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학년만 8년 다닌 김범규

20살에 대학에 입학 후 공부는 뒷전, 돈을 벌겠다는 야심찬 생각 하나로 열심히 일했던 김범규 씨. 그러나 결국 빚더미에 앉고 어머니의 마음에 고통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제대로 된 대학생활 해보겠다고 지원한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아프리카로 건너간 그는 그곳에서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
훤칠한 키에 중후한 음성,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의 김범규 씨는 성실한 대학생으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것 같아 보였지만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엔 사연이 많았다. 

 
 
돈 좀 벌자
“15살 때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서 식당을 하면서 저와 형을 키우셨어요. 고등학교 때 고생하면서 공부해 경북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는데 공부는 좀 그만하고 돈을 벌고 싶었어요. 대구 사인동 버거킹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죠. 학교 끝나면 7시 반에 출근해서 새벽 5시까지 일하면서 한 달에 20~30만 원을 받았죠.”
노래 동아리에도 가입해 무지개색으로 물들인 헤어스타일로 주변의 각종 대학가요제에 나갔다. 이런 연유로 자연스럽게 1학년 첫 학기 성적표에서 F가 두 개 이상 나왔고 다음 학기 진학이 불가능했다. 그는 다음 학기도 똑같이 보내다가 군 입대를 위해 휴학했다.
24살에 여전히 1학년으로 복학했지만 성적은 마음잡고 공부하면 충분히 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때본격적으로 노래방과 고기집, 술집 등 일당이 가장 높은 곳만 골라서 일했고 개인 사업도 시작했다.
“제가 투자하는 사업은 분명히 잘될 것이라는 믿었고 대학생으로서 부모 동의 없이 가능한 대출은 다 받았어요. 2천만 원을 빌려 사업을 시작했는데 망해버렸어요. 밤늦게까지 일해서 60%나 되는 이자를 죽어라 갚아도 원금은 그대로니까 나중에는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그나마 번 돈마저 밤늦게까지 노는 것과 술에 써 버리는 등 정신을 못 차렸어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엄청난 이자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1년 뒤 그 사실을 어머니께 털어놓았다. 채무기록들이 한가득 적힌 종이를 보고 어머니는 긴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했지만 어머니 수중에도 돈은 전혀 없었다. 그나마 그동안 어머니가 성실히 생활해오면서 주변에 쌓아왔던 신뢰 덕에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저도 정신 차리면서 대출금은 다 갚았어요. 하지만 깊은 좌절이 찾아왔어요. 언제든 대학생으로 돌아와 공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느새 제 마음은 세상풍파로 황폐해졌어요. 다시 복학했지만 여전히 대학생활은 답답했고 제 인생이 허무했어요. 어디서부터 제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고 어떻게 풀어야 할지 답답했지만 아쉽게도 제 주변에는 그것을 물어볼 멘토가 없었어요.”
고민의 돌파구를 찾다가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에 지원했다. 봉사단 최종워크숍에 참석하던 중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가 인간이냐? 어머니가 너 때문에 그렇게 고생했는데 또 공부 안 했냐?” 집으로 배달된 2005년 2학기 성적표는 F투성이였다. 그날 밤부터 새벽까지 그는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과 자신이 만든 한심한 결과들이 그의 마음을 짓눌러와서 더이상 견딜 수 없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산 결과들은 모두 비참한 실패였다. 그래서 남아공에서 1년 봉사하는 동안 새로운 삶을 얻길 원했다. 친구들은 또다시 휴학하는 그를 말렸지만 그는 2006년 2월에 아프리카를 향해 떠났다.

인생 제2막의 시작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 도착한 그는 고풍스런 유럽식 건물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 덥지 않은 날씨에 백인들도 함께 살아가는 남아공 사회는 그가 상상하던 아프리카와는 너무도 달랐다. 봉사단이 활동한 곳은 딥슬룻이라는 빈민가였는데 백인들은 그곳을 빙 둘러갈 정도로 치안이 불안정하고 환경과 위생이 열악한 흑인 동네였다.
“처음에는 아프리카인 특유의 불쾌한 냄새와 판잣집에서 10명씩 모여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속으로 그들을 무시했어요. ‘뒤에서 누가 총으로 나를 쏘지 않을까’ 몸을 사리기 바빴죠. 그런데 지속적으로 문화공연 등 행사를 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마음은 세상에 찌들어 거칠어진 저보다 훨씬 깨끗했어요. 저는 돈 벌려고 발버둥치다가 고통을 겪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가난해도 오히려 여유가 많고 남에게 베풀 줄 알았어요. 언어도 영어, 토속어 등 최소 3개 국어는 구사하더라고요. 영어도 제대로 못하던 제 자신이 무척 바보처럼 보였고 그들에게서 무엇이든 배우고 싶었어요. 3개월이 지나자 그들과 무척 가까운 친구가 됐고 함께 있으면서 제 마음을 치유 받았어요.”

▲ 피터스버그로 무전여행 가던 중 라디오방송국에서 일하던 사람과 친구가 됐다.
▲ 피터스버그로 무전여행 가던 중 라디오방송국에서 일하던 사람과 친구가 됐다.

도전하고 묻고 보고 배우다
아프리카인들의 순수함을 접하면서 오랜만에 대학생다운 도전의식이 발동했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제대로 말도 못했던 그가 한국인 선교사의 설교 통역을 맡은 것이다. 처음 통역을 했을 때는 모르는 단어만 적은 것이 연습장 두 장이나 됐지만 그것을 가지고 남아공 대학생들을 찾아가서 어떻게 표현하는지 묻고 배웠다. 땀이 비 오듯 흐를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지만 3개월째부터는 영어실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고 봉사활동을 마칠 때는 남아공 여학생들이 그에게 타고난 언어 재능이 있다고 감탄할 정도였다.
봉사센터를 총괄했던 한국인 선교사의 삶을 보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한국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데 남아공까지 와서 아프리카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면서 집 수리, 잡초 제거, 각종 행정 업무 등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온 마음으로 일하는 선교사의 삶이 아름답게 보였다. 앞으로 한국에 돌아가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남아공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암 말기로 죽음을 앞두고 계셨어요. 재혼하지 않으시고 우리 두 형제만 바라보고 살아오신 어머니에게 저는 가슴에 못을 박기만 한 아들이었어요. 그때 아무데도 안가고 어머니 곁을 지켰어요. 한국에서 불행하게 지냈던 아들이 아프리카 가서 행복을 얻고 돌아온 이야기를 해드렸을 때 어머니는 무척 좋아하셨어요. 두 달 동안 병실에서 함께하다가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다시 학교생활이 시작됐다. 그의 나이 27세, 입학한지 8년째인데 아직 1학년 1학기였다. 그렇지만 아주 잘 적응했고 전공인 경영학뿐만 아니라 부전공으로 영문학도 지원해서 대학 공부에 진지하게 임했다. 각종 동아리 활동과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해외봉사단원들끼리 준비한 ‘2007 세계문화체험 박람회’에서는 주한 브루나이 대사의 통역을 맡았는데 180도 변한 그의 모습을 보고 고등학교 친구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상사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사원으로
이후 순조롭게 다음 학년으로 진학했으며 3학년 때 벤처 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했고 현재는 (주)SMEC 기계사업부 해외영업팀에서 해외 세일즈 매니저를 맡고 있다. 그는 입사 때부터 돋보이던 사원이었다. 신입사원은 회사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기에 주어진 일만 잘 처리하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상사가 왜 이 일을 시켰고 어떻게 일해야 회사에 이득이 될 수 있는지 생각했고,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상사에게 가서 물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상사를 피하기보다는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고 집에서 있었던 일이나 속마음을 말했다.
“해외봉사를 통해 회사 업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터득했어요. 아프리카 사람들과 마음을 열고 대화했던 시간들처럼 이곳에서도 마음을 닫지 않고 서로 교류하면서 일하고 싶었어요. 선교사님에게 배웠던 것처럼 저는 단지 회사의 직원이 아니라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작은 것 하나라도 쉽게 할 수 없더라고요. 그에 비해 내가 너무 부족하니까 묻고 배우고  노력하는 거예요.”
남다른 업무 태도는 윗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관리부에서 일하던 그는 회사 매출의 70%를 담당하는 해외수출부서로 발탁되었다. 현재 영국과 터키 등 유럽 여러 나라에 공작기계를 수출하는 업무를 하며 해외 바이어들과 미팅과 전화통화, 메일을 주고받는다. 물론 이 때 사용되는 언어는 영어다. 남아공에서 1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으며 배웠던 실력이 그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회사의 모든 영어 관련 업무를 도맡아 할 정도라고.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한다. 장래에는 회사를 운영하는 CEO가 될 꿈도 가지고 있다. 불과 8년 전만해도 돈 번다고 정신없이 쫓아다니다가 눈물 흘렸던 그의 인생이 참 많이 변했다. 인생에 대해 조언해줄 멘토 하나 없이 방황했던 그는 해외봉사를 통해 새로운 마인드를 터득했고, 이제는 다른 이들의 멘토가 되었다. 그의 변화는 해외봉사 후부터였다.


글 | 전진영 기자   디자인 | 김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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