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없으면 돼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이 곤란에 처할 때 시청자는 제3자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그저 안타까울 때가 많다.
하지만 그 상황이 막상 나의 일이 된다면 나는 주인공보다 더욱 곤란에 처할 것이다. 현실 속에서 나는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 문제의 실마리는 상대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풀린다. 약국에서도 판매하지 않는 마음 치료약 <투머로우>에 자신의 잘못을 용기 있게 말해 준 아주머니와 남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글 | 박소영   담당 | 김양미 기자   디자인 | 이가희 기자

 
 

농약을 먹고 실려 온 환자
어느 날, 50세의 아저씨가 농약을 먹고 응급실에 실려 왔다.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계신 분인데, 시골 병원에서는 치료가 힘들다며 무조건 서울로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몇 년 전에 심장과 신장 이식을 하신 분이셨다. 병원에서 가장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진료하는 분들이 바로 장기 이식 환자들이다. 이분들은 타인의 장기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매일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하고, 감기만 걸려도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아저씨는 드물게도 심장까지 이식을 하셨단다. 신장은 양쪽에 있어서 기증을 해도 기증자가 살 수 있지만, 심장은 차원이 다르다. 수술도 어려울 뿐 아니라 비용도 비싸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생명을 포기해야 이식이 가능하기에 기증자도 드물어 흔하지 않은 이식이다. 이런 어려운 수술임에도 불구하고 아저씨가 심장 이식을 하신 것을 보면 정말 살고 싶으셨을 텐데 왜 농약을 마시셨는지, 무슨 힘든 일이 있으셔서 그러셨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나는 아저씨와의 첫 대면을 했다. 

아저씨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고 언제라도 병원에서 뛰쳐나갈 기세로 입을 꼭 다물고 계셨다. 다행히 농약이 그리 독하지는 않아서 큰 해를 입은 상태는 아니었다.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때까지 다행히도 아저씨의 심장과 신장은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정신과 의사가 와서 상담을 하려하자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의사에게 왜 이야기해야 하느냐며 돌아가라고 했다. 돌아가라는 말 외에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방어태세였기에 상담은 실패했다.
 

내가 죽일 여자예요

그 날 저녁 보호자분들이 면회를 왔다. 환자들을 순차적으로 회진하며 아저씨의 보호자분들에게 상태를 설명드리던 중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을 느꼈다. 아저씨는 고개를 돌리고 계셨고, 부인, 아들, 누님 이렇게 세 분의 보호자가 환자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냉랭한 분위기였다. 환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도 시큰둥했다. 질문도 설명도 의미가 없어 보이는 분위기를 피하고자 나는 면회를 마칠 때쯤 가족들을 따로 상담실로 불렀다. 그렇게 넷이 앉아서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보호자분께 나를 의사가 아닌 아저씨의 회복을 도와줄 조력자로 생각하고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심장 이식도 하며 어렵게 치료해 오셨는데 왜 생명을 먼저 버리려고 하시는지 여쭈었다. 아주머니는 한참을 망설이시더니 어렵게 입을 여셨다. “내가 죽일 여자예요. 내가 다 잘못한 거예요.” 말씀을 마치시더니 어느새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본래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셨는데 아저씨가 5년 전부터 몸이 안 좋아지셔서 4년 전 이식 수술을 하셨다. 심장 이식은 사형수나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기증할 사람이 없어 매우 드문 수술이기 때문에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무리해서 시행했다. 이후로 가세는 더욱 기울 수밖에 없었고 몸이 아픈 아저씨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어려워졌다 한다. 할 수 없이 아주머니가 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작은 회사에 다녔는데,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뭔가 씌여 있다가 정신이 번쩍 들며 남편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두 부부는 금실이 좋았다는데, 어려워진 생활과 힘들어하는 남편을 보며 아주머니도 힘들고 외로웠나 보다.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한 아주머니의 용기

어느 여론조사에 따르면 기혼 남녀의 20~30% 가량이 외도 경험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 대개 먼저 사실을 고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은 정말 순진한 시골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면 남편이 다 용서해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먼저 고백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아저씨는 화가 났지만 여태껏 자신을 돌봐준 사랑하고 미안한 아내이기에 계속 마음을 추슬러도 봤다가 화도 내봤다가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되고 한편으로는 본인이 남편 노릇을 못하니까 부인이 그랬겠구나 싶어 자책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부부 사이는 점점 안 좋아졌고, 아저씨는 본인만 사라지면 가족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아주머니는 그날 계속 우셨다. 내가 남편에게 죄를 지었는데 병원에 왔더니 남편을 정신과 폐쇄 병동에 보내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는 또 더 큰 죄를 짓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미안함과 후회와 두려움이 섞인 흐느낌이었다. 한참을 듣다가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내가 드라마 시청자 같았다.
그 자리에는 고등학교 1학년인 외아들과 아주머니의 시누이가 같이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와 자신의 가정환경이 싫었을 것이고, 시누이 입장에서는 남동생이 너무 불쌍하고 아주머니가 참 미웠을 것 같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들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나지막이 한 마디를 뱉었다. “어쩌다 우리 집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시누이 분께도 심정을 여쭈니 충격적이고 마음이 복잡하다시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어려운 자리에서 솔직히 이야기해 준 아주머니가 고마웠다. ‘이 분이 참 순수한 분이구나’ 싶었다.

한 통화의 전화도 자살 시도자에게는 큰 힘이 된다

어두움은 빛이 없을 때는 어두움에 머무르지만, 그 자리에 빛이 비춰지면 저절로 사라지는 법이다. 이제는 이 가정에도 빛이 비춰지도록 작은 부분일지라도 최대한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가족이 다 같이 마음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마인드 강연이 실렸던 <투머로우> 잡지를 선물하고, 시골로 돌아가시면 정기적으로 댁을 방문하시고 가깝게 지내실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계신 상담사도 소개시켜드렸다.
실제 자살 시도를 했던 환자들에게 주기적으로 간단한 응원의 문자나 연락만을 보냈는데도 다시 자살을 시도하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아주머니가 어느 날 정신을 차렸을 때 저 멀리 이상한 길로 가 있는 자신을 발견했듯이, 부정적인 생각 하나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커져 결국 많은 사람들을 자살로 이끌어 간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은 짐이 되기 싫었던 한 아저씨의 반쪽 사랑은 상대에 대한 미움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미움과 자책감 때문에 비극으로 끝날 뻔했다.  가족들의 노력으로 퇴원 후 상담을 받으시며 지금은 농사일도 조금씩 시작하시고 아들과 음악회도 가실 정도로 많이 밝아지셨다.

아저씨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아저씨가 아직까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다.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본인의 결정만을 따라 행동하게 된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분이 조금씩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주머니의 용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큰 실수를 했지만 부끄러움을 이기고 자신의 실수를 드러냈을 때 혼자서 절대 감당할 수 없었던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은 흐른다는 사실이 참 좋다. 나는 이 분들의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현재 진행 중인 희망이 보이는 스토리라서 자주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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