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이소울은 20대 무명가수 시절에 포장마차, 호떡장사, 어묵장사, 주방보조, 쌀국수집 주방장, 정수기 영업사원, 다단계 판매원, 대타가수… 등 안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그가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는 곡을 쓰기 위해서였다. 10년간 그는 꾸준히 일하면서 100곡 이상을 작곡했고, 그 꾸준한 노력으로 이룬 결과들이 지금 가수생활에 커다란 밑받침이 되고 있다.

 
 
기타를 손에 들어야 대화가 더 잘 풀린다는 디케이소울. 그가 기타를 잡으면 그의 인생이 나온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치열하게 돈을 벌 때도 항상 기타를 들고 연주하며 생각을 노래로 담아냈던 그에게 기타는 인생 기록 도구요, 음악은 그의 삶이 됐다. 

닥치는 대로 일하고
그는 19살 무렵부터 여름과 겨울이면 서울로 올라와 낮에는 주방보조, 밤에는 대타가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23살부터 서울에 정착하고 라이브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부터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했다. 레슨을 받고 곡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국수가게 주방보조를 할 때는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훨씬 빨라 몇 달만에 주방장급 실력까지 갖출 정도였다. 그 외에도 회계, 바텐더, 홀 관리, 공사장 막노동까지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사당역 근처에서 호떡장사를 했을 때는 사람들이 줄을 서 사먹을 정도로 호떡 맛이 좋았다고. 다단계 상품을 팔고 정수기 필터 가는 일을 하면서 저녁에는 대타가수로 네다섯 타임씩 뛰었다.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다음날 라이브카페에서 부를 노래 30곡 가사를 외우면서 완벽하지 못한 상태로 무대에 서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가하기도 했다. 그렇게 고단한 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오로지 ‘음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었죠. 음악 하나만 해도 될까 말까인데 저 혼자 다 해보겠다고 하다가 너무 돌아오지 않았나 싶어요. 하루에 라이브를 여섯 타임 연속으로 하다 보면 ‘이러다 죽는 것 아냐?’ 싶을 만큼 목이 아프고 성대 결절이 심할 때도 있었어요. 나중에는 몸이 아파 못하겠더라고요. 그럴 때면 ‘아버지 말 듣고 대학가서 용돈 받으면서 노래할 걸’ 후회도 해봤죠.”

부모님 앞에서
그가 집을 떠나 홀로 음악을 하기로 한 이유는 자신의 꿈이 아버지와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故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
를 들으면서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음악을 사랑하고 노래하고자 했던 뮤지션의 정신에 반해 그와 같은 록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노래뿐만 아니라 공부, 웅변, 축구 등 다방면에 뛰어났던 그가 공부에 열중해 검찰총장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랐다고. 아버지의 뜻대로 공부하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중학교 때 접한 개리무어, 할로윈, 감마 레이 등 고전 메탈 록 거장들의 노래는 여전히 그의 마음 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거장들의 노래를 들으면서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밑에 앉아 세상을 울려버릴 기세로 소리를 지르며 노래했다. 그리고 박완규, 김경호가 데뷔했을 때 ‘한국에서도 이런 톤의 목소리가 성공하는구나’ 하고 그의 꿈을 본격적으로 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면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라’고 유독 그에게 엄격했고 그는 보란 듯이 성공하겠다고 서울로 떠나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한때는 자신을 지원해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할 때도 있었지만 음악 활동을 하는 지금은 그런 아버지의 채근과 걱정이 있었기에 다재다능했던 그가 한눈파는 일 없이 음악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에서 혼자 고생할 때마다 아버지 뜻대로 살아볼 걸 하고 후회도 했지만 꿈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스토리를 노래에 담아
“일하는 틈틈이 쉬지 않고 곡을 썼어요. 주방에서 일할 때는 가장 먼저 출근해서 재료준비를 마치고 홀세팅까지 끝낸 후 음식물이 튄 얼룩으로 범벅이 된 옷을 입은 채로 대기실에 앉았어요. 쓰다 만 악보에 그날 느꼈던 기분들을 가미해서 다시 가사를 붙였어요. 멜로디와 화음은 기타를 치며 하나씩 완성해 나갔고 박자는 손뼉을 치면서 리듬을 맞췄어요. 그렇게 한 달 동안 한 곡에 매진해서 곡을 만들었어요.”
호떡장사를 할 때도 손님이 몰리는 황금시간대가 지나면 기타를 들고 악보 앞에 앉았다. 악상의 소재들은 호떡이 아닌, 거리 사람들의 모습과 읽었던 책들 그리고 자연의 형상들이었다. 1집의 <3분30초>는 그렇게 탄생한 위대한 곡이라고 한다.
“한 달 간 산행을 한 끝에 만든 곡이에요. 4월 봄에 산에 올라갔다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봤어요. 기타를 치면서 ‘한낮에 저 풀잎 사이로 피어나네. 빛을 받으며 사랑을 느끼는 저 풀빛 항연~’하고 가사를 붙이다가 그 빛을 받고 있는 나 자신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생각했어요. 제가 기획사에 들어오기까지 이야기를 시작했죠. 가사 중 ‘낡고 낡은 기타, 휘어버린 손가락’은 집을 나와서 끼니도 못 챙겨 먹고 뜨거운 국자를 계속해서 젓다가 보니 오른쪽으로 휘어버린 제 손가락을 말해요. 그 손으로 제 낡은 기타를 치며 오타투성이 악보를 그렸죠. 노래를 부르며 세상을 울리고 싶었던 제 심정을 그대로 가사로 옮겼죠.”

드디어 앨범을 내고
32살 되던 2011년, 그는 지난 10년 동안 번 돈으로 1집 앨범을 냈다. 내친 김에 뮤직비디오까지 찍었다. 갖은 노력 끝에 혼신을 다한, 총 9곡이 실린 앨범을 발표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앨범을 내면 조금이라도 인기를 얻을까 했지만 역시나였어요. 그때부터 6개월 동안 모든 방송사 음악프로그램 담당자들을 찾아가 ‘신인가수 디케이소울입니다!’ 하고 앨범CD를 드렸어요. 방송에서 제 노래를 틀어주지 않았지만 결과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것에 중점을 뒀어요. 책상위에 CD를 두고 올 때마다 제 마음을 담았어요. ‘누군가는 내 노래를 듣고 좋아하거나 혹평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빨리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서울 홍대와 인천 등지로 라이브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처음에 ‘누구지? 유명해?’ 하는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노래에 담긴 자신의 스토리를 진중하게 말하고 열정으로 노래하는 무대에 점차 감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스토리텔링 공연은 곧 소문이 나서 다른 곳에서도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

연습무대 같았던 공중파 방송
그리고 작년 가을, KBS에서 실패한 가수들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는 <내 생애 마지막 오디션(이하 내마오)>에서 연락이 왔다. 그때는 이미 다른 가수 오디션 프로그램들로부터 섭외요청이 온 상태였다.
“예선에서 스타가수들이 심사위원으로 나와서 제 노래를 좋아해주셨어요. 그런데 그분들도 스타가 되기까지 저와 같은 어려운 굴레를 지나왔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마오>가 저한테 어울리겠다고 느꼈죠. 그리고 방송출연하면서 긴장하지 않고 오히려 무대를 편안하게 즐겼어요. 여러 후배와 선배님들을 만나면서 같이 공연하고 경연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아직 연습생 같은 제 모습도 많이 봤어요. 제가 가진 열정을 제대로 표출하지도 못 하고 방송 룰도 잘 몰라서 미숙한 점도 많더라고요. 그때 좀 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내마오>는 제 가수 인생에 충분한 연습무대가 됐어요.”
<내마오>에서 그는 시간이 갈수록 안정되고 파워 있는 가창력으로 승부했고 자연스러운 감성으로 부르는 그의 노래는 호평을 받았다. 비록 그의 도전은 12회에서 멈췄지만 방송 이후 그의 노래를 찾는 팬들이 늘어났다. 2013년에는 싱글앨범을 발표했고 홍대에서 인기리에 단독콘서트를 개최하면서 <내마오> 참가자들 중 가장 활발한 공연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난다
1집 앨범의 안타까운 실적에 대해 ‘그 결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지 않느냐’고 소탈하게 말하는 디케이소울. 실제로 그는 지난 2월말에 있었던 러시아 하얀 달 국제가요제에서 1집 앨범의
<천사>라는 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트위터 대통령 이외수는 “디케이소울, 이제 우리가 그를 잘 알 때가 왔습니다! … 그는 진짜입니다. 러시아 국제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가수입니다!”라는 글로 그를 극찬했다. 때문에 이전보다 더 바쁘게 공연을 다니지만 스포트라이트 받는 무대뿐만 아니라 불우이웃을 돕는 후원음악회와 자선공연에도 함께하며 비폭력평화운동 ‘블루셔츠캠페인’의 주제곡도 작사작곡했다. 백석예술대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부모님이 내주시는 등록금으로 학교 다니면서도 해오라는 연습은 절대 안 해 오는 것을 봐요. 그래서 학생들을 자주 혼내느라 본의 아니게 못된 선생님만 되고 있어요. 하지만 저한테라도 혼나서 제대로 음악을 한다면 저보다도 좋은 뮤지션이 될 수 있겠죠. 대학생 때는 꿈을 향해 열렬히 자신을 던져봐야 합니다. 비록 저의 20대는 비록 무명가수로 앞날이 보이지 않을 때였지만 오로지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썼던 곡들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지요. 대학시절에 술 마시면서 열정적인 밤을 보내기 보다는 자신의 꿈과 미래를 위해 마음껏 고민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네요.”
인터뷰 내내 유쾌하게 웃고 답하던 그는 그동안 10집까지 낼 수 있을 만큼의 곡을 만들어 두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록 가수의 열정에 매료되어 음악을 시작했고 10년 무명생활로 많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인생을 노래하는 감성 보컬로 성장했던 그만의 이야기가 앞으로 100곡 이상의 노래로 펼쳐진다는 얘기다. 그의 다음 이야기가 어떤 노래로 나올지 더욱 궁금해진다.
 

그의 본명은 김동규.
항상 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새로운 곡에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려고 노력한다. 태권도 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갈 만큼 남다른 운동 실력과 주방장 수준의 요리 실력을 가졌지만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음악이다. 현재 상명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석사과정 공부 중이며 백제예술대학교에서 20대 시절의 자신처럼 음악에 들뜬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글 | 전진영 기자   인물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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