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만의 공간에 갇혀 외롭게 살았던 나였는데...

[사람들]/김은혜

▲ 김은혜 학생/1990년 출생. 2011년 굿뉴스코 10기 단원으로 1년간 미국 LA에서 활동. 현재 창원대 회계학과 3학년에 재학중.
▲ 김은혜 학생/1990년 출생. 2011년 굿뉴스코 10기 단원으로 1년간 미국 LA에서 활동. 현재 창원대 회계학과 3학년에 재학중.

“엄마”
원망의 대상이었지만
너무 그리웠던 말이었어요

 
2011년 한 해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현지인들과 마음을 나누며 활동하다 귀국한 10기 굿뉴스코(Good News Corps) 단원들의 귀국발표회 ‘2012 굿뉴스코 페스티벌’ 전국 순회공연이 2월과 3월에 걸쳐 있었다. 귀국발표회의 순서마다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는데, 특별히 엄마가 네 번이나 바뀐 김은혜 양의 변화를 담은 연극 <트루 스토리>는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봄기운이 겨울을 밀어내고 있던 3월 중순의 어느 날, 봄볕처럼 따스한 마음을 가진 김은혜 양을 직접 만나 그 마음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어보었다. 하기 쉽지 않은 어두운 옛 이야기들, 그리고 그 후 찾은 소중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은혜 양은 속이 다 보이는 빙어처럼 투명하게 풀어놓았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은혜 양은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이혼을 경험했지요?

저는 1990년 부산에서 태어나 여섯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어요. 아빠가 스물 넷, 엄마가 스무 살에 저를 가졌어요. 어렸을 때 저는 행복했는데, 부모님은 안 그랬나 봐요. 김해로 이사 간 후 제가 여덟 살 때 IMF사태가 터지면서 아빠 회사가 부도나 엄마가 신발공장에 나가 일했어요. 이후 어려운 일들이 이어졌고, 결국 부모님은 이혼하셨어요. 그때부터 저하고 다섯 살 밑의 남동생은 할머니하고 살았어요.

그 후로도 어려움이 계속되었지요?

제가 초등학교 4, 5학년 무렵에 아빠가 어떤 분과 사귀셨어요. 마음을 열지 못하는 저에게 그분이 먼저 다가와 주고 무척 잘해 주셨어요. 엄마가 많이 그리웠으니까 그분을 엄마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아빠가 가진 게 별로 없어서 결국 두 분은 결혼하지 못했어요. 그때 저는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두 번째 엄마를 잃은 거지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빠가 재혼하셨는데, 아빠가 새로 시작한 사업이 잘 되고 있을 때 결혼했다가 회사가 어려워지자 이혼했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아빠가 선을 봐서 다시 결혼했어요. 하지만 그분도 마음에 여유가 없고 우리도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서로 많이 갈등하다가,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다시 이혼했어요. 그분과 살면서 사춘기를 지나던 저도 무척 고통스럽고 아빠와도 소통이 안 되어서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어요.

▲ 생각하기기 싫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바쁘게 살았다.
▲ 생각하기기 싫어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바쁘게 살았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빠가 새로 사귄 여성 분을 데리고 오셨어요. 지금의 엄마지요. 그때는 정말 싫었어요. ‘아빠는 아빠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자!’ 하고 생각했지요. 아빠의 여자 친구로는 받아들이겠지만 내 엄마로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서로 얼굴 붉히지 않을 만큼 선을 지키면서 적당히 살았어요.

무척 힘든 일들이 이어졌는데, 그 속에서 은혜 양은 어떻게 살았어요?

아빠는 나를 버릴지 모르지만 할머니만큼은 나를 사랑하실 거라고 생각할 만큼 할머니가 저를 무척 사랑해 주셨어요. 하지만 엄마가 없는 자리를 할머니의 사랑이 다 채워 주지는 못했어요. 자꾸 소심해지고, 친구들 앞에 설 때면 마음이 위축되었어요. 나이가 들면서는 일부러 센 척하면서 살았어요. 친구들에게 부모님이 이혼하셨다는 말을 쉽게 했지만 내가 받는 고통은 절대로 말하지 않았어요. 약한 소리 하는 것도 싫었고요. 그러면서도 친구들 눈치를 많이 봤어요. 다투고 갈라서고 하는 것이 싫으니까 친구들에게 싫은 말 않고 늘 제가 참고 살았어요.

저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것이었어요. 아빠가 재혼과 이혼을 반복하면서 ‘언젠가는 나도 아빠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아무도 믿지 못했지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지금 엄마가 들어온 후로는 주로 학교에서 지냈어요. 대학에 들어간 후로는 집이 싫어서 밖으로 돌았고요. 친구 만나고, 술 마시고…. 나중에는 기숙사에서 살면서 집에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어요.

그런 가운데에서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나요?

꿈도 없었어요. 하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현실에서 항상 벽에 부딪히니까 쉽게 포기했어요. 나중에는 아예 꿈을 꾸지 않았어요. 남은 꿈이라고는 돈을 많이 벌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것 정도.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바라는 삶이 있었어요. 안정된 직장과 안정된 가정. 아빠가 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삶에 굴곡이 많았어요. 잘살 때는 아주 잘살았지만 못살 때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안정적인 수입을 원했고, 진짜 착한 남편 만나서 내 자식들은 나처럼 어려움 겪지 않게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게 제 꿈이었어요.

은혜 양의 당시 마음을 그려본다면 모습이 어떠했어요?

저는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울지 않았어요. 세상을 아주 왜곡되게 보았거든요. 누군가가 봉사했다고 하면 ‘자기 좋으려고 한 거지 진짜 그렇게 하고 싶었겠어?’ 하고 생각했어요. 남자 친구랑도 계속 싸웠어요. 나에게 잘해줘도 ‘언젠간 헤어질 얘인데 마음 줘서 뭐해?’ 하고 생각했지요. 어떤 것을 보든 ‘저기에 무슨 속셈이 있을 거다’고 여겼어요. 새엄마도 눈에 조금만 거슬리는 모습이 보이면 ‘저래서 안 돼’ 하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살면 무척 외로웠을 텐데?

엄청 외로웠어요.

어떻게 달랬어요?

항상 시끄러운 곳에 있어야 했고, 늘 사람들과 어울려야 했어요. 혼자 지내는 경우가 없었어요. 밤늦게까지 친구들과 같이 있었어요. 노래방 가고, 음식 먹으러 가고, 영화관 가고, 술 먹고…. 그리고 일부러 새벽 3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새벽 3시에 일 끝나면 술 한 잔 하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학교에 가서 친구들하고 어울리고. 그런 삶을 계속했어요.

생각할 틈을 아예 없애버렸군요.

예. 생각하면 외로우니까. 어떻게든 약속을 만들어서 밖에 나갔어요. 하지만 집에 오면 외로웠어요.

그럴 때는 어떤 생각을 했어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잤어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떻게든 외로움 속에 빠지지 않으려고 했어요.

친구들과 같이 지내지만 친구들도 함께 가줄 수 없는 영역이 있잖아요?

친구들과 친했지만 진짜 속마음은 이야기 못 했어요. 너무 외롭다거나 죽고 싶다는 말은 차마 못 하는 거지요. 그럴 때면 ‘친구들과의 관계는 여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렇게 살면 미래가 없는데, 장래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했어요?

장래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오늘 하루?

예. 당장 외로우니까 그냥 오늘 하루 재미있게 놀면 된다는 식이었어요.

실제로 죽고 싶은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정말 죽을 마음을 가진 것은 한 번이고요. 그 후로는 자해를 많이 했어요. ‘리스트컷(Wrist Cut) 증후군’이라고,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극심하거나 극도로 불안한 상태가 되면 터질 것 같은데 풀 데가 없으니까 스스로 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안정을 찾을 수 있으니까요.

이후 문득 굿뉴스코 단원으로 지원해 미국으로 가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대학교 2학년 때 기숙사에 있다가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이제는 진짜 나 혼자서 살아가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가족을 비롯해 모든 것을 마음에서 버렸어요. 그런데 새엄마가 그 어려움을 극복하시는 거예요. 아빠가 그 전에 구원을 받고, 새엄마도 결혼한 후 구원을 받으신 상태였어요.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아빠가 간곡히 원하기도 하셔서 굿뉴스코에 지원했어요.

▲ 굿뉴스코 10기 단원으로 미국 LA로 파견되어 워크숍을 할 때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다녀왔다.
▲ 굿뉴스코 10기 단원으로 미국 LA로 파견되어 워크숍을 할 때 유니버설 스튜디오를 다녀왔다.

아빠가 쓰러지신 후 엄마가 어려움을 극복하셨다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좀 더 자세하게 해주세요.

이전에 계시던 분들은 어려우면 다 떠났거든요.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졌을 때, 이제는 엄마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아빠에게 미련 가질 게 하나도 없고요. 그런데 얻을 게 하나도 없는데도 남아서 계속 아빠를 간병해 주시고, 우리를 챙겨주시는 거예요. ‘이분은 많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어요. 그러면서도 ‘어쩌면 가식일지 몰라. 저러다가 언젠가는 떠나가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교회 분이 “엄마가 하나님의 마음으로 남아 있는 거야.” 하고 말해 주셨어요. 그때 처음으로 ‘아, 하나님의 마음으로 남아 있는 거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 마음에 이끌려서 미국으로 갔군요. 미국에서 은혜 양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어요?

저는 복음은 알고 있었지만 믿지 못했어요. 구원받았다고 말은 했지만 속에서는 ‘지옥에 가는 거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이 늘 따라다녔어요. 6월 말경에 LA 교회의 김상열 목사님께서 “너는 속이 텅텅 비었어.” 하며 저를 간섭하셨어요. 그동안 숨어서 조용하게 잘 지냈는데, 저를 드러내셨어요. 당시에 저는 저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어요. 항상 피해자였지 가해자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목사님이 제 속이 텅텅 비었다고 하시니까 반발하는 마음이 올라왔어요.

그 후로 많은 분들과 신앙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하루는 한 사모님이 성경 말씀 안에서 죄인이 되는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셨어요. 저는 제 기준에서 나쁜 짓을 한 것이 죄라고 여겼지 한 번도 말씀 안에서 죄인이 된 적은 없었어요. 사모님 이야기를 들었지만 마음에서는 이해가 안 되었어요. 그 후 대학에 전도하러 갔다가 솔트레이크시티에 계시는 남지현 전도사님께 그 부분을 물었어요. 전도사님이 로마서 7장을 펴서 ‘내가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다른 부분을 이야기해 주셨어요. 내가 아무리 선하고 좋게 여겨도 내 근본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다 악한 것이라고요. 그 말씀 안에서 처음으로 저의 참 모습을 보았어요. 죄인이 된 거지요. 그리고 로마서 5장 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의인이 되었어요. 구원받고 나서, 전에는 저를 간섭하는 것이 그렇게 싫었는데 그것이 내 영혼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었음을 알았어요.

▲ 미국 서부 댄버로 떠났던 무전전도여행.
▲ 미국 서부 댄버로 떠났던 무전전도여행.

구원받고는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살았나요?

전에도 내 마음을 이야기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어요. 항상 제가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선에서 이야기했으니까요. 구원받은 후로는,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는 어색해서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누굴 만나면 마음을 열고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전에는 마음을 열면 내가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서 피했는데, 제가 원래 악하니까 나쁜 모습이 드러나는 게 부담스럽지 않은 거예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부담감, 거부감, 그런 것이 많이 사라졌어요. 내가 부족할 때 은혜를 입으니까 오히려 부족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정말 부족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예. 은혜가 더 좋으니까요.

은혜 양의 이름대로 ‘은혜’의 세계로 갔군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었어요?

마음을 여니까 너무 편하더라고요. 전에는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늘 나를 꾸미면서 살았는데, 구원받고는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니까 진짜 편한 거예요. 내가 못난 사람이어도 괜찮았어요. 그리고 세상에서는 내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날 동정하거나 싫어했는데, 구원받은 사람들은 안 그러더라고요. 마음으로 대해 주었어요. 그래서 더욱 좋았어요.

<트루 스토리>를 보면 구원받은 후 엄마하고 전화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이야기 좀 해주세요.

9월경에 비행기 티켓 연장 문제로 여행사에 돈을 조금 보내야 했어요. 그래서 한국에 전화를 하니까 엄마가 받았어요. 전에는 “있잖아요” 하거나 “저기요”라고 불렀는데, 그날은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그래서 “엄마.” 하고 부르니까 엄마가 저인지 모르는 거예요 “누구세요?” 하고 묻기에 속으로 망설였어요. ‘괜히 말했네…’ 전에 아빠도 엄마도 ‘엄마’라고 부르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제가 안 받아들여서 포기하셨거든요. ‘진작 해야 하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엄마는 이제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밀려들어왔어요. 그렇지만 ‘어차피 한번 부른 것 계속 해보자’ 하고 다시 “엄마.” 하고 불렀어요. 엄마가 정말 좋아하셨어요. 울먹이시면서요. 엄마가 너무 좋아해서 제가 할 말을 잃었어요. 속으로 ‘아, 이런 관계도 괜찮구나! 엄마에게 마음을 여는 것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으니까 빨리 한국에 오면 좋겠다.” 하셨어요. 보고 싶다며 남은 일정 놔두고 바로 한국으로 오면 좋겠다고도 하시고요.

엄마라고 처음 불렀을 때 엄마가 굉장히 기뻐하셨는데, 그때 느낌을 더 자세히 말해 주세요.

처음에는 너무 좋아하셔서 제가 당황했어요. ‘이게 이렇게 좋아할 만한 일인가?’ 제 기준에서는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너무 좋아하시니까 ‘진작 이렇게 할 걸 내가 왜 마음을 닫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제 마음에서는 ‘엄마’라는 호칭에 대해서 어려움이 많았어요. 엄마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다 떠나갔으니까요. 누군가를 ‘엄마’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정말 겁이 났어요. 그래서 엄마가 전화를 받았을 때에도 짧은 순간이었지만 처음에는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망설였어요. 마음을 열었을 때의 혹독한 대가, 그 두려움…. 그게 무서웠으니까요. 하나님이 책임지시겠다는 마음으로 망설임 끝에 그냥 입을 열었는데, 그 호칭이 진짜 좋더라고요! “엄마.” 해보니까 입에 착착 붙는 거예요!(우리는 함께 웃었다)

입에 착착 붙는다는 표현이 참 재미있는데, ‘엄마’라는 말이 주는 느낌을 더 자세히 표현한다면?

엄마, 참 그리운 말이었어요. 부르고 싶었지만 부를 사람이 없어서 못 부른 거잖아요. 한편으로는 원망의 대상이었지만 너무 너무 그립던 말이었어요.

그냥 엄마라고 말했는데, 진짜 엄마를 만난 거네요?

네.

화제를 조금 돌려서, 구원받은 후로는 마음으로 전도할 수 있었을 텐데 전도하면서 마음에 남은 일이 있나요?

월드캠프를 앞두고 어느 대학(Longbeach Comunity College)에 홍보하러 갔을 때 한 미국인 남학생이 캠퍼스에 외롭게 앉아 있었어요. 그때 저희는 한 사람 당 다섯 명을 캠프에 초청하기로 작정했기에, 사람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웃음) 그래서 어떻게든 초청해 보려고 이야기를 걸었지요. 그런데 그 학생은 이미 강의들이 시작되어서 캠프에 올 수 없었어요. 교회에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냥 그 학생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무표정한 얼굴로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다음날 같은 장소에 갔는데 그 학생이 또 있는 거예요. 또 말을 걸었어요. 한참 야기하는데, 그 학생이 당황하면서 나 같은 사람은 처음 봤다는 거예요. 제가 살아온 삶 이야기를 조금 꺼내서 말했거든요. 미국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이야기 안 한다면서 자기 이야기를 좀 했어요. 자기는 자기 공간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 너무 싫대요. 저도 부담스럽다고 해서 ‘이메일 쓸 테니 답장해 달라’ 하고 헤어졌어요.

다음 날 가니까 또 있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를 걸었는데, 어떻게 시작했는지도 모르게 복음을 전했어요. 그 학생이 복음을 듣고 무척 놀라워했어요. 자기는 선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 줄 알았다면서 복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어요. 그 친구는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사는 리바이(Levi)라는 백인 학생인데, 구원받고 나서 자기 이야기를 했어요. 부모님이 이혼해서 배다른 형과 동생이 있고, 어려서부터 자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살았고, 항상 혼자 시간을 보내고 책을 읽거나 공부하면서 살았다고요.

그 친구를 보면서 이전의 제가 보였어요. ‘내가 저 아이처럼 살았겠구나!’ 외롭지만 내 공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예요. 누군가는 들어와 주기를 바라지만 그게 무서우니까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외롭게 살았던 제 모습을 그 친구를 통해서 보았어요. 그 친구는 제가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는 것을 아주 신기해했고, 복음을 듣고 정말 기뻐했어요. 저도 정말 기뻤고요.

구원받고 나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저를 믿고 산 부분에 대해서 많이 배웠어요. 저는 그런 줄도 몰랐는데, 내게 있는 것 중에 내가 보기에 괜찮은 것을 의지하고 산 거예요. 그런 것들이 악하고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무능한 것도 많이 느꼈어요. 특별히 달라스에서 영어캠프를 준비하면서 많이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일했지만 계속 힘이 드니까 원망이 쏟아져 나왔어요. 제가 다른 사람보다 일을 많이 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같은 실수를 자꾸 반복하고 맡은 일이 진행이 안 되어서 그냥 도망가고 싶었어요. 늘 ‘나는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 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거예요. 마음에서 정말 포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이뤄 주시는 것을 보았어요. 그 후로도 내가 하려고 할 때는 어렵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면 쉽게 해결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어요.

▲ 이제는 마음으로 한 가족이 된 엄마와 아빠.
▲ 이제는 마음으로 한 가족이 된 엄마와 아빠.

자, 1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귀국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납니다. 어떤 일이 펼쳐졌습니까?

우리 집이 김해인데, 김해공항으로 가지 않고 인천공항으로 왔어요. 밤 10시에 도착해서 집에 가니까 새벽 4시였어요. 너무 늦어서 부모님과 조금 이야기하다가 바로 잤어요. 그렇게 조용하게 일상으로 돌아왔어요. 와서 보니까 우리 집에 너무 가난한 거예요. 아빠가 사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아직은 어려움이 많아요. 저는 돈 없는 것 진짜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문제가 안 되는 거예요. 집에 먹을 것이 없어도, 돈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와도 저는 집이 너무 좋은 거예요. 전에는 밖으로 나돌았는데, 지금은 집에 있으면서 동생 얼굴 보고 싶고, 아빠랑 이야기하고 싶고….

아빠는 식물인간이나 다름없었는데, 기적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셨어요.
귀국해서 뵈었을 때에는 아빠가 아팠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하셨어요.

그리고 아빠가 귀국발표회를 보러 오셔서 제 삶 이야기를 다룬 <트루 스토리>를 보면서 깨달으신 것이 있대요. 아빠는 나름대로 아빠 마음을 우리에게 표현한다고 생각하셨지, 우리가 전혀 못 받아들인 것을 모르셨대요. 그래서 표현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마음에 느끼셨어요. 원래 구구절절 이야기 안 하시는데, 요즘은 우리를 앉혀 놓고 아빠 마음을 자세히 말씀하셔요.

아빠도 회개하셨네요?

예.(웃음)

엄마하고는 어떻게 지내요?

엄마요? 엄마지만 친구예요. 전에는 친구들이 엄마랑 수다 떨고 엄마에게 짜증내고 하는 게 정말 부러웠어요. 지금 제가 그렇게 살고 있어요. 강의 마치고 집에 가면 엄마에게 ‘이런 거 있었다, 저런 거 있었다’ 하고 구구절절 이야기해요. 그렇게 말하고 있는 저를 보면서도 되게 신기해요.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엄마도 무척 좋으시겠네요?

그럴- 거예요.(웃음)

엄마가 은혜 양에게 전에는 어떤 존재였고, 지금은 어떤 분이에요?

처음에는 아빠의 여자 친구. 다음에는 우리 집 청소해 주고 밥해 주고 아빠와 함께 사는 여자. 다음에는 쓰러진 아빠를 간병하는 착한 사람, 아니면 위선자. 그 다음에는 돈도 못 버는 아빠와 함께해 주고 말썽 많은 동생도 감싸 주는 미안하고 고마운 대상. 그리고 지금은 그런 감정을 느낄 필요도 없는 내 엄마예요.

와서 학교 친구들은 만났나요? 친구들이 술 먹자고 안 해요?

술 먹자는 친구도 있고, 술 사주겠다는 친구도 있지만 술 먹는 것보다 같이 앉아서 굿뉴스코 단원으로 미국에 갔다 온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굳이 술을 안 마셔도 즐거우니까 술을 마셔야 할 이유가 없어졌어요. 친구들 앞에서 제 입에서 하나님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도 정말 신기하고요. 그리고 교회 친구들과 마음을 이야기하기 좋으니까 교회 친구들을 더 찾게 되고요.

이전 친구들은 은혜 양을 보고 뭐라고 해요?

전에 저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버는 족족 술 마시는 데 다 썼어요. 진짜 그날 하루를 위해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앞날을 생각하고 준비해요. 그러니까 친구들에 저에게 시야가 넓어졌다고 해요 친구들이 많이 놀라기도 하고, 1년 동안 외국에 나갔다 오고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에 대해 부럽다고도 하고요.

건강을 잃은 적이 있는 사람이 건강의 소중함을 잘 안다고 해요. 은혜 양은 가족을 잃었다가 찾았는데, 가족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가족은 내 마음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에요. 전에는 제 마음에 쉼이 없었어요 그래서 항상 달리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쫓기고 외롭고 너무 힘든데 쉴 곳이 없었어요. 지금은 정말 평안해요. 형편은 별로 좋지 않고 몸은 더 힘들어졌는데도 마음은 어렵지가 않아요.

가족은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네요. 쉴 수 없어서 계속해서 달렸다는 말도, 아린 느낌과 함께 마음에 남고요. 가족이 있지만 지금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데, 은혜 양은 이제 참 가족을 가졌네요.

(은혜 양은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보였다.)

가족이 함께 살고 있지만 마음에서 만나지 못한 채 사는 사람도 많은데, 어디로 가야 서로 만날 수 있어요?

음-, 벌거벗은 상태로 가야 해요. 그러니까 내가 좋은 사람이 될 필요도 없고, 내가 가족에게 뭔가 받아야 할 사람이 될 필요도 없고요. 그냥 내 모습 그대로만 들고 나가야 서로 만나고 마음이 흐른다고 생각해요.

은혜 양이 볼 때 이전과 비교해서 자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어요?

남이 들으면 우습겠지만, 이제는 공부하려고 책을 폈어요. 돈을 벌려고 아등바등하지도 않고요. 남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술을 마시지 않아요. 전에는 일주일에 여섯 번 술을 마셨거든요(이 대목에서 은혜 양은 겸연쩍게 웃었다). 그리고 저는 한 자리에 오래 못 앉아 있었어요. 카페에 가도 30분 만에 나왔어요. 그런데 이제는 1시간 반 정도의 강의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집중력이 생겼어요.(웃음) 또 제 미래를 생각해요.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지만 볼 수 있는 눈이 생겼고요.

가지고 있는 보물이 많네요. 부자네요.

(은혜 양은 다시 밝게 웃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아프리카에 학교가 많이 필요하고 또한 교사도 많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직은 아프리카에 가는 것이 두렵지만,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시면 언젠간 그곳에 교사로 가고 싶어요.

지나간 날들은 어둡고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은혜 양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아직도 고통스럽고 슬픈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요?

진부할 수도 있지만, 그때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거예요. 엄마가 여러 번 바뀌면서 가족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고, 마음을 꽉 닫고 고통스럽게 살아 보았기에 마음을 열 때 진짜 행복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제 생각에, 고통은 행복을 느끼라고 하나님이 주신 과정 같아요. 하나님은 어두운 삶을 사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늘 기다리시잖아요. 엄마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오랫동안 저를 기다려 주셨고요. 그 기다림이 있기에, 그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결국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고요.

인터뷰를 하면서, 마음에 있는 것들을 여과 없이 그대로 표현하는 은혜 양이 참 행복하다고 여겨졌다. 자신을 가리거나 꾸미지 않고 마음을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어두움 속에서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갑갑한 숨을 내쉬며 살았던 은혜 양이 만난 복음(福音), 복음은 은혜 양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예수님 안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갖게 된 은혜 양이 꿈을 이루어 행복하게 사는 미래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은혜 양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예수님의 마음에 물든 사람과 동행한 여운이 마음에 길게 남았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지나온 시간들과 은혜 양이 툭툭 던진 가슴 깊이 파고들었던 말들이 자꾸 떠올랐다.

(자료제공 : 월간 기쁜소식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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