. 12월에는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 첫 오프라인 매장을 오픈했다. 과거 잡지사와 홍보대행사에서 열정적으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많은 패션 기자들에게 홍보하여 브랜드 지니 킴의 시작을 크게 알렸다. 현재 국내 백화점 17군데에 입점하여 운영 중이며 다양한 이벤트와 관련된 상품들을 꾸준히 기획하고 있다.
“사업 시작하고부터 4,5년 동안은 슬픈 영화나 드라마, 발라드 음악 감상은 되도록 피해왔어요. 그 분위기에 젖어버리면 긴장감 있게 돌아가는 회사 운영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죠. 성수동에서 수십 년 간 구두공장 일을 하다가 개인 사업 하신 분들도 몇 가지 문제들이 생겨서 폐업하시는 것을 봤어요. 저 역시도 사업하면서 풀기 어려운 문제들을 만났죠.”
구두 매장을 시작하고 5개월이 지났을 때 거래하던 공장으로부터 일방적으로 구두를 만들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600켤레 이상의 구두를 당장 만들 수 있는 공장을 눈물겹게 수소문해 찾은 그는 겨우 고객들에게 상품을 발송할 수 있었다. 미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주문한 구두를 보낸 후 구두 대금이 오지 않아 바이어에게 연락했더니 파산상태라 돈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답을 듣기도 했다. 당장 그를 사기꾼으로 고발하고 싶었지만 그 일 때문에 회사를 돌보지 못하면 그 손해가 더 클 것을 예상하고 일에만 집중했던 그였다. 하루는 어느 고객이 구두굽이 빠져서 수선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해당 디자인의 구두를 미국 백화점에서 모조리 사들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불량 구두 하나가 더 남아서 고객의 발을 망가뜨리는 아찔한 일이 발생할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샌프란시스코 사건을 겪으며 인생의 화복禍福을 경험했고, 오히려 앞만 보며 달려가던 제 인생에 그런 실패들이 좋은 스토리를 만들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어요. 제 목표는 여전히 뚜렷해서 좌절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감정들을 무시할 수 있었고, 당연히 당해야 할 어려움이라고 여겼죠. 젊을 때는 인정이나 칭찬보다 비판, 거절, 반대, 실패 등과 친해야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기술자들을 대할 때도
과거에 구두공장의 일방적인 계약 불이행으로 곤란을 겪은 뒤, 뼈저린 각오로 2012년 봄에 드디어 지니 킴 자체 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금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폐업했다는 성수동 공장들의 소식을 들으면 가슴이 아팠다. 
“이탈리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공장에서 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나이 든 기술자분들이 대다수예요. 힘든 노동은 싫어하고 디자이너와 같이 겉모습만 화려한 일만 좇는 젊은이들의 성향 때문인 것 같아요. 하지만 구두 디자인은 화려해 보이는 겉모습만 있는 게 아니죠. 제가 처음 구두공장에 취직했을 때는 하루 종일 가죽장식, 부자재 등을 사러 다니느라 정작 디자인할 시간은 별로 없었어요. 구두 제작하시는 기술자 선생님들과도 디자인에 대해 의논하고 조율해야 해서 그분들과 같이 6개월 동안 공장바닥에 신문지 깔고 밥 먹으면서 친분을 쌓았어요. 제 디자인이 유독 복잡하다고 그분들이 제작을 거절하시면 구두가 나올 수 없잖아요. 그래서 항상 그분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자재와 도구들을 챙겨드렸어요. 구두 제작하는 장인들의 일을 지켜보면서 제 구두 디자인의 부족한 점도 고쳐나갔어요.”
신입 디자이너들은 기술자들로부터 디자인을 퇴짜 맞을 때가 많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라도 구두 제작하는 기술자들과 부딪혀서 퇴사하기도 한다. 기술자에게는 구두제작을 모르는 겉만 번지르르한 초짜 디자이너의 디자인이 한심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기술자들의 퇴짜에 상처를 받는 일이 있더라도 여전히 존경을 담은 마음으로 배우고 싶은 자세로 또 다시 다가가야 자신의 구두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

 
 
객관적으로 나의 삶을 볼 수 있기를
김효진 대표는 현재 바쁜 일상에도 15개 일간지와 30권 이상의 패션지를 빠짐없이 읽고 세계 패션의 주요 도시들을 매년 5회 이상 방문하여 그곳 도서관에서 자료를 수집한다. 그리고 고급 백화점과 편집 숍까지 훑으며 트렌드를 파악한다. 그렇게 쌓아온 능력으로 여성이라면 누구든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지니 킴의 구두’를 신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목표를 향해서라면 어떤 난관이라도 긍정적으로 뛰어넘고 돌진하는 추진력이라고 생각해요. 사업하면서 좌절할 순간이 많았지만 객관적으로 제 인생을 바라보면서 그 순간을 또 하나의 기회로 여기고 달려 나갈 수 있었죠. 대학생 여러분도 실패와 실수로 인한 어려움은 당연하게 겪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 이면에 있는 기회들을 발견해 다시 도전한다면 20대 청춘은 더 아름답게 빛날 줄 믿어요.”
그는 아직 목표의 60%밖에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 할리우드에 지니 킴 매장의 정식 오픈을 준비하며 세계적인 구두 브랜드 지니 킴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오늘도 그는 구두 때문에 긴장하고, 구두 때문에 즐거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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