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마음으로 통한다

대학생 임지혜 씨는 얼마 전 스마트폰을 집에 두고 나왔다가 큰 낭패를 보았습니다. 연락처, 수업 정보, 스케줄 등 중요정보가 모두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번호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114에 전화를 걸어 아버지 이름을 대고서야 겨우 전화를 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결국 컴퓨터로 메일 주소록을 열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암호가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지혜 씨는 전형적 ‘디지털치매’였던 것입니다.
디지털치매는 무엇이고 왜 생기는 걸까요? 그 원인과 해법을 알아봅니다.
글 | 김성훈 기자   디자인 | 김진복 기자  
 

 
 

혹시 나도 디지털치매?
바야흐로 IT시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 등 수많은 디지털기기들이 등장하면서 우리의 빠르고 편리한 생활을 돕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디지털기기의 편리함은 연산능력이나 문제해결력, 기억력 등 우리의 사고력 전반을 갉아먹는 역기능을 낳기도
한다. 그 중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디지털기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10~30대 연령층에게 많이 발생하고 있는 이른바 ‘디지털치매’다. 여러분도 아래와 같은 증상이 나타나면 디지털치매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외우고 다니는 전화번호가 거의 없다.
■즐겨 부르던 노래도 막상 가사를 보지 않고는 끝까지 부르기 어렵다.
■간단한 돈 계산이나 숫자 계산이 되지 않아 머뭇거릴 때가 많다.
■스마트폰 등 디지털기기가 없거나 배터리가 떨어지면 왠지
불안하다.
■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보다 휴대폰 버튼이나 키보드 입력이 더 편하다.
■같은 내용을 두 번씩 물어보거나 확인하는 경우가 잦다.
■우리말, 영어단어, 한자 등의 철자가 자주 헷갈린다.
2004년 국립국어원 신어(新語) 자료집에 처음 등장한 디지털치매는 ‘휴대폰 . 컴퓨터 등 디지털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기억력과 계산능력이 크게 떨어진 데다 과다한 정보 습득으로 각종 건망증 증세가 심해진 상태’를 뜻한다. 언제든 버튼만 누르면 금방 원하는 정보가 화면에 뜨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다보니,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제대로 된 정보를 선별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 뇌에는 무슨 일이?
최근 심리과학과 인지과학 분야에서 실시되는 연구 결과들은 “잦은 인터넷 접속과 디지털기기의 사용이 뇌의 학습능력, 사고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동안 우리 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 뇌는 눈, 귀 등의 감각을 통해 유입되는 정보를 모두 저장하지는 못한다. 시각, 청각, 촉각 등을 거쳐 접수되는 정보들 가운데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정보만을 선별하여 대뇌피질에 저장한다. 면접시험에서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가려내는 면접관이 있듯이, 뇌에도 중요한 정보를 가려내는 면접관이 존재한다. 바로 ‘해마(hippocampus)’다. 좌우 귓속에 하나씩 존재하는, 두께 1센티미터, 길이 5센티미터의 해마는, 비록 크기는 작지만 우리 기억을 관장하고 통제하는 핵심 프로세서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정보들 중 해마로부터 ‘합격’ 판정을 받은 정보는 뇌 표면에 있는 대뇌피질로 옮겨져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간에 ‘시냅스(synapse)’라는 네트워크 형태로 저장된다.
해마는 우리 뇌가 일상 속에서 받아들이는 정보들을 충분히 처리하고 선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인터넷을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처리할 경우, 해마는 과부하에 걸린다. 정보의 양이 해마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목이 좁은 병에 물을 채우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목이 좁은 병을 물이 콸콸 쏟아지는 수도꼭지에 갖다 댄다고 쉽게 빨리 물이 채워질까? 그렇지 않다. 입구로 들어간 물이 미처 병 속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물이 역류하여 흘러넘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깔때기나 스포이트를 써서 조금씩 물을 담으면 입구가 좁은 병에도 얼마든지 물을 채울 수 있다.
뇌도 마찬가지다. 짧은 시간에 무작정 많은 양의 정보가 유입된다고 해서 그 정보들이 모두 저장되는 것은 아니다. 음식물이 소화 . 흡수되어 몸의 일부가 되려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듯, 해마라는 검색대를 통과한 새로운 정보가 뇌세포에 뿌리를 내려 우리 지식의 일부로 편입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포도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시간과 에너지를 미처 발휘하기도 전에 디지털기기는 과도한 정보를 쉴 새 없이 쏟아놓는다. 따라서 해마는 정보의 중요도를 선별하는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그나마 해마를 통과한 정보들도 뇌에 정착되기 전에 사라지고 만다.

인터넷을 하는 동안 뇌는 전투 중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터넷과 디지털기기를 써서 하는 활동 중 가장 비중이 높은 것으로 자료검색, 텍스트 읽기, 동영상 감상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활동을 할 때마다 우리 뇌가 주인에게 비명을 지른다는 사실을 아는지?
먼저 자료검색이다. 구글 등 검색사이트는 우리가 찾고 싶은 정보의 키워드만 입력하면 순식간에 적게는 수백, 수천 건에서 많게는 수만 건의 자료를 화면에 띄워준다. 평생 훑어보아도 다 읽지 못할 만큼 방대한 양이다. 특히 구글의 검색기능은 굉장히 강력하기 때문에 찾고 싶은 정보와 별 상관이 없는 사이트도 단지 단어가 일치한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이트 어때요?”
하고 화면에 띄워준다. 개인적으로 그럴 때면 꼭 구글사이트가 “이 물건 어때요?” 하는 벼룩시장 흥정꾼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기업들은 자사의 사이트를 구글의 검색결과에서 상위에 올려놓기 위해 구글 측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있으며 이는 구글의 가장 큰 수입원이기도 하다.)
이제 전투는 시작됐다. 이제는 눈에 불을 켜고(!) 정보의 산더미 속에서 내게 필요한 자료를 찾아야 한다. 뇌가 얼마나 힘들까, 정말 뇌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날로그로 살아보기>의 저자이자 독일의 IT파워블로거인 크리스토프 코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지나치게 많은 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터넷에 올라온 텍스트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사이트에 접속할 때 그 사이트의 주소를 일일이 입력해서 들어가지 않는다. 십중팔구 링크를 타고, 타고 하는 식으로 들어간다. 이른바 하이퍼텍스트(hypertext)다. 그런데 인지과학자들이나 교육공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하이퍼텍스트로 연결된 글을 읽는 뇌는 글의 문맥이나 내용에 쉽게 집중하지 못한다고 한다. 오히려 글의 줄거리에 신경 쓰기보다는 링크를 하나하나 빠르게 훑으면서 긴장한 채 오로지 다음의 한 가지 생각만을 하게 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링크를 클릭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쓸데없는 링크라면 상관없지만, 정말 재밌고 유익한 정보라면 놓치기는 아까운 일인데.’
재밌는 사실은 전투에 투입되어 초긴장상태에 있는 군인들도 똑같은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지금 전방에 있는 저 사람을 쏘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군이면 상관없지만, 적군이라면 놓쳐서는 안 되는데.’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위가 있다. 바로 전전두엽 피질이다. 전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되면 우리의 뇌는 혹사를 당한다. 터프츠대학 교수이자 언어학자인 매리언 울프는 “온라인에서 무엇을 읽을 때, 우리는 깊은 독서를 가능케 하는 뇌의 기능을 희생시키며, 인간은 단순한 정보 해독기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동영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출퇴근시간에 대중교통이나 길거리에서 디지털기기로 동영상을 보는 사람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미시건대학교 마크 버먼 박사 팀의 2010년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사람들은 디지털기기로 동영상을 보며 휴식을 취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결국 뇌를 혹사시키는 일이다.”

뇌 구조까지 변화시키는 인터넷의 위력

 
 
우리 머릿속의 정보는 신경세포와 신경세포 사이에 시냅스라는 네트워크 형태로 저장된다. 뇌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우리 뇌는 약 1천억 개의 뇌세포로 되어 있으며, 각 신경세포는 약 100조 개의 시냅스로 맞물려 있다. 시냅스가 형성되는 과정은 산에 새롭게 길이 나는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길이 없던 곳도 사람들이 계속 밟고 지나가면서 풀이 없어지고 새로운 길이 생기는 것처럼, 시냅스도 처음에는 약하지만 계속 훈련과 회상을 반복하면 그 시냅스는 활성화되며 세포끼리 연결도 굵어진다. 기억의 핵심이 반복인 것은 이 때문이다. 반대로 잘 쓰지 않는 시냅스는 점점 그 연결이 약해져 뇌가 나중에 그 기능을 사용할 때 제대로 정보를 끄집어내거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현대인들은 과거에는 정보를 자신의 뇌에 저장했지만 지금은 디지털기기에 아웃소싱해 놓고 살아간다. 그 결과 머릿속의 정보네트워크인 시냅스가 점점 약해지면서, 급기야 전화번호나 아이디, 암호 등의 정보를 제대로 기억 못 하는 디지털치매를 겪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뇌의 가소성(可塑性)이다. 온라인에서 자료를 검색하는 동안 글을 깊이 읽고 느끼기보다는 훑어보고 건너뛰는 데 익숙해진 뇌는, 정작 오프라인에서 지속적인 집중력을 갖고 읽고 사고해야 할 때 제대로 작동하기 힘들어진다. 특히 UCLA 기억노화센터소장인 게리 스몰 박사의 2008년 연구나 스탠퍼드대학교 연구팀의 2009년 연구결과는 참으로 충격적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디지털기술은 우리의 삶뿐 아니라 뇌 구조에도 급속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 뇌는 관련 없는 주변 자극에 의해서도 쉽게 산만해질 뿐 아니라 특정 업무에 집중하는 능력도 떨어트린다.”

모든 길은 마음으로 통한다
애플의 아이폰4S가 국내 출시를 앞두고 있다. 아이폰4S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기능은 단연 음성인식기술 기반 소프트웨어인 시리(Siri)다. 사용자의 구두명령을 인식하여 즉시 사용자가 원하는 기능을 실행해 주고 정보를 보여 주는 시리는 참으로 편리하고 매력적인 기능이지만, 한편으론 이러다 정말 기본적인 사고능력마저 기계에 내주는 것은 아닌지 자못 염려스럽다.
오늘도 엄청난 양의 정보를 쏟아내는 인터넷은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다. 그러나 그 속에는 유해하고 잘못된 정보도 많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인터넷이 절대 가르쳐 줄 수 없는 정보도 많다.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라”는 유대 속담처럼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사유(思惟)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
디지털기술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 기술에는 마음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벤허> 같은 영화나 성 베드로 성당에 비견될 위대한 문화유산이, 그때보다 훨씬 더 발달한 기술을 갖춘 오늘날에는 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벤허나 성 베드로 성당이 당시 그것들을 만든 제작자들에게 밥벌이의 수단이 아니라 온 평생을 다 바쳐 만들어도 아깝지 않을 경배와 흠모, 그리고 신앙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담겨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엄청난 저장용량과 처리속도의 수퍼컴퓨터에 비하면, 10자리 숫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의 뇌는 깡통에 불과하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마음의 세계가 존재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쓸 수도 있고,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다. 행복을 아는 것은 물질적 부나 하드웨어, 기술이 아닌 마음에 있다. <TW> 캠페인  「생각대로? No! 」를 통해 전해지는 마음의 이야기들이 독자들에게 행복을 선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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