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채나라로 가던 중 양식이 떨어져 채소만 먹으며 일주일을 버텼다. 걷기에도 지친 그들은 어느 마을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공자가 깜빡 잠이 든 사이에 제자인 안회는 조용히 나가 쌀을 구해와서 밥을 지었다. 밥이 다 될 무렵 공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코끝에 스치는 밥 냄새에 공자가 밖을 내다봤는데, 마침 안회가 한 손엔 솥뚜껑을 들고 다른 손엔 밥을 한 움큼 집어 입에 넣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회는 평상시에는 내가 먼저 먹지 않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는데 이것이 웬일일까? 지금까지 안회의 행동이나 모습이 거짓이었을까?’

잠시 후 안회가 밥상을 들고 들어왔다. 공자는 안회의 잘못을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하는구나.”
제사음식엔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안회도 알기 때문에 공자가 이렇게 말하면 그가 먼저 밥 먹은 일을 뉘우칠 것 같았다.
그런데 안회의 대답은 예상을 빗나갔다.
“스승님,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제가 솥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흙덩이가 쏟아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너무 아까워서 제가 그 부분을 먹었습니다.”
공자는 잠시 안회를 의심했던 것을 후회하며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전의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되더구나.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되더구나. 너희들은 알거라.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공자의 후회’로 알려진 일화는 우리 두 눈으로 보는 것만이 항상 진실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보이는 현상 너머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문득 헬렌 켈러가 떠오른다. 생후 19개월 만에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었지만 장애를 딛고 일어나 인간 승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녀는 탁월한 문필가이기도 했다. 그녀의 에세이 ‘내가 만일 사흘 동안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면’을 보면 시각을 가진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알 수 있다.

‘마침 숲속을 산책하고 온 친구에게 나는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별거 없어.” 눈이 멀쩡한 사람들이 실제로는 보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지나치는 것들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지. … 시각이란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은,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 사람처럼 눈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각이 있다고 제대로 보는 것도 아니다. 법원 증인들의 목격담을 보면 동일한 사건일지라도 목격자의 수만큼이나 증언이 각기 다르다고 한다. 하지만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헬렌 컬러는 손끝의 촉감으로 조각을 감상하고 마룻바닥을 울리는 진동으로 음악을 들었다. 어둠 속에 있어봐야 볼 수 있음에 고마움을 느끼고, 정적 속에 갇혀봐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축복임을 알게 되는 법이다. 보지 못하는 그녀는 자신의 시력을 기대할 수 없었기에 마음으로 헤아려 친구를 사귀고, 마음속 대화를 통해 자연과 가까워졌다. 그것은 닫힌 눈 대신에 열린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며칠 전 전화를 걸어와서 “나는 그 사람이 실망스러워서 마음을 접기 시작했어. 이젠 마음을 완전히 닫았지”라던 친구의 말이 계속 뇌리를 맴돈다. 마음을 닫고 여는 것은 스스로의 자유다. 하지만 아픈 기억으로 인해 마음을 닫으면 내 마음이 새어나갈 일은 더 없겠지만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것도

     
 
동시에 차단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 마음 하나 지키자고 닫으면 백 사람 마음 얻을 기회를 잃는 것이다. 주거니 받거니 해야 할 것은 술잔이 아니라 마음이다.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이라고 한 공자의 말은 맞다. 그러나 오픈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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